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야르(귀족), 코사크, 양파형 돔, 눈 덮인 자연, 시베리아의 '황무지', 여유로운 농부들, 감동적인 미술품, 끝이 없는 겨울과 얼음을 넣은 보드카 등과 같이 러시아의 낭만은 매력적이지만 특히 러시아의 농민들이 들려주는 실제의 역사를 접하고 나면 그 매력이 반감됩니다. 유럽과 아시아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는 러시아는 일부 다른 민족 국가와 같이 세계 문명에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러시아는 노르웨이인들에 의해 형성된 노브고로드 최초의 정착지와 올레그가 882년경에 세운 키예프 공국의 식민지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올레그는 지역에 거주하던 일벤 슬라브, 핀 우그리아, 벱스와 보트족을 모두 정복했지만 이것은 신화와 전설이 섞인 이야기입니다. 우선 모스크바 대공국이 부상하게 된 과정부터 살펴봅시다.
모든 상황은 유명한 알렉상드르 네브스키의 넷째 아들이자 막내인 다닐 알렉산드로비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선친이 서기 1263년에 사망하자 당시 두 살이었던 다닐은 가장 가치가 떨어지는 영토를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오지에 위치한 이 작은 공국의 이름은 모스크바였습니다. 그는 이어진 10년 동안 탐욕스런 형제들과 서쪽에서 밀려드는 몽골족들을 막아내는 데 허비했습니다. 형제 간의 분쟁과 몽골족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다닐은 자신의 공국이 도처에서 발생하는 유혈 사태에 휘말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온화하고 겸손하며 평온했던 다닐을 1652년에 성자로 공표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닐은 황금 군단에 공물을 지불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그는 가깝고 먼 친척들이 하나둘씩 사망하자 이들의 영토를 '평화적으로' 흡수했고 성 다닐이 승하한 1303년에는 모스크바가 '대공국'이 되었습니다.
평화를 그렇게 많이 지향하지 않지만 유능한 대공들이 다닐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모스크바 대공국을 지도상에 올린 인물은 이반 3세(이반 대제)였습니다. 1462년부터 1505년까지 지속된 재위 기간 동안 그는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트베르 공화국을 비롯한 여러 공국을 합병하여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를 세 배로 늘렸으며 황금 군단에 대한 공물 제공을 중단하고 중앙 행정부의 뼈대를 마련했으며 보야라의 독립을 제한하고 류리크 왕조가 머물던 크렘린 궁전을 보수했습니다. 러시아의 중추를 강화한 이반 3세는 스스로에게 차르 및 '러시아 전체의 통치자'라는 직위를 부여했습니다. 비록 정식으로 '차르' 직위에 오른 최초의 인물은 이반 4세('이반 뇌제')였지만 러시아의 '통합'에 착수한 이는 이반 3세였습니다.
과대망상광이자 반사회적 인물이었던 이반 4세는 불운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선친이 사망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세 살에 불과했고 몸도 병약했습니다. 장기화된 섭정 정치로 수많은 정치적 음모의 타겟이 되었고 이반은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이반이 성인이 되자 좋지 않았던 상황은 '최악'으로 변했습니다. 그의 몸이 성치 않았고 여섯 차례에 걸쳐 결혼을 했다는 사실 외에는 그의 실질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정당한 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이반은 자신의 힘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고 다른 이들의 안위는 전혀 안중에 없었습니다. 독립적인 귀족들은 왕실에서 추방되었고 간사한 아첨쟁이만이 왕실에 드글거렸습니다. 군부의 상위 계층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제거되었습니다. 이반은 1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영토를 오프리치니나(왕실 소유지)로 선포하여 이를 직접 관리했습니다. 인도주의적인 성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그는 군부 지도자로서의 역량도 형편없었습니다. 그는 25년에 걸쳐 지속된 처참한 리보니아 전쟁으로 군대를 전멸시키다시피 했고 국가는 파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행스럽게도' 1584년에 사망했습니다.
한 세대의 시간이 지났고 류리크 왕조는 로마노프 왕조로 교체되었습니다. 이반 4세의 아들이었던 페오도르 1세가 사망하자 러시아는 '혼란의 시기'에 빠져들게 되었고 페오도르에게 왕위를 상속받을 아들이 없었던 관계로 악재가 이어졌습니다. 러시아 의회에서는 결국 보리스 고두노프를 차기 차르로 정했습니다. 그는 7년 동안 재위했으며 '가짜 드미트리'로 불리는 여러 협잡꾼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고, 이 협잡꾼들은 서로 자신이 오래 전에 사망한 페오도르의 남동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외국인을 포함한 이러한 사기꾼들의 주장은 1613년에 귀족층에서 미카엘 로마노프를 왕좌에 올리면서 일단락 됩니다. 로마노프 왕가는 마지막 황제인 볼셰비키가 예카테린부르크의 지하실에서 총에 맞아 사망할 때까지 대대로 군림했습니다.
앞선 폭군들에 비하면 로마노프의 차르들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이 중 몇몇은 '대제'라는 호칭을 얻었으며 다른 여러 황제들도 이에 준하는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단, 같은 이름을 가진 왕가에서도 이미 이 호칭을 획득한 바 있습니다. 앞선 로마노프 왕가는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및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와의 조약 체결을 마무리했습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코사크는 차르의 부하로서 일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더욱 엄격해진 새로운 농민 규제로 인해 소금 반란, 구리 반란 및 모스크바 반란 등의 수많은 농민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반란은 평상시처럼 적시적소에서 진압되었습니다. 또한 러시아는 동쪽의 시베리아로 이어지는 정복과 식민지화를 위주로 계속해서 규모를 늘려갔습니다.
이어서 대제들이 출현했습니다. 표트르 대제는 오스만과 스웨덴을 상대로 벌인 일련의 성공적인 전쟁을 통해 황제 즉위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으며 유럽에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싫다고 발버둥 치는 러시아를 문예 부흥의 세계로 끌고 나갔습니다. 표트르 1세가 사망한지 40년 후, 심지어는 러시아 태생도 아니었던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시작된 제국의 본격적인 '황금기'를 통해 러시아가 유럽의 강대국이 되었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머나먼 알래스카의 식민지화를 시작했습니다. '축복받은 자'로 알려진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대격변의 시기에 러시아를 이끌었으며 프랑스가 침공했을 때에는 전투를 피하고 프랑스군 앞에서 모든 자산을 불태워 버리는 방식으로 나폴레옹을 무력화했습니다. 또한 그는 1821년에 발생한 '그리스인들의 반란' 이후 발칸 반도의 수렁에 자신의 국가를 확고히 정착시켰습니다. 하지만 '해방자' 알렉산드르 1세는 농민 '해방'을 비롯한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암살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오랜 기간 동안 러시아는 고유한 문화와 문학, 음악, 춤과 건축 분야에서의 탁월한 전통을 발전시켰습니다. 표트르 대제가 유럽의 강대국들에게 활짝 문을 열었을 때에도 러시아의 민속 문화와 공예품들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슬라브족의 독특한 성격과 러시아 정교의 색깔을 띠거나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최초이자 가장 위대했던 전도 여행은 선교사를 키예프 공국으로 파견하는 것이었습니다. 10세기 중반에는 그리스 정교가 수많은 러시아 평민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고 이는 지금까지도 건재합니다. 뿐만 아니라 류리크 왕조와 로마노프 왕조 초기에는 스칸디나비아와 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요소가 러시아의 다양한 문화에 더해졌습니다. 국외 거주자들은 러시아의 문화를 전 세계에 전파했으며, 전 세계인들이 아름다운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된 데에는 러시아의 공이 압도적으로 컸습니다.
문학에서는 슬라브족의 빌리나가 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수많은 작품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위대한 체호프는 글자 수를 조절할 줄 알았습니다. 발랄라이카, 아코디언과 잘레이카로 연주하던 민속 음악의 소박한 화음은 글린카, 무조르그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 그리고 낭만주의 시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인 차이콥스키의 복잡하고 웅장한 곡으로 진화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러시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농민들의 호로보드와 귀부인들의 바리나 등의 민속 춤은 표트르 대제가 처음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들여온 발레와 공존했습니다. 발레는 특히 문화 상류층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평균적인 측면에서 러시아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요소 중 하나를 고르라면 건축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정교회와 함께 비잔틴 건축 양식이 도래했습니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요새와 교회를 비롯한 석조 건물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서양에 개방하고 예술 부흥을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의 건축가들은 로코코 양식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카테리나와 알렉산드르 가문의 통치 하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신고전 건물로 가득한 박물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칙칙한 소비에트 양식이 의무화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비록 러시아에서는 위대하거나 유명한 미술가와 조각가가 많이 배출되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민속 미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환한 색으로 칠한 둥지 모양의 인형인 마트료시카는 세계 어디서나 사랑받고 있으며 지금도 연말이 되면 전 세계 곳곳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습니다. 목판에 종교 관련 그림을 그려 넣은 러시아의 성화는 정통 기독교 신앙을 가진 슬라브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주로 금박을 입힌 이 정교한 성화들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되었으며 초기 러시아의 위대한 장인들은 이 경이로운 성화를 만들기 위해 모든 실력을 쏟아부었습니다. '그젤'이라는 용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누구나 그젤이 지칭하는 독특한 양식의 도자기는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해방자의 아들이었던 '중재자' 알렉산드르의 뒤를 이어 로마노프 가문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즉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국정에 서툴렀던 탓인지 별명조차 없습니다. 니콜라이는 내외적으로 온갖 문제를 떠안고 있는 러시아를 상속받았습니다. 그는 '관용에 의한' 독재 통치를 굳게 믿었고 차르가 백성의 '아버지'라 여겼습니다. 그는 선친의 보수적인 정책과 정치를 유지했지만 이는 좋은 결정이 아니었으며 백성들이 적대시한 독일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1900년에는 러시아의 개혁과 근대화가 절실했지만 오히려 억압과 유혈만이 존재했습니다. 모두가 싫어한 그레고리 라스푸틴을 비롯한 아첨꾼들 때문에 현실과 동떨어져 있던 니콜라이는 농업이나 산업 생산을 개선하지 못했고 러시아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뒤쳐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영국의 민주주의에 크게 감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불만만 쌓여가는 시대의 정치적 개혁을 도입하는 데 필요한 이상은 부족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낸 자문위원회인 국회를 멀리 했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침몰하지 않으려 아둥바둥하는 국가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었습니다. 그는 호딘카의 비극, 피의 일요일, 유대인 학살, 수포로 돌아간 1905년 개혁에 대한 억압과 그를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처형 등의 사건으로 국민들 대부분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러시아를 참담한 군사 행동에 휘말리게 했으며 1905년에는 일본 제국에게 수치스런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이는 러시아 군대에 개혁과 근대화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지만 둘 중 아무 것도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에는 포템킨 반란 등의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곧 이어 러시아가 제1차 세계전쟁에 휘말리면서 니콜라이 2세의 착오는 극에 달했습니다.
1917년 2월, 도시 내의 극심한 식량 부족으로 굶주리고 혹독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석탄과 땔감이 없어 벌벌 떨고 있는 시민들을 향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경찰이 총을 발포하면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전쟁을 중단하고 차르를 끌어 내려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군중을 통제하기 위한 초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볼린스키 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항명했고 다른 부대들 역시 여기에 가담했습니다. 수도의 질서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의회에서는 임시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했고 니콜라이는 퇴위했습니다. 의회에서는 니콜라이의 형제인 미카엘에게 왕위를 제안했지만 그는 현명하게도 이를 거부했습니다. 제국을 대체한 민주주의 정부 역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의해 교체되었습니다.
보야르(귀족), 코사크, 양파형 돔, 눈 덮인 자연, 시베리아의 '황무지', 여유로운 농부들, 감동적인 미술품, 끝이 없는 겨울과 얼음을 넣은 보드카 등과 같이 러시아의 낭만은 매력적이지만 특히 러시아의 농민들이 들려주는 실제의 역사를 접하고 나면 그 매력이 반감됩니다. 유럽과 아시아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는 러시아는 일부 다른 민족 국가와 같이 세계 문명에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러시아는 노르웨이인들에 의해 형성된 노브고로드 최초의 정착지와 올레그가 882년경에 세운 키예프 공국의 식민지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올레그는 지역에 거주하던 일벤 슬라브, 핀 우그리아, 벱스와 보트족을 모두 정복했지만 이것은 신화와 전설이 섞인 이야기입니다. 우선 모스크바 대공국이 부상하게 된 과정부터 살펴봅시다.
모든 상황은 유명한 알렉상드르 네브스키의 넷째 아들이자 막내인 다닐 알렉산드로비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선친이 서기 1263년에 사망하자 당시 두 살이었던 다닐은 가장 가치가 떨어지는 영토를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오지에 위치한 이 작은 공국의 이름은 모스크바였습니다. 그는 이어진 10년 동안 탐욕스런 형제들과 서쪽에서 밀려드는 몽골족들을 막아내는 데 허비했습니다. 형제 간의 분쟁과 몽골족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다닐은 자신의 공국이 도처에서 발생하는 유혈 사태에 휘말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온화하고 겸손하며 평온했던 다닐을 1652년에 성자로 공표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닐은 황금 군단에 공물을 지불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그는 가깝고 먼 친척들이 하나둘씩 사망하자 이들의 영토를 '평화적으로' 흡수했고 성 다닐이 승하한 1303년에는 모스크바가 '대공국'이 되었습니다.
평화를 그렇게 많이 지향하지 않지만 유능한 대공들이 다닐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모스크바 대공국을 지도상에 올린 인물은 이반 3세(이반 대제)였습니다. 1462년부터 1505년까지 지속된 재위 기간 동안 그는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트베르 공화국을 비롯한 여러 공국을 합병하여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를 세 배로 늘렸으며 황금 군단에 대한 공물 제공을 중단하고 중앙 행정부의 뼈대를 마련했으며 보야라의 독립을 제한하고 류리크 왕조가 머물던 크렘린 궁전을 보수했습니다. 러시아의 중추를 강화한 이반 3세는 스스로에게 차르 및 '러시아 전체의 통치자'라는 직위를 부여했습니다. 비록 정식으로 '차르' 직위에 오른 최초의 인물은 이반 4세('이반 뇌제')였지만 러시아의 '통합'에 착수한 이는 이반 3세였습니다.
과대망상광이자 반사회적 인물이었던 이반 4세는 불운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선친이 사망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세 살에 불과했고 몸도 병약했습니다. 장기화된 섭정 정치로 수많은 정치적 음모의 타겟이 되었고 이반은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이반이 성인이 되자 좋지 않았던 상황은 '최악'으로 변했습니다. 그의 몸이 성치 않았고 여섯 차례에 걸쳐 결혼을 했다는 사실 외에는 그의 실질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정당한 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이반은 자신의 힘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고 다른 이들의 안위는 전혀 안중에 없었습니다. 독립적인 귀족들은 왕실에서 추방되었고 간사한 아첨쟁이만이 왕실에 드글거렸습니다. 군부의 상위 계층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제거되었습니다. 이반은 1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영토를 오프리치니나(왕실 소유지)로 선포하여 이를 직접 관리했습니다. 인도주의적인 성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그는 군부 지도자로서의 역량도 형편없었습니다. 그는 25년에 걸쳐 지속된 처참한 리보니아 전쟁으로 군대를 전멸시키다시피 했고 국가는 파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행스럽게도' 1584년에 사망했습니다.
한 세대의 시간이 지났고 류리크 왕조는 로마노프 왕조로 교체되었습니다. 이반 4세의 아들이었던 페오도르 1세가 사망하자 러시아는 '혼란의 시기'에 빠져들게 되었고 페오도르에게 왕위를 상속받을 아들이 없었던 관계로 악재가 이어졌습니다. 러시아 의회에서는 결국 보리스 고두노프를 차기 차르로 정했습니다. 그는 7년 동안 재위했으며 '가짜 드미트리'로 불리는 여러 협잡꾼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고, 이 협잡꾼들은 서로 자신이 오래 전에 사망한 페오도르의 남동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외국인을 포함한 이러한 사기꾼들의 주장은 1613년에 귀족층에서 미카엘 로마노프를 왕좌에 올리면서 일단락 됩니다. 로마노프 왕가는 마지막 황제인 볼셰비키가 예카테린부르크의 지하실에서 총에 맞아 사망할 때까지 대대로 군림했습니다.
앞선 폭군들에 비하면 로마노프의 차르들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이 중 몇몇은 '대제'라는 호칭을 얻었으며 다른 여러 황제들도 이에 준하는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단, 같은 이름을 가진 왕가에서도 이미 이 호칭을 획득한 바 있습니다. 앞선 로마노프 왕가는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및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와의 조약 체결을 마무리했습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코사크는 차르의 부하로서 일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더욱 엄격해진 새로운 농민 규제로 인해 소금 반란, 구리 반란 및 모스크바 반란 등의 수많은 농민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반란은 평상시처럼 적시적소에서 진압되었습니다. 또한 러시아는 동쪽의 시베리아로 이어지는 정복과 식민지화를 위주로 계속해서 규모를 늘려갔습니다.
이어서 대제들이 출현했습니다. 표트르 대제는 오스만과 스웨덴을 상대로 벌인 일련의 성공적인 전쟁을 통해 황제 즉위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으며 유럽에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싫다고 발버둥 치는 러시아를 문예 부흥의 세계로 끌고 나갔습니다. 표트르 1세가 사망한지 40년 후, 심지어는 러시아 태생도 아니었던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시작된 제국의 본격적인 '황금기'를 통해 러시아가 유럽의 강대국이 되었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머나먼 알래스카의 식민지화를 시작했습니다. '축복받은 자'로 알려진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대격변의 시기에 러시아를 이끌었으며 프랑스가 침공했을 때에는 전투를 피하고 프랑스군 앞에서 모든 자산을 불태워 버리는 방식으로 나폴레옹을 무력화했습니다. 또한 그는 1821년에 발생한 '그리스인들의 반란' 이후 발칸 반도의 수렁에 자신의 국가를 확고히 정착시켰습니다. 하지만 '해방자' 알렉산드르 1세는 농민 '해방'을 비롯한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암살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오랜 기간 동안 러시아는 고유한 문화와 문학, 음악, 춤과 건축 분야에서의 탁월한 전통을 발전시켰습니다. 표트르 대제가 유럽의 강대국들에게 활짝 문을 열었을 때에도 러시아의 민속 문화와 공예품들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슬라브족의 독특한 성격과 러시아 정교의 색깔을 띠거나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최초이자 가장 위대했던 전도 여행은 선교사를 키예프 공국으로 파견하는 것이었습니다. 10세기 중반에는 그리스 정교가 수많은 러시아 평민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고 이는 지금까지도 건재합니다. 뿐만 아니라 류리크 왕조와 로마노프 왕조 초기에는 스칸디나비아와 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요소가 러시아의 다양한 문화에 더해졌습니다. 국외 거주자들은 러시아의 문화를 전 세계에 전파했으며, 전 세계인들이 아름다운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된 데에는 러시아의 공이 압도적으로 컸습니다.
문학에서는 슬라브족의 빌리나가 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수많은 작품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위대한 체호프는 글자 수를 조절할 줄 알았습니다. 발랄라이카, 아코디언과 잘레이카로 연주하던 민속 음악의 소박한 화음은 글린카, 무조르그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 그리고 낭만주의 시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인 차이콥스키의 복잡하고 웅장한 곡으로 진화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러시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농민들의 호로보드와 귀부인들의 바리나 등의 민속 춤은 표트르 대제가 처음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들여온 발레와 공존했습니다. 발레는 특히 문화 상류층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평균적인 측면에서 러시아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요소 중 하나를 고르라면 건축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정교회와 함께 비잔틴 건축 양식이 도래했습니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요새와 교회를 비롯한 석조 건물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서양에 개방하고 예술 부흥을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의 건축가들은 로코코 양식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카테리나와 알렉산드르 가문의 통치 하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신고전 건물로 가득한 박물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칙칙한 소비에트 양식이 의무화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비록 러시아에서는 위대하거나 유명한 미술가와 조각가가 많이 배출되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민속 미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환한 색으로 칠한 둥지 모양의 인형인 마트료시카는 세계 어디서나 사랑받고 있으며 지금도 연말이 되면 전 세계 곳곳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습니다. 목판에 종교 관련 그림을 그려 넣은 러시아의 성화는 정통 기독교 신앙을 가진 슬라브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주로 금박을 입힌 이 정교한 성화들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되었으며 초기 러시아의 위대한 장인들은 이 경이로운 성화를 만들기 위해 모든 실력을 쏟아부었습니다. '그젤'이라는 용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누구나 그젤이 지칭하는 독특한 양식의 도자기는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해방자의 아들이었던 '중재자' 알렉산드르의 뒤를 이어 로마노프 가문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즉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국정에 서툴렀던 탓인지 별명조차 없습니다. 니콜라이는 내외적으로 온갖 문제를 떠안고 있는 러시아를 상속받았습니다. 그는 '관용에 의한' 독재 통치를 굳게 믿었고 차르가 백성의 '아버지'라 여겼습니다. 그는 선친의 보수적인 정책과 정치를 유지했지만 이는 좋은 결정이 아니었으며 백성들이 적대시한 독일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1900년에는 러시아의 개혁과 근대화가 절실했지만 오히려 억압과 유혈만이 존재했습니다. 모두가 싫어한 그레고리 라스푸틴을 비롯한 아첨꾼들 때문에 현실과 동떨어져 있던 니콜라이는 농업이나 산업 생산을 개선하지 못했고 러시아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뒤쳐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영국의 민주주의에 크게 감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불만만 쌓여가는 시대의 정치적 개혁을 도입하는 데 필요한 이상은 부족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낸 자문위원회인 국회를 멀리 했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침몰하지 않으려 아둥바둥하는 국가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었습니다. 그는 호딘카의 비극, 피의 일요일, 유대인 학살, 수포로 돌아간 1905년 개혁에 대한 억압과 그를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처형 등의 사건으로 국민들 대부분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러시아를 참담한 군사 행동에 휘말리게 했으며 1905년에는 일본 제국에게 수치스런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이는 러시아 군대에 개혁과 근대화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지만 둘 중 아무 것도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에는 포템킨 반란 등의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곧 이어 러시아가 제1차 세계전쟁에 휘말리면서 니콜라이 2세의 착오는 극에 달했습니다.
1917년 2월, 도시 내의 극심한 식량 부족으로 굶주리고 혹독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석탄과 땔감이 없어 벌벌 떨고 있는 시민들을 향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경찰이 총을 발포하면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전쟁을 중단하고 차르를 끌어 내려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군중을 통제하기 위한 초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볼린스키 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항명했고 다른 부대들 역시 여기에 가담했습니다. 수도의 질서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의회에서는 임시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했고 니콜라이는 퇴위했습니다. 의회에서는 니콜라이의 형제인 미카엘에게 왕위를 제안했지만 그는 현명하게도 이를 거부했습니다. 제국을 대체한 민주주의 정부 역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의해 교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