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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페르시아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한국

호주

지도자

로마
특유 능력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플레이어가 짓거나 점령하는 모든 도시는 교역소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수도와 교역로 범위에 있는 경우 도로도 함께 생성됩니다. 플레이어의 교역로는 자신의 도시의 교역소를 지나갈 때마다 금 +1을 획득합니다.

역사적 배경
약 기원전 750년에 로물루스와 레무스, 트로이의 난민들 혹은 물이 깨끗한 아늑한 고원과 우연히 마주친 잡다한 추방자 집단 중에서 누가 로마를 건국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수백 년 동안은 옛 속담처럼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귀족들은 중요한 사안에 대한 평민들의 관심을 빵과 서커스로 돌릴 수 있다는 불변의 원칙을 깨닫게 되었고 공화국은 독재 정부를 거쳐 제국으로 넘어갔습니다. 로마는 서양 문명의 초석을 마련했으며 좋고 그름과 상관없이 오늘날까지도 그 전통이 살아있습니다.

로마인들은 마르스 신과 인간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도시를 세웠다고 믿고 있습니다. 두 형제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지만 암늑대가 형제를 구출한 후 젖을 먹였다고 합니다. 두 형제는 성인이 되는 즉시 새로운 도시를 건립했고 도시의 통치권을 놓고 대립했습니다. 혹자들은 성벽의 높이 때문에 다툼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종국에는 로물루스가 승리했습니다. 그는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유기, 암늑대와 살인으로 이어지는 설화는 로마의 역사에 대한 상당 부분을 설명해 줄 수도 있습니다.

로마의 전략적인 입지는 항상 인접국들의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라틴족은 200년에 걸쳐 에트루리아와 사비니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으며 결국에는 두 민족을 예속시키고 이들의 문화, 종교, 기술, 부와 영토를 로마로 가져와 제국 건설을 위한 유용한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로마 설화에 따르면 고대 로마의 마지막 왕은 잔혹한 폭군이었다고 합니다. 사악한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왕은 그의 아들이 고결한 귀족 부인을 강간한 일을 계기로 시민들에 의해 추방되었습니다. 근대 역사학자들은 실제로는 이렇게 극적인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지루한 학자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이 로마를 점령한 후 로마의 왕을 추방했지만 자체적으로 군주를 세우기 전에 외부적인 사건으로 도시를 떠났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왕이 없는 편이 좋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마인들은 타르퀴니우스를 다시 권좌에 올리는 대신 그리스의 민주주의 이론에 기반한 공화정 '형식'의 정부를 구현했습니다. 사실 그리스인들도 딱히 민주주의적 성향이 강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정치 구조는 복잡했지만 두 명의 집정관이 로마를 통치하는 형식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집정관은 도시의 행정 지도자 겸 군부 사령관 역할을 했으며 매년 로마의 군대인 '백인 대민회'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또한 심각한 위험에 당면했을 때 명령의 통일성을 위해 온전한 권한을 가진 집정관 중 한 명을 '독재관'으로 임명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정부의 두 번째 권력 집단은 원로원이었습니다. 원로원은 주요 가문 출신의 '도덕적인' 300여 명의 남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원로원의 역할은 고문단으로 엄격하게 제한되었지만 원로원의 구성원들이 모두 막강한 재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고 이들의 '조언'은 대부분의 경우 받아들여졌습니다. 로마의 공화정은 좋고 나쁨을 떠나 이후에 생겨난 대부분의 공화정의 모델로 활용되었습니다.

힘이 약한 다른 왕국들을 상대로 영토를 확장하느라 로마 공화국은 끊임없이 인접국들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취한 부의 대부분은 기원전 390년에 갈리아 부족이 로마 군단을 꺾고 도시를 약탈했을 때 사라져 버렸습니다. 무지한 야만인들이 이 '영원한 도시'의 길거리를 활보한 것은 이 때가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를 로마에서 복구하는 데 거의 5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200년대 중반에는 로마가 이탈리아 중부의 패권국으로 부상했으며 라틴 식민지는 북부와 남부의 먼 지역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게다가 나날이 규모를 더해가는 공화국의 영토를 잇는 로마의 탁월한 도로망이 건설되고 있었고 로마는 최초의 해군을 구축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완성된 해군은 바로 지중해 남단에 배치되었습니다.

영토를 늘리고 명성을 높여가던 로마는 패권을 노리던 다른 지역의 왕국들과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 중에는 카르타고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튀니지의 북아프리카 해안에 위치한 카르타고는 한때 페니키아의 식민지였습니다. 당시 카르타고는 이집트 서부의 북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스페인 및 프랑스와 대부분의 시칠리아는 물론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까지 아우르는 강대한 해상 제국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와 카르타고는 지중해 서부의 패권을 두고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146년)에서 맞붙었습니다. 그 결과 한니발의 재략, 카르타고 선원들의 항해술과 정치인들의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와 그 제국은 곧 제국이 될 운명을 맞이할 로마라는 구렁텅이 안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비록 로마는 지중해 전역에서 전쟁을 이어갔지만 기원전 1세기에는 외국에 있던 수천 명의 군인들이 민간인으로 복귀했습니다. 전직 군인들이 맡을 수 있는 일거리는 많지 않았고 특히 외국에서 데려온 노예들로 넘쳐났던 로마의 경우에는 더욱 상황이 심했습니다. 집정관으로 선출되고 싶은 로마의 정치인들은 이러한 전직 군인들을 달래야 했고 로마 정치는 갈수록 포퓰리즘에 의존하기 시작했으며 정치적 내분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확실한 사실은 불만 많은 군인들의 충성을 얻어야만 로마의 지배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원전 62년에는 세 남자가 권력을 삼분하는 데 동의했고, 이로써 그나이우스 폼페이누스, 원로 마르쿠스 크라수스와 부유한 가문 출신의 무명 사령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이루어진 제1차 삼두 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세 남자 모두 협력할 수 있는 능력과 식인 상어 떼처럼 권력을 공유하고자 하는 의향이 있었지만 크라수스가 전쟁터에서 사망하는 즉시 카이사르와 폼페이누스는 서로의 목을 겨누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카이사르가 그의 충성스런 군단과 함께 로마로 진군하자 폼페이누스와 원로원은 도시를 버리고 도주했습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아무런 저항 없이 로마에 입성했습니다. 비록 로마의 공화정 형태는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 율리우스는 독재자로 군림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모든 원로에 대한 임명권을 부여했고 헌법을 수정하여 자신이 제출한 후보자의 이름과 법안에만 원로원이 투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기원전 44년, 그는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분개한 일부 원로원들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외국의 마녀인 클레오파트라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로마인들이 분개했다는 점도 카이사르에게는 악재로 작용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사망하자 그의 보좌관이었던 마르크 안토니우스는 마르쿠스 레피두스와 카이사르의 조카인 가이우스 옥타비안과 동맹을 맺고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화주의자들을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과 클레오파트라를 거두었고, 이들은 안토니우스의 도움을 얻어 이집트 제국을 재건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제2차 삼두 정치에 분열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의 아들과 안토니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존함을 얻은 옥타비안은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독재자가 되었고 로마를 위협하던 위험은 마침내 사라졌습니다. 로마공화국은 무기력했던 반면 로마 제국은 새롭게 시작되었고 머지 않아 전 세계가 로마의 '힘과 영광 앞에서 벌벌 떨게 되었습니다'.

이어진 400년 동안 로마는 독재자의 통치를 받았고 독재자들은 권력의 근원을 기억하기 위해 '카이사르'라는 직위를 취했습니다. 유능했거나(티베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하드리아누스), 총명했거나(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누스), 평범했거나(오토, 페르티낙스, 발비누스 외 다수) 악랄하기 그지없던(칼리굴라, 네로, 코모두스 외 다수) 수많은 황제들이 로마를 다스렸습니다. 최장 48년을 집권한 테오도시우스 2세처럼 몇몇 황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재위한 반면 어떤 황제들은 즉위 후 불과 몇 개월, 심지어는 며칠 만에 근위병의 독 묻은 검에 베여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광란의 역사에 흥미를 더한 것은 봉기, 반란, 저항, 전쟁, 그리고 국경을 두고 지속된 야만인들과의 분쟁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혼란 속에서도 로마인들은 문명이 발상된 이후로 가장 위대한 여러 불후의 명작들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스 문학을 모방하던 라틴 예술과 문학은 마침내 고유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던 풍자가 로마에 의해 쇄신되었고 로마인들이 탄생시킨 라틴 조각상, 프레스코화와 풍경화 등의 장르가 과거의 모든 미술품을 초월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아치, 아치 천장과 돔 지붕 등으로 건축에 기여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수로, 다리와 건물들이 오늘날까지도 건재하게 존재합니다. 한편 부유한 로마인들은 세계 최초의 관광객이 되어 이집트,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여행하며 경이로운 기념물과 유적지를 둘러보며 로마 문화의 우월성을 즐겼습니다. 로마의 시민들은 거대한 콜로세움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스포츠와 원형 경기장에서의 전차 경주를 즐겼으며, 주기적으로 아피아 가도를 따라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트라야누스의 통치 하에서 부의 정점을 찍은 로마 제국은 스코틀랜드의 저지대에서 무어 산악, 유프라테스 및 라인 강까지 진출했습니다. 로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고 주민과 시민 등을 포함한 전체 인구 수가 약 2백 만에 달했습니다. 로마의 영토로 아프리카, 갈리아, 스칸디나비아와 머나먼 인도의 교역품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로마인들은 표준화된 중량, 측정 방식, 그리고 자신들의 기수법에 딱 맞는 로마식 주판을 사용하여 이러한 부를 관리했습니다. 실제로 제국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조직적 성향이 강한 로마인들은 거의 모든 요소를 표준화했습니다.

이때가 로마의 진정한 황금기였습니다.

하지만 기원후 3세기부터 국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열악했던 소통 기술로 인해 행정 운영이 점점 어려워졌고 위기 시의 대처 능력 또한 거의 전무했습니다. 서기 285년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광활한 왕국을 서부와 동부로 반분하여, 동로마에 대한 행정은 비잔티움에서 로마의 황제를 대리하는 '두 번째' 황제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다양한 신앙을 허용했던 로마에 엄격한 기독교가 정착되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였고 이교에 대한 편협성으로 인해 사회 구조의 균열이 더욱 커졌고, 야만인들은 기술적으로 진보하여 로마의 변방 영토를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로마인들은 수로 때문에 납 중독으로 고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 됐든, 서로마 제국의 말년은 무능한 통치자, 왕위 찬탈과 로마 영토 심장부에 대한 야만인들의 급습으로 설명됩니다. 410년, 로마는 서고트족 왕인 알라리크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반달족은 아프리카를 점령했고 여러 지역의 로마 총독들은 제국에서 빠져나와 자신들이 꿈에 그리던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 용병 사령관이었던 게르만족 출신의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없애고 제국 휘장을 비잔티움으로 보낸 다음 자신을 이탈리아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이렇게 '로마의 빛'은 소멸되었지만 그 그림자는 여전히 유럽과 주변 지역을 뒤덮고 있습니다.
PortraitSquare
icon_civilization_rome

특성

지도자
icon_leader_trajan
트라야누스
icon_leader_default
율리우스 카이사르
특수 유닛
icon_unit_roman_legion
군단병
특수 인프라
icon_district_bath
목욕탕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유럽(및 소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및 기타)
크기
약 650만 제곱킬로미터(트라야누스 통치 당시)
인구
약 8,800만명(전성기 기준)
수도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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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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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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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특수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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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병
특수 인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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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유럽(및 소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및 기타)
크기
약 650만 제곱킬로미터(트라야누스 통치 당시)
인구
약 8,800만명(전성기 기준)
수도
로마
특유 능력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플레이어가 짓거나 점령하는 모든 도시는 교역소를 가지고 시작합니다. 수도와 교역로 범위에 있는 경우 도로도 함께 생성됩니다. 플레이어의 교역로는 자신의 도시의 교역소를 지나갈 때마다 금 +1을 획득합니다.

역사적 배경
약 기원전 750년에 로물루스와 레무스, 트로이의 난민들 혹은 물이 깨끗한 아늑한 고원과 우연히 마주친 잡다한 추방자 집단 중에서 누가 로마를 건국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수백 년 동안은 옛 속담처럼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귀족들은 중요한 사안에 대한 평민들의 관심을 빵과 서커스로 돌릴 수 있다는 불변의 원칙을 깨닫게 되었고 공화국은 독재 정부를 거쳐 제국으로 넘어갔습니다. 로마는 서양 문명의 초석을 마련했으며 좋고 그름과 상관없이 오늘날까지도 그 전통이 살아있습니다.

로마인들은 마르스 신과 인간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도시를 세웠다고 믿고 있습니다. 두 형제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지만 암늑대가 형제를 구출한 후 젖을 먹였다고 합니다. 두 형제는 성인이 되는 즉시 새로운 도시를 건립했고 도시의 통치권을 놓고 대립했습니다. 혹자들은 성벽의 높이 때문에 다툼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종국에는 로물루스가 승리했습니다. 그는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유기, 암늑대와 살인으로 이어지는 설화는 로마의 역사에 대한 상당 부분을 설명해 줄 수도 있습니다.

로마의 전략적인 입지는 항상 인접국들의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라틴족은 200년에 걸쳐 에트루리아와 사비니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으며 결국에는 두 민족을 예속시키고 이들의 문화, 종교, 기술, 부와 영토를 로마로 가져와 제국 건설을 위한 유용한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로마 설화에 따르면 고대 로마의 마지막 왕은 잔혹한 폭군이었다고 합니다. 사악한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왕은 그의 아들이 고결한 귀족 부인을 강간한 일을 계기로 시민들에 의해 추방되었습니다. 근대 역사학자들은 실제로는 이렇게 극적인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지루한 학자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이 로마를 점령한 후 로마의 왕을 추방했지만 자체적으로 군주를 세우기 전에 외부적인 사건으로 도시를 떠났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왕이 없는 편이 좋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마인들은 타르퀴니우스를 다시 권좌에 올리는 대신 그리스의 민주주의 이론에 기반한 공화정 '형식'의 정부를 구현했습니다. 사실 그리스인들도 딱히 민주주의적 성향이 강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정치 구조는 복잡했지만 두 명의 집정관이 로마를 통치하는 형식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집정관은 도시의 행정 지도자 겸 군부 사령관 역할을 했으며 매년 로마의 군대인 '백인 대민회'에 의해 선출되었습니다. 또한 심각한 위험에 당면했을 때 명령의 통일성을 위해 온전한 권한을 가진 집정관 중 한 명을 '독재관'으로 임명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정부의 두 번째 권력 집단은 원로원이었습니다. 원로원은 주요 가문 출신의 '도덕적인' 300여 명의 남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원로원의 역할은 고문단으로 엄격하게 제한되었지만 원로원의 구성원들이 모두 막강한 재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고 이들의 '조언'은 대부분의 경우 받아들여졌습니다. 로마의 공화정은 좋고 나쁨을 떠나 이후에 생겨난 대부분의 공화정의 모델로 활용되었습니다.

힘이 약한 다른 왕국들을 상대로 영토를 확장하느라 로마 공화국은 끊임없이 인접국들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취한 부의 대부분은 기원전 390년에 갈리아 부족이 로마 군단을 꺾고 도시를 약탈했을 때 사라져 버렸습니다. 무지한 야만인들이 이 '영원한 도시'의 길거리를 활보한 것은 이 때가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를 로마에서 복구하는 데 거의 5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200년대 중반에는 로마가 이탈리아 중부의 패권국으로 부상했으며 라틴 식민지는 북부와 남부의 먼 지역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게다가 나날이 규모를 더해가는 공화국의 영토를 잇는 로마의 탁월한 도로망이 건설되고 있었고 로마는 최초의 해군을 구축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완성된 해군은 바로 지중해 남단에 배치되었습니다.

영토를 늘리고 명성을 높여가던 로마는 패권을 노리던 다른 지역의 왕국들과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 중에는 카르타고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튀니지의 북아프리카 해안에 위치한 카르타고는 한때 페니키아의 식민지였습니다. 당시 카르타고는 이집트 서부의 북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스페인 및 프랑스와 대부분의 시칠리아는 물론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까지 아우르는 강대한 해상 제국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와 카르타고는 지중해 서부의 패권을 두고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146년)에서 맞붙었습니다. 그 결과 한니발의 재략, 카르타고 선원들의 항해술과 정치인들의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와 그 제국은 곧 제국이 될 운명을 맞이할 로마라는 구렁텅이 안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비록 로마는 지중해 전역에서 전쟁을 이어갔지만 기원전 1세기에는 외국에 있던 수천 명의 군인들이 민간인으로 복귀했습니다. 전직 군인들이 맡을 수 있는 일거리는 많지 않았고 특히 외국에서 데려온 노예들로 넘쳐났던 로마의 경우에는 더욱 상황이 심했습니다. 집정관으로 선출되고 싶은 로마의 정치인들은 이러한 전직 군인들을 달래야 했고 로마 정치는 갈수록 포퓰리즘에 의존하기 시작했으며 정치적 내분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확실한 사실은 불만 많은 군인들의 충성을 얻어야만 로마의 지배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원전 62년에는 세 남자가 권력을 삼분하는 데 동의했고, 이로써 그나이우스 폼페이누스, 원로 마르쿠스 크라수스와 부유한 가문 출신의 무명 사령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이루어진 제1차 삼두 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세 남자 모두 협력할 수 있는 능력과 식인 상어 떼처럼 권력을 공유하고자 하는 의향이 있었지만 크라수스가 전쟁터에서 사망하는 즉시 카이사르와 폼페이누스는 서로의 목을 겨누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카이사르가 그의 충성스런 군단과 함께 로마로 진군하자 폼페이누스와 원로원은 도시를 버리고 도주했습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아무런 저항 없이 로마에 입성했습니다. 비록 로마의 공화정 형태는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 율리우스는 독재자로 군림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모든 원로에 대한 임명권을 부여했고 헌법을 수정하여 자신이 제출한 후보자의 이름과 법안에만 원로원이 투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기원전 44년, 그는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분개한 일부 원로원들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외국의 마녀인 클레오파트라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로마인들이 분개했다는 점도 카이사르에게는 악재로 작용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사망하자 그의 보좌관이었던 마르크 안토니우스는 마르쿠스 레피두스와 카이사르의 조카인 가이우스 옥타비안과 동맹을 맺고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화주의자들을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과 클레오파트라를 거두었고, 이들은 안토니우스의 도움을 얻어 이집트 제국을 재건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제2차 삼두 정치에 분열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의 아들과 안토니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존함을 얻은 옥타비안은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독재자가 되었고 로마를 위협하던 위험은 마침내 사라졌습니다. 로마공화국은 무기력했던 반면 로마 제국은 새롭게 시작되었고 머지 않아 전 세계가 로마의 '힘과 영광 앞에서 벌벌 떨게 되었습니다'.

이어진 400년 동안 로마는 독재자의 통치를 받았고 독재자들은 권력의 근원을 기억하기 위해 '카이사르'라는 직위를 취했습니다. 유능했거나(티베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하드리아누스), 총명했거나(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누스), 평범했거나(오토, 페르티낙스, 발비누스 외 다수) 악랄하기 그지없던(칼리굴라, 네로, 코모두스 외 다수) 수많은 황제들이 로마를 다스렸습니다. 최장 48년을 집권한 테오도시우스 2세처럼 몇몇 황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재위한 반면 어떤 황제들은 즉위 후 불과 몇 개월, 심지어는 며칠 만에 근위병의 독 묻은 검에 베여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광란의 역사에 흥미를 더한 것은 봉기, 반란, 저항, 전쟁, 그리고 국경을 두고 지속된 야만인들과의 분쟁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혼란 속에서도 로마인들은 문명이 발상된 이후로 가장 위대한 여러 불후의 명작들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리스 문학을 모방하던 라틴 예술과 문학은 마침내 고유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던 풍자가 로마에 의해 쇄신되었고 로마인들이 탄생시킨 라틴 조각상, 프레스코화와 풍경화 등의 장르가 과거의 모든 미술품을 초월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아치, 아치 천장과 돔 지붕 등으로 건축에 기여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수로, 다리와 건물들이 오늘날까지도 건재하게 존재합니다. 한편 부유한 로마인들은 세계 최초의 관광객이 되어 이집트,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여행하며 경이로운 기념물과 유적지를 둘러보며 로마 문화의 우월성을 즐겼습니다. 로마의 시민들은 거대한 콜로세움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스포츠와 원형 경기장에서의 전차 경주를 즐겼으며, 주기적으로 아피아 가도를 따라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트라야누스의 통치 하에서 부의 정점을 찍은 로마 제국은 스코틀랜드의 저지대에서 무어 산악, 유프라테스 및 라인 강까지 진출했습니다. 로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고 주민과 시민 등을 포함한 전체 인구 수가 약 2백 만에 달했습니다. 로마의 영토로 아프리카, 갈리아, 스칸디나비아와 머나먼 인도의 교역품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로마인들은 표준화된 중량, 측정 방식, 그리고 자신들의 기수법에 딱 맞는 로마식 주판을 사용하여 이러한 부를 관리했습니다. 실제로 제국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조직적 성향이 강한 로마인들은 거의 모든 요소를 표준화했습니다.

이때가 로마의 진정한 황금기였습니다.

하지만 기원후 3세기부터 국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열악했던 소통 기술로 인해 행정 운영이 점점 어려워졌고 위기 시의 대처 능력 또한 거의 전무했습니다. 서기 285년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광활한 왕국을 서부와 동부로 반분하여, 동로마에 대한 행정은 비잔티움에서 로마의 황제를 대리하는 '두 번째' 황제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다양한 신앙을 허용했던 로마에 엄격한 기독교가 정착되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였고 이교에 대한 편협성으로 인해 사회 구조의 균열이 더욱 커졌고, 야만인들은 기술적으로 진보하여 로마의 변방 영토를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로마인들은 수로 때문에 납 중독으로 고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 됐든, 서로마 제국의 말년은 무능한 통치자, 왕위 찬탈과 로마 영토 심장부에 대한 야만인들의 급습으로 설명됩니다. 410년, 로마는 서고트족 왕인 알라리크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반달족은 아프리카를 점령했고 여러 지역의 로마 총독들은 제국에서 빠져나와 자신들이 꿈에 그리던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 용병 사령관이었던 게르만족 출신의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없애고 제국 휘장을 비잔티움으로 보낸 다음 자신을 이탈리아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이렇게 '로마의 빛'은 소멸되었지만 그 그림자는 여전히 유럽과 주변 지역을 뒤덮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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