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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페르시아
특유 능력

관할구

정치 철학 완성 시 교역로 최대치 +1을 제공합니다. 자국 도시 간의 도로에서 금 +2 및 문화 +1을 제공합니다. 자국 영토 내의 도로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도로입니다.

역사적 배경
전성기에 페르시아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대부분과 아시아 일부, 흑해 연안 지역, (훗날 아프가니스탄이 되는)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 카프카스 산간 지역 일부, 이집트,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지배했습니다. 거의 2백 년 동안 문명의 요람 지역을 지배하던 페르시아에게 반기를 든 것은 마케도니아의 떠오르는 태양 알렉산더였습니다. 그는 불과 4년도 되지 않아 세계 최강의 제국을 쓰러뜨렸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불명예스러운 최후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모두 추정에 기반하는 여러 기록에 따르면 이 제국은 조부 아스티아게스와 사이가 나빴던 키루스 2세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아스티아게스 왕이 키루스가 태어나자마자 죽이려 했기 때문에, 기원전 546년 키루스가 스스로를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로 칭했을 때, 조부의 영토가 키루스의 첫 번째 정복 목표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약 540년 그는 리디아를 점령하고 1년 후에는 바빌론으로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키루스 2세는 이집트 국경에서부터 흑해 연안 지역까지 이르며 고대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아우르는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키루스' 또는 '왕 중의 왕'으로도 불리는 키루스 2세는 당대로서는 비교적 계몽적인 군주로 알려졌습니다. 그가 통치한 시절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 최초로 세금을 납부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조건하에 다양한 민족의 평등한 권리와 책임을 인정한 국가였습니다. 키루스는 각 지방의 귀족에게 지역을 자치하게 하는 '총독'제를 확립했으며, 정복한 지역의 풍습, 종교 및 경제에 관여하지 않기로 서약했습니다. 그는 동쪽 국경을 따라 요새를 건설하여 스키타이 족과 같은 야만인들의 약탈을 막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530년 이른 죽음을 맞이했는데, 스키타이에 의해 사망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키루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가 즉위했습니다. 캄비세스는 황권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친동생인 바르디야를 즉시 살해했습니다. 당대에 흔히 그랬듯이 친형제를 죽인 후에는 침공을 감행했는데, 기원전 525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쳐들어가 펠루시움과 멤피스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인접한 카르타고와 누비아에 대한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어쨌거나 이집트의 부는 제국의 권력을 더욱 강화해 주었습니다. 그 와중에 캄비세스는 이전에 죽였다고 생각했던 바르디야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고, 자국으로 돌아와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동생을 죽이려던 중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고 맙니다.

이와 동시에 캄비세스의 먼 친척이며 황제가 사망할 당시 곁에 있었던 다리우스라는 페르시아 장군이 캄비세스 황제가 절망한 나머지 자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리우스는 바르디야가 가짜라고 주장하며 메디아로 군대를 진격하여 그를 살해했습니다. 직계 후계자가 모두 사라지자 다리우스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 즉시 일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이를 예상하고 있던 다리우스는 1년 동안 19번의 전투를 치른 끝에 대다수의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이로써 제국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권위를 확실히 다진 다리우스는 기원전 521년 행정부를 재구성하고 아람어를 번성하는 제국의 공용어로 지정했으며, 자신의 이름을 딴 화폐인 '다릭'을 기반으로 한 단일 화폐 시스템을 만들어 최고의 왕위 찬탈자로서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다리우스 황제 치하의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표준 도량형이 지정되었고, 수사에서 사르디스에 이르는 2,700킬로미터 길이의 '왕의 길'이 재건 및 완공되었으며, 수사, 바빌론, 멤피스, 파사르가대와 새로운 페르세폴리스에서 다양한 공공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기원전 516년 다리우스는 공고한 권력을 기반으로 인더스 계곡을 침공하여 1년도 되지 않아 함락시켰습니다. 그리스 출신의 스킬락스를 간다라의 총독으로 임명한 후 다리우스는 제국을 재정비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페르시아를 20개 지방으로 나누고 각 지방에 (보통 자신의 친인척인) 총독을 임명하여 고정적인 비율의 세금을 바치게 했습니다. 총독들이 반란을 일으킬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도록 각 총독 관할구마다 별도로 황제에게만 복종하는 군 지휘관을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일명 '황제의 귀'라고도 불리는 황제의 스파이들이 총독과 군 지휘관 모두를 감시하며 다리우스에게 정기적으로 보고를 올렸습니다.

인도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다리우스는 이제 '위대한 다리우스'로 불리며 스키타이로 눈을 돌렸습니다. 말을 탄 이 야만인들은 총력전을 피하고자 노력했지만, 계속해서 퇴각하는 바람에 가장 좋은 목장과 가축, 그리고 여러 동맹도 잃었습니다. 하지만 한 달간 황무지를 누빈 페르시아 보병들 역시 피로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소득 없는 작전으로 더 많은 병사를 잃을 것이 걱정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스키타이 족이 충분한 타격을 받았다고 판단한 다리우스는 오아루스 강 연안에서 군대를 쉬게 했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는 '서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둔 여덟 곳의 큰 요새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다리우스는 이 교착 상태를 승리로 선포하고 기동성이 보다 약한 적을 찾아 유럽으로 진격했습니다.

그 시작은 다리우스 황제가 헬레스폰트를 넘어 난국의 그리스 정치에 관여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트라키아 침공이 발발했으며, 에게 해 북부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항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자발적으로 페르시아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습니다. 다리우스는 메가비수스 장군에게 트라키아 정복을 완수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사르디스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원전 498년 이오니아의 도시 국가들이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며, 사르디스를 점령하고 불을 질러 다리우스를 격노하게 했습니다.

기원전 492년, 이오니아 반란을 완전히 진압한 다리우스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다시 정복하기 위해 사위를 보냈으며, 그리스로 원정대를 파견하여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굴복시키고자 했습니다. 에게 해의 여러 섬을 지나 낙소스를 점령한 페르시아는 기원전 490년 에레트리아를 정복하고 불태웠습니다. 그런 다음 페르시아는 아티카 해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격하여 아테네도 침략하고자 했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3만 명의 그리스 연합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다리우스는 즉시 다음 침공을 준비하고 직접 지휘하고자 했으나,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후계자인 크세르크세스 1세가 뒤이어 그리스의 버릇을 고쳐주려 했지만, 세계 최강의 위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그조차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우선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했습니다. 하지만 선황들과는 달리 그는 반란을 일으킨 지역의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직접 통치하며 엄격하게 다스렸습니다. 기원전 482년 바빌론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집트와 똑같은 조치를 취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는 강력한 페르시아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북부 그리스로 대군을 이끌고 출전했습니다. 그의 침공을 당한 도시 국가들은 비교적 쉽게 함락되었으며,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에게 맞서 싸운 스파르타와 보이오티아의 용맹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국가인 아테네로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군대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대피했으며, 아테네의 해군은 여전히 강력했습니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전투에서 삼단노선 370척으로 구성된 그리스 선단이 페르시아 갤리 800척을 무찌르면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파괴된 그리스 배는 40척에 불과했지만, 300척에 달하는 페르시아 군함이 침몰했습니다. 이러한 패배로 인해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이 약 1년간 늦춰지면서 그리스는 침략자에 대한 방어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페르시아로 돌아가면서 마르도니우스 장군에게 지휘권을 맡겼지만, 그리스는 페르시아군의 새 지도자를 상대로 주요 해전과 육상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마르도니우스가 전사하면서 군사 작전은 끝이 났으며 살아남은 페르시아인들은 무질서하게 퇴각했습니다.

이후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를 다시 침공하지 않았지만, 이는 그렇게 할 의도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그전에 암살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원전 465년 그는 황실 친위대장이 꾸민 음모에 빠져 살해당했습니다. 그러자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선황을 암살한 친위대장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기원전 465년부터 404년까지 크세르크세스 1세를 이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크세르크세스 2세와 다리우스 2세는 모두 약하고 무능했습니다. 기원전 5세기 말경에 이르러서야 페르시아는 에게 해 인근 지역에서 어느 정도의 위세를 되찾았으며,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그리스의 내분을 조장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05년 이집트가 반란을 일으켜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페르시아의 통치를 벗어났습니다.

다리우스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45년간 페르시아를 통치했습니다. 기나긴 재위 기간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아시아 일부 지역의 그리스 식민지를 두고 스파르타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페르시아는 펠로폰네소스의 처참한 패배를 추스르던 아테네와 동맹을 맺어 스파르타와의 협상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렇듯 간간이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기원전 4세기에 들어서면서 페르시아의 약화와 분열은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기원전 373년에는 지방 장관들이 반란을 일으켜 곧 진압되었지만, 각지에서 점점 더 많은 반란이 뒤를 이었으며 황권은 눈에 띄게 약화하였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기원전 359년 배반을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친인척을 살해했습니다. 기원전 338년 환관 바고아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를 독살하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막내아들 아르세스를 추대했습니다. 아르세스는 즉시 바고아스를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했으며 오히려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바고아스는 뒤이어 다리우스 3세를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총독이었던 다리우스 3세는 선황들의 먼 친척에 불과했지만 그보다 가까운 이들은 모두 암살당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리우스 3세가 즉위한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이 이미 1백 년 이상 쇠퇴를 거듭해 온 시기였기 때문에 그가 유능한 황제였는지를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국의 여러 지역들이 점점 더 약화되는 중앙 정부에 맞서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궁전에서 벌어지는 각종 모의로 인해 군주제는 한층 더 약화되었으며, 살아남고자 하는 지도자들은 제국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살피는 데 급급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지도자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습니다.

자국 내에서 발생하는 어떤 골칫거리도 헬레스폰트 건너편에서부터 다리우스를 향해 다가오는 문제에 비교할 수는 없었습니다. 기원전 336년, 훗날 '알렉산더 대왕'으로 불리게 되는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이 흔들리는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다리우스 황제는 훨씬 많은 수의 대군을 거느리고 여러 차례 그에게 맞서 싸웠지만,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군대를 손쉽게 하나씩 쓰러뜨렸습니다. 기원전 330년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가 알렉산더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같은 해 다리우스 황제도 살해당했습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 중의 왕'이 쓰러진 것입니다.
PortraitSqu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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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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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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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르 샤
특수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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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자
특수 인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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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리다에자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아시아와 아프리카
크기
최대 550만 제곱킬로미터
인구
최대 3,500만 명(추정)
수도
파사르가대, 바빌론, 페르세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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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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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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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르 샤
특수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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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자
특수 인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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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리다에자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아시아와 아프리카
크기
최대 550만 제곱킬로미터
인구
최대 3,500만 명(추정)
수도
파사르가대, 바빌론, 페르세폴리스
특유 능력

관할구

정치 철학 완성 시 교역로 최대치 +1을 제공합니다. 자국 도시 간의 도로에서 금 +2 및 문화 +1을 제공합니다. 자국 영토 내의 도로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도로입니다.

역사적 배경
전성기에 페르시아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대부분과 아시아 일부, 흑해 연안 지역, (훗날 아프가니스탄이 되는)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 카프카스 산간 지역 일부, 이집트,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지배했습니다. 거의 2백 년 동안 문명의 요람 지역을 지배하던 페르시아에게 반기를 든 것은 마케도니아의 떠오르는 태양 알렉산더였습니다. 그는 불과 4년도 되지 않아 세계 최강의 제국을 쓰러뜨렸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불명예스러운 최후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모두 추정에 기반하는 여러 기록에 따르면 이 제국은 조부 아스티아게스와 사이가 나빴던 키루스 2세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아스티아게스 왕이 키루스가 태어나자마자 죽이려 했기 때문에, 기원전 546년 키루스가 스스로를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로 칭했을 때, 조부의 영토가 키루스의 첫 번째 정복 목표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약 540년 그는 리디아를 점령하고 1년 후에는 바빌론으로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키루스 2세는 이집트 국경에서부터 흑해 연안 지역까지 이르며 고대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아우르는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키루스' 또는 '왕 중의 왕'으로도 불리는 키루스 2세는 당대로서는 비교적 계몽적인 군주로 알려졌습니다. 그가 통치한 시절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 최초로 세금을 납부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조건하에 다양한 민족의 평등한 권리와 책임을 인정한 국가였습니다. 키루스는 각 지방의 귀족에게 지역을 자치하게 하는 '총독'제를 확립했으며, 정복한 지역의 풍습, 종교 및 경제에 관여하지 않기로 서약했습니다. 그는 동쪽 국경을 따라 요새를 건설하여 스키타이 족과 같은 야만인들의 약탈을 막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530년 이른 죽음을 맞이했는데, 스키타이에 의해 사망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키루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가 즉위했습니다. 캄비세스는 황권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친동생인 바르디야를 즉시 살해했습니다. 당대에 흔히 그랬듯이 친형제를 죽인 후에는 침공을 감행했는데, 기원전 525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쳐들어가 펠루시움과 멤피스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인접한 카르타고와 누비아에 대한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어쨌거나 이집트의 부는 제국의 권력을 더욱 강화해 주었습니다. 그 와중에 캄비세스는 이전에 죽였다고 생각했던 바르디야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고, 자국으로 돌아와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동생을 죽이려던 중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고 맙니다.

이와 동시에 캄비세스의 먼 친척이며 황제가 사망할 당시 곁에 있었던 다리우스라는 페르시아 장군이 캄비세스 황제가 절망한 나머지 자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리우스는 바르디야가 가짜라고 주장하며 메디아로 군대를 진격하여 그를 살해했습니다. 직계 후계자가 모두 사라지자 다리우스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 즉시 일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이를 예상하고 있던 다리우스는 1년 동안 19번의 전투를 치른 끝에 대다수의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이로써 제국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권위를 확실히 다진 다리우스는 기원전 521년 행정부를 재구성하고 아람어를 번성하는 제국의 공용어로 지정했으며, 자신의 이름을 딴 화폐인 '다릭'을 기반으로 한 단일 화폐 시스템을 만들어 최고의 왕위 찬탈자로서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다리우스 황제 치하의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표준 도량형이 지정되었고, 수사에서 사르디스에 이르는 2,700킬로미터 길이의 '왕의 길'이 재건 및 완공되었으며, 수사, 바빌론, 멤피스, 파사르가대와 새로운 페르세폴리스에서 다양한 공공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기원전 516년 다리우스는 공고한 권력을 기반으로 인더스 계곡을 침공하여 1년도 되지 않아 함락시켰습니다. 그리스 출신의 스킬락스를 간다라의 총독으로 임명한 후 다리우스는 제국을 재정비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페르시아를 20개 지방으로 나누고 각 지방에 (보통 자신의 친인척인) 총독을 임명하여 고정적인 비율의 세금을 바치게 했습니다. 총독들이 반란을 일으킬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도록 각 총독 관할구마다 별도로 황제에게만 복종하는 군 지휘관을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일명 '황제의 귀'라고도 불리는 황제의 스파이들이 총독과 군 지휘관 모두를 감시하며 다리우스에게 정기적으로 보고를 올렸습니다.

인도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다리우스는 이제 '위대한 다리우스'로 불리며 스키타이로 눈을 돌렸습니다. 말을 탄 이 야만인들은 총력전을 피하고자 노력했지만, 계속해서 퇴각하는 바람에 가장 좋은 목장과 가축, 그리고 여러 동맹도 잃었습니다. 하지만 한 달간 황무지를 누빈 페르시아 보병들 역시 피로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소득 없는 작전으로 더 많은 병사를 잃을 것이 걱정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스키타이 족이 충분한 타격을 받았다고 판단한 다리우스는 오아루스 강 연안에서 군대를 쉬게 했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는 '서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둔 여덟 곳의 큰 요새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다리우스는 이 교착 상태를 승리로 선포하고 기동성이 보다 약한 적을 찾아 유럽으로 진격했습니다.

그 시작은 다리우스 황제가 헬레스폰트를 넘어 난국의 그리스 정치에 관여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트라키아 침공이 발발했으며, 에게 해 북부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항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자발적으로 페르시아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습니다. 다리우스는 메가비수스 장군에게 트라키아 정복을 완수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사르디스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원전 498년 이오니아의 도시 국가들이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며, 사르디스를 점령하고 불을 질러 다리우스를 격노하게 했습니다.

기원전 492년, 이오니아 반란을 완전히 진압한 다리우스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다시 정복하기 위해 사위를 보냈으며, 그리스로 원정대를 파견하여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굴복시키고자 했습니다. 에게 해의 여러 섬을 지나 낙소스를 점령한 페르시아는 기원전 490년 에레트리아를 정복하고 불태웠습니다. 그런 다음 페르시아는 아티카 해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격하여 아테네도 침략하고자 했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3만 명의 그리스 연합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다리우스는 즉시 다음 침공을 준비하고 직접 지휘하고자 했으나,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후계자인 크세르크세스 1세가 뒤이어 그리스의 버릇을 고쳐주려 했지만, 세계 최강의 위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그조차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우선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했습니다. 하지만 선황들과는 달리 그는 반란을 일으킨 지역의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직접 통치하며 엄격하게 다스렸습니다. 기원전 482년 바빌론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집트와 똑같은 조치를 취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는 강력한 페르시아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북부 그리스로 대군을 이끌고 출전했습니다. 그의 침공을 당한 도시 국가들은 비교적 쉽게 함락되었으며,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에게 맞서 싸운 스파르타와 보이오티아의 용맹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국가인 아테네로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군대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대피했으며, 아테네의 해군은 여전히 강력했습니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전투에서 삼단노선 370척으로 구성된 그리스 선단이 페르시아 갤리 800척을 무찌르면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파괴된 그리스 배는 40척에 불과했지만, 300척에 달하는 페르시아 군함이 침몰했습니다. 이러한 패배로 인해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이 약 1년간 늦춰지면서 그리스는 침략자에 대한 방어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페르시아로 돌아가면서 마르도니우스 장군에게 지휘권을 맡겼지만, 그리스는 페르시아군의 새 지도자를 상대로 주요 해전과 육상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마르도니우스가 전사하면서 군사 작전은 끝이 났으며 살아남은 페르시아인들은 무질서하게 퇴각했습니다.

이후 크세르크세스 1세는 그리스를 다시 침공하지 않았지만, 이는 그렇게 할 의도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그전에 암살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원전 465년 그는 황실 친위대장이 꾸민 음모에 빠져 살해당했습니다. 그러자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선황을 암살한 친위대장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기원전 465년부터 404년까지 크세르크세스 1세를 이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크세르크세스 2세와 다리우스 2세는 모두 약하고 무능했습니다. 기원전 5세기 말경에 이르러서야 페르시아는 에게 해 인근 지역에서 어느 정도의 위세를 되찾았으며,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그리스의 내분을 조장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05년 이집트가 반란을 일으켜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페르시아의 통치를 벗어났습니다.

다리우스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45년간 페르시아를 통치했습니다. 기나긴 재위 기간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아시아 일부 지역의 그리스 식민지를 두고 스파르타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페르시아는 펠로폰네소스의 처참한 패배를 추스르던 아테네와 동맹을 맺어 스파르타와의 협상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렇듯 간간이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기원전 4세기에 들어서면서 페르시아의 약화와 분열은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기원전 373년에는 지방 장관들이 반란을 일으켜 곧 진압되었지만, 각지에서 점점 더 많은 반란이 뒤를 이었으며 황권은 눈에 띄게 약화하였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기원전 359년 배반을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친인척을 살해했습니다. 기원전 338년 환관 바고아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를 독살하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막내아들 아르세스를 추대했습니다. 아르세스는 즉시 바고아스를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했으며 오히려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바고아스는 뒤이어 다리우스 3세를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총독이었던 다리우스 3세는 선황들의 먼 친척에 불과했지만 그보다 가까운 이들은 모두 암살당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리우스 3세가 즉위한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이 이미 1백 년 이상 쇠퇴를 거듭해 온 시기였기 때문에 그가 유능한 황제였는지를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국의 여러 지역들이 점점 더 약화되는 중앙 정부에 맞서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궁전에서 벌어지는 각종 모의로 인해 군주제는 한층 더 약화되었으며, 살아남고자 하는 지도자들은 제국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살피는 데 급급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지도자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습니다.

자국 내에서 발생하는 어떤 골칫거리도 헬레스폰트 건너편에서부터 다리우스를 향해 다가오는 문제에 비교할 수는 없었습니다. 기원전 336년, 훗날 '알렉산더 대왕'으로 불리게 되는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이 흔들리는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다리우스 황제는 훨씬 많은 수의 대군을 거느리고 여러 차례 그에게 맞서 싸웠지만,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군대를 손쉽게 하나씩 쓰러뜨렸습니다. 기원전 330년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가 알렉산더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같은 해 다리우스 황제도 살해당했습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 중의 왕'이 쓰러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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