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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크리

크메르

페르시아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한국

호주

지도자

콩고
특유 능력

엔키시

각 성유물, 영웅 성유물, 유물 및 조각상 걸작 예술품에서 일반적으로 받는 문화 외에 추가로 식량 +2, 생산력 +2, 신앙 +1, 금 +4가 제공됩니다.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음악가 및 위대한 상인 점수를 +50% 더 받습니다. 궁전은 걸작 슬롯 5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
전설에 따르면 콩고라 불리는 왕국이 세워진 이면에는 크윌루 밸리 주변의 음펨바 카시 왕국이 겪은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음펨바 카시 왕국은 매우 규모가 컸지만 그리 부유한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국력이 약한 음펨바 카시가 특정 시점에 음바타라는 군국주의적인 인접국과 손을 잡았고, 마침내 남쪽의 고원에 위치한 음웨네 카붕가 왕국을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니미 루케니'라는 전사는 이 영토를 모두 합병하는 동시에 음반자 콩고라는 산악 마을을 수도로 정했습니다. 이로써 1390년에 콩고 왕국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콩고는 전성기 시절에 아프리카의 중부 대서양 해안에서 쾅고 강까지, 북부의 푸앵트 느와르에서 남부의 로제 강으로 이어지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초대 마니콩고('왕')는 물론 니미였습니다. 니미가 사망하자 그의 형제인 음보카니 음빙가가 왕좌에 올랐고, 두 명의 왕비와 아홉 명의 자식을 거느린 그의 왕족은 독립 콩고가 존재한 기간 동안 대를 이어 통치했습니다. 그는 재위 중에 인접한 로앙고 왕국과 주변에 널려 있는 약소국들을 정복했고, 마니콩고 음보카니는 콩고의 통치권을 친족에게 하사하는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중앙화를 통해 지방은 영향력을 잃었고 지방의 권한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620년에는 한때 위풍당당하고 독립적이었던 음바타 왕국이 고작 '콩고 왕의 조부'로 불렸습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왕은 징수, 징용 등을 통해 왕좌를 보전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군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해안에 출몰하기 시작한 유럽인들과 노예, 구리와 상아를 거래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접 도시와 국가에 공물을 강요한 음반자 콩고는 1500년대의 아프리카에서 부유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반투족 전사들의 창 아래서 왕국은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유럽인들이 도착했을 당시 마니콩고는 여섯 개의 지방(음펨바, 음바타, 은선디, 응팡가, 음벰바 및 소요)과 4개의 속국(로앙고, 카콩고, 은고예 및 은동고)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왕이 제대로 된 훈련과 교육을 마친 300,000명의 남전사와 여전사를 일주일 안에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콩고의 인구는 수도 음반자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약 100,000명 즉, 전체 콩코인의 다섯 명 중 한 명이 이곳에 거주했습니다. 비록 도시 스프롤 현상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인구가 집중됨으로써 마니콩고는 필요할 때마다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식량, 자원과 인력을 비축할 수 있었으며 도시가 방대한 교역망의 중심지로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됐든 결국 중요한 것은 돈이었고, 상아와 광석 등의 자원을 수출하는 것 외에도 왕국의 부지런한 가문들은 구리 제품, 기타 금속품, 라피아 천과 도자기를 제작하는 사업을 감독했습니다.

1483년, 포르투갈의 탐험가인 디오고 캉은 콩고 왕국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미지의' 콩고 강으로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명의 부하를 '사절'로 남긴 후 몇몇 콩고의 귀족들을 포르투갈로 데려갔으며 포르투갈의 왕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여 카발레이루(기사)로 임명했습니다. 다른 유럽인들과는 달리 디오고 캉은 약속을 지켰고 1485년에 귀족과 함께 콩고로 돌아왔습니다. 당시에는 마니콩고 은징가 은쿠우가 기독교로 개정했을 무렵이었습니다. 1491년, 디오고 캉은 다시 한번 콩고로 돌아왔으며 이번에는 가톨릭 사제를 대동했습니다. 사제는 은징가와 그를 보좌하는 여러 귀족들에게 정식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마니콩고는 당시의 포르투갈 왕을 예우하기 위해 '주앙'이라는 이름을 취했고, 디오고 캉은 사제를 비롯한 여러 측근과 함께 콩고인들에게 집을 선사했으며 음반자에 포르투갈식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포르투갈인들은 마치 방문 판매원처럼 콩고인들의 문가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주앙 1세(은징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알폰소 1세(음벰바)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개종 신앙을 버린 것으로 알려진 선친과는 달리 알폰소 1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백성들에게 빛을 선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포르투갈인들과 교회 성직자들을 요직에 들인 그는 기독교와 토속 신앙을 융합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비록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알폰소 1세는 신하들의 의견과 상관없이 왕실 금고를 활용하여 학교와 성당을 건축하여 가능한 가톨릭 공공 시설을 마련했습니다. 특히 현지 언어를 구사하는 정식 성직자가 부족했던 관계로 여러 젊은 귀족을 유럽으로 보내어 종교 학문에 매진하도록 했습니다. 알폰소 1세의 아들 중 한 명은 7년에 걸쳐 성서를 공부한 후에 북단에 위치한 우티카의 주교 겸 콩고의 교황 대리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러한 모든 기독교의 자선 활동과 이타적 행위는 콩고에서 급증하는 노예 거래와 포르투갈인들의 탐욕으로 인해 지장을 받았습니다. 디오고 캉이 도착한 이래로 몇 십 년 동안 콩고 왕국의 변방 지역은 포르투갈인들의 노예 거래를 위한 주요 공급처가 되었습니다. 물론 유럽인들 이전에도 콩고에는 분명히 노예제가 존재했고 콩고의 노예 시장은 이미 번창하는 사업이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인들은 급격한 속도로 노예를 수송하기 시작했으며 대부분의 노예는 카리브 해나 브라질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수익성이 매우 높았고 왕국의 남부 및 동부 국경 지역을 따라 팽배했던 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을 처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긴 했지만 후대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백성 중 다수가 '불법'으로 노예화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그 이유는 전쟁 포로가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그 결과 왕국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왕국에서는 교역 행정부를 편성했고 왕립 위원회를 결성하여 백성들이 불법으로 수출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또한 합법적인 노예들은 외국으로 팔려나가기 전에 포르투갈의 신부들에 의해 세례를 받았으므로 적어도 그들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국의 종말을 초래한 것은 기독교나 노예제가 아닌 왕위 계승을 둘러싼 참혹한 분쟁이었습니다. 마니콩고의 사촌, 백부, 형제와 아들이 지방을 통치했고 음보카니가 봉신으로 천명된 만큼 왕이 사망할 때마다 사병을 보유한 각 통치자 간의 내전이 필연적으로 뒤따랐습니다. 그 결과 1568년에는 자가에서 수도를 점령했습니다. 의견은 분분하지만 자가인들은 동부에서 몰려온 침입군이거나 불만을 품은 봉신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니미 루케니(가톨릭명: 알바로 1세)는 도시를 재탈환한 후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무기와 지원을 얻어야 했으며 현재의 앙골라인 루안다 지역을 포르투갈 왕실에 식민지로 바쳤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었으며 포르투갈인들은 곧 콩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크윌루 왕조를 세운 알바로와 그의 아들인 알바로 2세는 밀려드는 진보의 물결을 목격했으며 이에 따라 왕국을 '서구화'하고자 했습니다. 왕국을 유럽인들의 기호에 맞게 변화시키려 했든 아니면 그저 필연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함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러한 대부분의 노력은 표면적인 부분에 불과했습니다. 알바로는 유럽식 직위(음웨네 은선디가 '은선디의 공작'이 되는 형식)를 도입했고 그의 아들은 수도의 이름을 상살바도르로 개명했습니다. 1596년, 콩고의 사절단은 콩고와 앙골라를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교구의 중심지로 도시를 인정해 달라며 교황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왕은 새로운 지역에 대한 주교 임명 권한을 자신에게 달라고 교황을 설득하고 적절한 '기부금'을 헌납하여 알바로 2세의 허를 찔렀습니다.

앙골라와 콩고의 사이가 틀어졌고 1622년에 앙골라의 총독이 잠깐 콩고 남부를 침공하면서 둘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왕국 내에 파벌주의가 판을 치면서 정세가 더욱 위축되었고 일부 지역의 '소군주'들은 포르투갈인들과 노예 계약을 비롯한 군사 및 무역 협정을 독단적으로 체결했습니다. 20년 후에는 마니콩고 엥캉가 루케니(가르시아 2세)가 앙골라 일부를 점령한 네덜란드와 손을 잡고 포르투갈에 대항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1648년에 '전략적 철수'를 감행했고 마니콩고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음부윌라의 소유권을 두고 일어난 콩고와 포르투갈 간의 국경 분쟁은 1665년 10월의 음부윌라 전쟁(당시 역사를 기록한 역사학자에 따라 암불리아 또는 울랑가 전쟁이라고도 불림)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음브윌라는 그렇게 대단한 영토는 아니었지만 양 진영 모두 전쟁을 위한 구실 따위는 필요 없었습니다.

마니콩고의 병력은 포르투갈이 가진 머스킷총과 소형 대포의 위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현지 주민 가운데서 발생한 사상자만 5,000명이 넘었고 이 중에는 마니콩고 왕도 포함되었습니다. 전투가 종료된 후에는 왕가에서 파생된 두 분파인 킴판자와 킨라사 파벌에서 왕관을 차지하기 위한 무력 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런 결과 없이 다음 세기까지 장기화된 내전으로 인해 전원 지역은 황폐화되었고 포로로 사로잡힌 수천 명의 콩고인들이 노예로 팔려 나갔습니다. 수도 자체는 여러 차례에 걸쳐 약탈당했고 1696년에는 도시 대부분이 버려졌습니다. 결국 키반구의 페드로 4세는 몇 남지 않은 귀족들 사이에서 왕위를 차례대로 계승하도록 하는 협약을 마련했고, 덕분에 어느 정도의 평화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1705년, 방치 상태였던 수도 음반자에는 포르투갈인이 지원하는 현지의 기독교 예언자인 베아트릭 킴파 비타와 그의 추종자들로 이루어진 안토니아회의 일원들이 다시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성 안토니아의 이름을 따 온 안토니아회의 목표는 신의 직접적인 가호를 받은 새로운 신성 기독교의 콩고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목표는 이상으로만 끝났습니다. 1696년부터 1718년까지 집권한 페드로 4세는 나중에 음반자를 점령하고 재판에서 베아트릭을 이교도로 몰아 처형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1709년에 수도를 재점령하고 콩고를 '독립' 왕국으로 되돌렸습니다.

왕위 순환제 덕분에 나름의 평화가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왕조 간의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제외한다면 18세기와 19세기의 정세는 매우 순탄했습니다. 콩고의 예술가들은 그리스도를 흑인으로 묘사한 십자가상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관념은 최근에 일부 회의론이 도입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국가는 종교적 분위기가 너무도 팽배하여 상살바도르의 성당 폐허를 천사들이 하룻밤 사이에 재건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836년, 영국의 완고한 압력 속에서 포르투갈은 노예 거래를 폐지해야 했습니다.

결국 콩고 왕국에 종말을 가져온 것은 왕조 간의 또 다른 분쟁이었습니다. 1856년에 엔리케 2세가 사망하자 같은 킨라사 가문에서 파생된 두 파벌이 왕권을 두고 경합했습니다. 비록 포르투갈 군사의 힘을 빌려 페드로 레로가 승리했지만, 모든 악마와의 계약에는 대가가 수반되기 마련입니다. 페드로 5세는 1857년에 포르투갈에 대한 예속 조약에 서명했고 이제 포르투갈 왕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했습니다. 이듬해 포르투갈은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상살바도르에 요새를 건설하여 주둔군이 머물게 했습니다. 이후로 콩고는 계속 다른 국가의 지배를 받다가 1960년에 콩고 공화국이 세워지며 독립 국가가 되었습니다.
PortraitSquare
icon_civilization_kongo

특성

지도자
icon_leader_mvemba
음벰바 아 은징가
icon_leader_default
은징가 음반데
특수 유닛
icon_unit_kongo_shield_bearer
은가오 음베바
특수 인프라
icon_district_mbanza
음반자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아프리카
크기
12만 9,400제곱킬로미터(최대)
인구
약 50만 9,000명(서기 1650년 기준)
수도
음반자 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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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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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벰바 아 은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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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징가 음반데
특수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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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가오 음베바
특수 인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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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자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아프리카
크기
12만 9,400제곱킬로미터(최대)
인구
약 50만 9,000명(서기 1650년 기준)
수도
음반자 콩고
특유 능력

엔키시

각 성유물, 영웅 성유물, 유물 및 조각상 걸작 예술품에서 일반적으로 받는 문화 외에 추가로 식량 +2, 생산력 +2, 신앙 +1, 금 +4가 제공됩니다.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음악가 및 위대한 상인 점수를 +50% 더 받습니다. 궁전은 걸작 슬롯 5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
전설에 따르면 콩고라 불리는 왕국이 세워진 이면에는 크윌루 밸리 주변의 음펨바 카시 왕국이 겪은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음펨바 카시 왕국은 매우 규모가 컸지만 그리 부유한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국력이 약한 음펨바 카시가 특정 시점에 음바타라는 군국주의적인 인접국과 손을 잡았고, 마침내 남쪽의 고원에 위치한 음웨네 카붕가 왕국을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니미 루케니'라는 전사는 이 영토를 모두 합병하는 동시에 음반자 콩고라는 산악 마을을 수도로 정했습니다. 이로써 1390년에 콩고 왕국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콩고는 전성기 시절에 아프리카의 중부 대서양 해안에서 쾅고 강까지, 북부의 푸앵트 느와르에서 남부의 로제 강으로 이어지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초대 마니콩고('왕')는 물론 니미였습니다. 니미가 사망하자 그의 형제인 음보카니 음빙가가 왕좌에 올랐고, 두 명의 왕비와 아홉 명의 자식을 거느린 그의 왕족은 독립 콩고가 존재한 기간 동안 대를 이어 통치했습니다. 그는 재위 중에 인접한 로앙고 왕국과 주변에 널려 있는 약소국들을 정복했고, 마니콩고 음보카니는 콩고의 통치권을 친족에게 하사하는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중앙화를 통해 지방은 영향력을 잃었고 지방의 권한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620년에는 한때 위풍당당하고 독립적이었던 음바타 왕국이 고작 '콩고 왕의 조부'로 불렸습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왕은 징수, 징용 등을 통해 왕좌를 보전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군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해안에 출몰하기 시작한 유럽인들과 노예, 구리와 상아를 거래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접 도시와 국가에 공물을 강요한 음반자 콩고는 1500년대의 아프리카에서 부유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반투족 전사들의 창 아래서 왕국은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유럽인들이 도착했을 당시 마니콩고는 여섯 개의 지방(음펨바, 음바타, 은선디, 응팡가, 음벰바 및 소요)과 4개의 속국(로앙고, 카콩고, 은고예 및 은동고)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왕이 제대로 된 훈련과 교육을 마친 300,000명의 남전사와 여전사를 일주일 안에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콩고의 인구는 수도 음반자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약 100,000명 즉, 전체 콩코인의 다섯 명 중 한 명이 이곳에 거주했습니다. 비록 도시 스프롤 현상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인구가 집중됨으로써 마니콩고는 필요할 때마다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식량, 자원과 인력을 비축할 수 있었으며 도시가 방대한 교역망의 중심지로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됐든 결국 중요한 것은 돈이었고, 상아와 광석 등의 자원을 수출하는 것 외에도 왕국의 부지런한 가문들은 구리 제품, 기타 금속품, 라피아 천과 도자기를 제작하는 사업을 감독했습니다.

1483년, 포르투갈의 탐험가인 디오고 캉은 콩고 왕국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미지의' 콩고 강으로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명의 부하를 '사절'로 남긴 후 몇몇 콩고의 귀족들을 포르투갈로 데려갔으며 포르투갈의 왕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여 카발레이루(기사)로 임명했습니다. 다른 유럽인들과는 달리 디오고 캉은 약속을 지켰고 1485년에 귀족과 함께 콩고로 돌아왔습니다. 당시에는 마니콩고 은징가 은쿠우가 기독교로 개정했을 무렵이었습니다. 1491년, 디오고 캉은 다시 한번 콩고로 돌아왔으며 이번에는 가톨릭 사제를 대동했습니다. 사제는 은징가와 그를 보좌하는 여러 귀족들에게 정식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마니콩고는 당시의 포르투갈 왕을 예우하기 위해 '주앙'이라는 이름을 취했고, 디오고 캉은 사제를 비롯한 여러 측근과 함께 콩고인들에게 집을 선사했으며 음반자에 포르투갈식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포르투갈인들은 마치 방문 판매원처럼 콩고인들의 문가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주앙 1세(은징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알폰소 1세(음벰바)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개종 신앙을 버린 것으로 알려진 선친과는 달리 알폰소 1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백성들에게 빛을 선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포르투갈인들과 교회 성직자들을 요직에 들인 그는 기독교와 토속 신앙을 융합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비록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알폰소 1세는 신하들의 의견과 상관없이 왕실 금고를 활용하여 학교와 성당을 건축하여 가능한 가톨릭 공공 시설을 마련했습니다. 특히 현지 언어를 구사하는 정식 성직자가 부족했던 관계로 여러 젊은 귀족을 유럽으로 보내어 종교 학문에 매진하도록 했습니다. 알폰소 1세의 아들 중 한 명은 7년에 걸쳐 성서를 공부한 후에 북단에 위치한 우티카의 주교 겸 콩고의 교황 대리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러한 모든 기독교의 자선 활동과 이타적 행위는 콩고에서 급증하는 노예 거래와 포르투갈인들의 탐욕으로 인해 지장을 받았습니다. 디오고 캉이 도착한 이래로 몇 십 년 동안 콩고 왕국의 변방 지역은 포르투갈인들의 노예 거래를 위한 주요 공급처가 되었습니다. 물론 유럽인들 이전에도 콩고에는 분명히 노예제가 존재했고 콩고의 노예 시장은 이미 번창하는 사업이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인들은 급격한 속도로 노예를 수송하기 시작했으며 대부분의 노예는 카리브 해나 브라질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수익성이 매우 높았고 왕국의 남부 및 동부 국경 지역을 따라 팽배했던 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을 처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긴 했지만 후대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백성 중 다수가 '불법'으로 노예화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그 이유는 전쟁 포로가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그 결과 왕국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왕국에서는 교역 행정부를 편성했고 왕립 위원회를 결성하여 백성들이 불법으로 수출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또한 합법적인 노예들은 외국으로 팔려나가기 전에 포르투갈의 신부들에 의해 세례를 받았으므로 적어도 그들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국의 종말을 초래한 것은 기독교나 노예제가 아닌 왕위 계승을 둘러싼 참혹한 분쟁이었습니다. 마니콩고의 사촌, 백부, 형제와 아들이 지방을 통치했고 음보카니가 봉신으로 천명된 만큼 왕이 사망할 때마다 사병을 보유한 각 통치자 간의 내전이 필연적으로 뒤따랐습니다. 그 결과 1568년에는 자가에서 수도를 점령했습니다. 의견은 분분하지만 자가인들은 동부에서 몰려온 침입군이거나 불만을 품은 봉신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니미 루케니(가톨릭명: 알바로 1세)는 도시를 재탈환한 후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무기와 지원을 얻어야 했으며 현재의 앙골라인 루안다 지역을 포르투갈 왕실에 식민지로 바쳤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었으며 포르투갈인들은 곧 콩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크윌루 왕조를 세운 알바로와 그의 아들인 알바로 2세는 밀려드는 진보의 물결을 목격했으며 이에 따라 왕국을 '서구화'하고자 했습니다. 왕국을 유럽인들의 기호에 맞게 변화시키려 했든 아니면 그저 필연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함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러한 대부분의 노력은 표면적인 부분에 불과했습니다. 알바로는 유럽식 직위(음웨네 은선디가 '은선디의 공작'이 되는 형식)를 도입했고 그의 아들은 수도의 이름을 상살바도르로 개명했습니다. 1596년, 콩고의 사절단은 콩고와 앙골라를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교구의 중심지로 도시를 인정해 달라며 교황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왕은 새로운 지역에 대한 주교 임명 권한을 자신에게 달라고 교황을 설득하고 적절한 '기부금'을 헌납하여 알바로 2세의 허를 찔렀습니다.

앙골라와 콩고의 사이가 틀어졌고 1622년에 앙골라의 총독이 잠깐 콩고 남부를 침공하면서 둘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왕국 내에 파벌주의가 판을 치면서 정세가 더욱 위축되었고 일부 지역의 '소군주'들은 포르투갈인들과 노예 계약을 비롯한 군사 및 무역 협정을 독단적으로 체결했습니다. 20년 후에는 마니콩고 엥캉가 루케니(가르시아 2세)가 앙골라 일부를 점령한 네덜란드와 손을 잡고 포르투갈에 대항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1648년에 '전략적 철수'를 감행했고 마니콩고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음부윌라의 소유권을 두고 일어난 콩고와 포르투갈 간의 국경 분쟁은 1665년 10월의 음부윌라 전쟁(당시 역사를 기록한 역사학자에 따라 암불리아 또는 울랑가 전쟁이라고도 불림)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음브윌라는 그렇게 대단한 영토는 아니었지만 양 진영 모두 전쟁을 위한 구실 따위는 필요 없었습니다.

마니콩고의 병력은 포르투갈이 가진 머스킷총과 소형 대포의 위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현지 주민 가운데서 발생한 사상자만 5,000명이 넘었고 이 중에는 마니콩고 왕도 포함되었습니다. 전투가 종료된 후에는 왕가에서 파생된 두 분파인 킴판자와 킨라사 파벌에서 왕관을 차지하기 위한 무력 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런 결과 없이 다음 세기까지 장기화된 내전으로 인해 전원 지역은 황폐화되었고 포로로 사로잡힌 수천 명의 콩고인들이 노예로 팔려 나갔습니다. 수도 자체는 여러 차례에 걸쳐 약탈당했고 1696년에는 도시 대부분이 버려졌습니다. 결국 키반구의 페드로 4세는 몇 남지 않은 귀족들 사이에서 왕위를 차례대로 계승하도록 하는 협약을 마련했고, 덕분에 어느 정도의 평화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1705년, 방치 상태였던 수도 음반자에는 포르투갈인이 지원하는 현지의 기독교 예언자인 베아트릭 킴파 비타와 그의 추종자들로 이루어진 안토니아회의 일원들이 다시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성 안토니아의 이름을 따 온 안토니아회의 목표는 신의 직접적인 가호를 받은 새로운 신성 기독교의 콩고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목표는 이상으로만 끝났습니다. 1696년부터 1718년까지 집권한 페드로 4세는 나중에 음반자를 점령하고 재판에서 베아트릭을 이교도로 몰아 처형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1709년에 수도를 재점령하고 콩고를 '독립' 왕국으로 되돌렸습니다.

왕위 순환제 덕분에 나름의 평화가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왕조 간의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제외한다면 18세기와 19세기의 정세는 매우 순탄했습니다. 콩고의 예술가들은 그리스도를 흑인으로 묘사한 십자가상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관념은 최근에 일부 회의론이 도입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국가는 종교적 분위기가 너무도 팽배하여 상살바도르의 성당 폐허를 천사들이 하룻밤 사이에 재건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836년, 영국의 완고한 압력 속에서 포르투갈은 노예 거래를 폐지해야 했습니다.

결국 콩고 왕국에 종말을 가져온 것은 왕조 간의 또 다른 분쟁이었습니다. 1856년에 엔리케 2세가 사망하자 같은 킨라사 가문에서 파생된 두 파벌이 왕권을 두고 경합했습니다. 비록 포르투갈 군사의 힘을 빌려 페드로 레로가 승리했지만, 모든 악마와의 계약에는 대가가 수반되기 마련입니다. 페드로 5세는 1857년에 포르투갈에 대한 예속 조약에 서명했고 이제 포르투갈 왕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했습니다. 이듬해 포르투갈은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상살바도르에 요새를 건설하여 주둔군이 머물게 했습니다. 이후로 콩고는 계속 다른 국가의 지배를 받다가 1960년에 콩고 공화국이 세워지며 독립 국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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