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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순간

문명

지도자

소개

간디

고르고

기타르자

길가메시

나디르 샤

도쿠가와

디도

라우타로

람세스 2세

로버트 1세

루트비히 2세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만사 무사

메넬리크 2세

몬테수마

바실리우스 2세

빅토리아(제국 시대)

빅토리아(증기 시대)

빌헬미나

살라딘(수상)

살라딘(술탄)

샤카

선덕

세종대왕

순자타 케이타

술레이만(무테셈)

술레이만(카누니)

시몬 볼리바르

아마니토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영국)

아키텐의 엘레오노르(프랑스)

알렉산더

암비오릭스

야드비가

에이브러햄 링컨

엘리자베스 1세

여섯하늘 여왕

영락제

윌프리드 로리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은징가 음반데

음벰바 아 은징가

자야바르만 7세

자오 부인

존 커틴

주앙 3세

진시황(천명)

진시황(통일한 자)

징기스칸

찬드라굽타

측천무후

카트린 데메디치(검은 여왕)

카트린 데메디치(위엄)

쿠빌라이칸(몽골)

쿠빌라이칸(중국)

쿠페

크리스티나

클레오파트라(이집트)

클레오파트라(프톨레마이오스)

키루스

타마르

테오도라

테오도어 루즈벨트(불 무스)

테오도어 루즈벨트(의용 기병대)

토미리스

트라야누스

파운드메이커

파차쿠티

페드로 2세

페리클레스

표트르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필립 2세

하랄드 하르드라다(바랑인)

하랄드 하르드라다(콘지)

함무라비

호조 도키무네

자야바르만 7세
특유 능력

왕립 수도원

성지는 강과 인접한 경우 큰 인접 보너스를 받으며, 강가에 있는 경우 문화 폭탄, 인접 보너스에 해당하는 식량, 주거공간 +2를 받습니다.

요약
자야바르만의 크메르 제국에는 독실한 불교 신자들이 많은 도시가 존재했으며, 모든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강 주변에 위치한 도시들이 특징입니다.
구체적인 접근 방식
자야바르만은 강 시작을 선호하는 성향을 활용하고 싶어하며, 인접 영토를 취하여 식량 및 주거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강 주변에 성지를 배치하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도시는 크메르가 송수로와 크메르 특유의 프라사트 사원이 활성화되는 고전 시대에 도달했을 때 번영을 이루게 됩니다. 주변 국가로 인해 영토가 비좁아질 경우에는 돔레이 특유의 유닛을 사용하여 인접 도시 중 일부를 포위하여 강 주변의 지역을 추가적으로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 신앙에 바탕을 둔 인구가 많은 제국인 자야바르만은 게임 후반에 접어들면서 모든 유형의 승리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
그가 크메르의 황금기를 이끌며 제반 시설을 건설하고 경쟁 왕국을 제압하는 과정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백성의 왕, 자야바르만 7세를 소개합니다.

서기 1123년에 다라닌드라바만 2세의 아들로 태어난 자야바르만 7세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은 라야비하라(현재 타프롬)와 피메아나카스 사원의 명문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 이러한 명문은 백성들이 사랑한 자야바르만 7세에 대한 풍부하지만, 온전하지는 못한 역사를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크메르가 위기에 처했던 시기에 자야바르만 7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북쪽으로는 먼 지역의 종속국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몽골인들은 동남아시아 전역에 걸쳐 상업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크메르가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원자재 교역 덕분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남쪽의 말리양에서는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는 14년에 걸쳐 진행된 참파(현재 베트남 중부 지역의 거주민)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야바르만 7세는 20대와 30대를 전쟁터에서 보냈고 참족과의 전쟁에서 친척인 야소바르만 2세를 도왔습니다. 여담으로 전설에 따르면 일식이 진행되는 동안 끔찍한 형상을 가진 라후(태양을 삼키는 공중을 떠다니는 머리)라는 신에게 공격받은 야소바르만 2세를 자야바르만 7세의 왕자들이 구해 주었다고 합니다.

1178년에는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가 이끄는 참족이 2회에 걸쳐 크메르 제국을 침공했습니다. 2차 침공 당시 참족은 수도 야쇼다라푸라를 파괴했고 앙코르와트의 사원 도시를 약탈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자야바르만 7세는 참파 중부 지역에 위치한 비자야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역사를 감안한다면 그가 참파의 사절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는 서쪽으로 참족 군사를 이끌고 진군하여 크메르의 지배권을 되찾았습니다.

이는 참파의 명문에 기록된 내용이지만, 참족 군대가 외지인과 동맹을 맺은 이유는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왕좌를 차지한 지 10년이 되는 시점에 참파의 수도인 비자야를 점령하고 인드라바르만 왕을 포획했습니다. 이때 참족의 왕자가 그를 도운 정확한 이유 또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1181년, 약간의 외교 수완과 참족 동맹군의 도움 덕분에 자야바르만 7세는 참족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국경의 긴장감이 완화되는 즉시 그는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물론 그는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앙코르 톰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습니다.

새로 즉위한 군주라면 영토 분쟁과 확장을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자야바르만 왕은 비록 참파와의 갈등을 이어갔고 심지어 1190년에는 꼭두각시 왕을 세우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관심을 내정으로 돌렸습니다. 가장 먼저 건설 공사와 제반 시설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자야바르만 7세는 간혹 전장에 나가 외부의 적과 싸우기도 했지만, 자신을 백성을 위한 전사로 여겼습니다. 국정에 집중했던 크메르의 기존 힌두교도 왕들과 달리 자야바르만 왕은 백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불교 사상을 채택했습니다.

대승불교는 관세음보살을 통해 의인화된 연민과 지혜(반야경)가 결합된 종교로 알려져 있으며, 자야바르만 왕의 목표는 신하들이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낙원을 창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대승불교를 국교로 지정하며 400년에 걸쳐 내려온 크메르 힌두교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또한, 그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다수의 사찰, 102개의 병원, 홍수의 범위에서 벗어난 돌포장 대로, 바이욘의 54개의 탑과 방대한 관개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왕국 전역에 걸쳐 15km마다 숙박 시설을 건설했다는 내용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그는 40년에 가까운 통치 동안 지속적인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자야바르만 7세는 비록 불교를 후원했지만, 브라만 사제들이 궁전 내에서의 역할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으며 이러한 역할은 오늘날의 캄보디아 왕정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야바르만 7세의 노후와 사망 시기(1215~1220년으로 추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야바르만 7세가 사망하자 사람들은 그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해 마하파라마하우가타라는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 크메르 제국은 급격한 쇠퇴의 길에 접어들고 맙니다. 1222년, 참족은 자야바르만 7세가 재위 시절에 정복했던 영토를 재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그가 건축한 수많은 사원과 호의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자야바르만 7세, 그리고 백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그의 통치 방식은 캄보디아에서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는 캄보디아의 국정 교육 자료에서 위대한 인물로 기술되어 있으며 이러한 해석은 20세기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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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부양하지 못한다면 온전한 가치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특성

문명
icon_civilization_unknown
크메르

선호

성향
번뇌의 끝
다수의 성지를 보유하고 있고 도시의 평균 인구가 높은 문명을 좋아합니다. 성지가 부족하거나 도시의 평균 인구가 낮은 문명을 싫어합니다.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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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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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부양하지 못한다면 온전한 가치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특성

문명
icon_civilization_unknown
크메르

선호

성향
번뇌의 끝
다수의 성지를 보유하고 있고 도시의 평균 인구가 높은 문명을 좋아합니다. 성지가 부족하거나 도시의 평균 인구가 낮은 문명을 싫어합니다.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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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특유 능력

왕립 수도원

성지는 강과 인접한 경우 큰 인접 보너스를 받으며, 강가에 있는 경우 문화 폭탄, 인접 보너스에 해당하는 식량, 주거공간 +2를 받습니다.

요약
자야바르만의 크메르 제국에는 독실한 불교 신자들이 많은 도시가 존재했으며, 모든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강 주변에 위치한 도시들이 특징입니다.
구체적인 접근 방식
자야바르만은 강 시작을 선호하는 성향을 활용하고 싶어하며, 인접 영토를 취하여 식량 및 주거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강 주변에 성지를 배치하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도시는 크메르가 송수로와 크메르 특유의 프라사트 사원이 활성화되는 고전 시대에 도달했을 때 번영을 이루게 됩니다. 주변 국가로 인해 영토가 비좁아질 경우에는 돔레이 특유의 유닛을 사용하여 인접 도시 중 일부를 포위하여 강 주변의 지역을 추가적으로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 신앙에 바탕을 둔 인구가 많은 제국인 자야바르만은 게임 후반에 접어들면서 모든 유형의 승리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
그가 크메르의 황금기를 이끌며 제반 시설을 건설하고 경쟁 왕국을 제압하는 과정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백성의 왕, 자야바르만 7세를 소개합니다.

서기 1123년에 다라닌드라바만 2세의 아들로 태어난 자야바르만 7세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은 라야비하라(현재 타프롬)와 피메아나카스 사원의 명문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 이러한 명문은 백성들이 사랑한 자야바르만 7세에 대한 풍부하지만, 온전하지는 못한 역사를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크메르가 위기에 처했던 시기에 자야바르만 7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북쪽으로는 먼 지역의 종속국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기 시작했고 몽골인들은 동남아시아 전역에 걸쳐 상업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크메르가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원자재 교역 덕분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남쪽의 말리양에서는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는 14년에 걸쳐 진행된 참파(현재 베트남 중부 지역의 거주민)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야바르만 7세는 20대와 30대를 전쟁터에서 보냈고 참족과의 전쟁에서 친척인 야소바르만 2세를 도왔습니다. 여담으로 전설에 따르면 일식이 진행되는 동안 끔찍한 형상을 가진 라후(태양을 삼키는 공중을 떠다니는 머리)라는 신에게 공격받은 야소바르만 2세를 자야바르만 7세의 왕자들이 구해 주었다고 합니다.

1178년에는 자야 인드라바르만 4세가 이끄는 참족이 2회에 걸쳐 크메르 제국을 침공했습니다. 2차 침공 당시 참족은 수도 야쇼다라푸라를 파괴했고 앙코르와트의 사원 도시를 약탈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자야바르만 7세는 참파 중부 지역에 위치한 비자야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역사를 감안한다면 그가 참파의 사절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는 서쪽으로 참족 군사를 이끌고 진군하여 크메르의 지배권을 되찾았습니다.

이는 참파의 명문에 기록된 내용이지만, 참족 군대가 외지인과 동맹을 맺은 이유는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왕좌를 차지한 지 10년이 되는 시점에 참파의 수도인 비자야를 점령하고 인드라바르만 왕을 포획했습니다. 이때 참족의 왕자가 그를 도운 정확한 이유 또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1181년, 약간의 외교 수완과 참족 동맹군의 도움 덕분에 자야바르만 7세는 참족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국경의 긴장감이 완화되는 즉시 그는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물론 그는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앙코르 톰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습니다.

새로 즉위한 군주라면 영토 분쟁과 확장을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자야바르만 왕은 비록 참파와의 갈등을 이어갔고 심지어 1190년에는 꼭두각시 왕을 세우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관심을 내정으로 돌렸습니다. 가장 먼저 건설 공사와 제반 시설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자야바르만 7세는 간혹 전장에 나가 외부의 적과 싸우기도 했지만, 자신을 백성을 위한 전사로 여겼습니다. 국정에 집중했던 크메르의 기존 힌두교도 왕들과 달리 자야바르만 왕은 백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불교 사상을 채택했습니다.

대승불교는 관세음보살을 통해 의인화된 연민과 지혜(반야경)가 결합된 종교로 알려져 있으며, 자야바르만 왕의 목표는 신하들이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낙원을 창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대승불교를 국교로 지정하며 400년에 걸쳐 내려온 크메르 힌두교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또한, 그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다수의 사찰, 102개의 병원, 홍수의 범위에서 벗어난 돌포장 대로, 바이욘의 54개의 탑과 방대한 관개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왕국 전역에 걸쳐 15km마다 숙박 시설을 건설했다는 내용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그는 40년에 가까운 통치 동안 지속적인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자야바르만 7세는 비록 불교를 후원했지만, 브라만 사제들이 궁전 내에서의 역할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으며 이러한 역할은 오늘날의 캄보디아 왕정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야바르만 7세의 노후와 사망 시기(1215~1220년으로 추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야바르만 7세가 사망하자 사람들은 그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해 마하파라마하우가타라는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 크메르 제국은 급격한 쇠퇴의 길에 접어들고 맙니다. 1222년, 참족은 자야바르만 7세가 재위 시절에 정복했던 영토를 재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그가 건축한 수많은 사원과 호의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자야바르만 7세, 그리고 백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그의 통치 방식은 캄보디아에서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는 캄보디아의 국정 교육 자료에서 위대한 인물로 기술되어 있으며 이러한 해석은 20세기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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