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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순간

문명

소개

골

그란 콜롬비아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누비아

독일

러시아

로마

마야

마케도니아

마푸체

몽골

미국

바빌론

베트남

브라질

비잔틴

수메르

스코틀랜드

스키타이

스페인

아라비아

아즈텍

에티오피아

영국

이집트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조지아

줄루

중국

콩고

크리

크메르

페르시아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한국

호주

지도자

누비아
특유 능력

타-세티

원거리 유닛 생성 시 +30%의 생산력을 받습니다. 모든 원거리 유닛이 +50%의 전투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전략 자원 위에 있는 광산에서 생산력 +1을 제공합니다. 보너스 자원과 사치 자원 위에 있는 광산에서 금 +2를 제공합니다.

역사적 배경
아프리카 북부의 나일 강 변곡점을 따라 위치한 누비아는 홍해와 나일 삼각주 사이의 통로이자, 나일 강 원천에서부터 지중해 입구까지 이어졌을 수 있는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불행하게도 누비아 북부와 국경을 맞댄 이집트인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누비아와 이집트는 먼 땅에서부터 차례로 쳐들어온 침략자들이 양국의 경쟁 관계를 종식시킬 때까지 서로 경계하는 이웃 국가이자 정복자이자 속국의 관계를 수천 년간 주고받았습니다.

최초의 누비아 문명은 오늘날의 수단 지역에서 발생했습니다. 도시 국가인 케르마는 나일 강의 제3폭포 남쪽의 비옥한 분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나일 강 옆이라는 이상적인 위치는 케르마를 육로와 수로가 두루 통하는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어주었습니다. 흑단과 금 등 풍부한 광물의 발견과 채취도 케르마의 부상에 기여했습니다. 무역과 함께 찾아온 부는 무역 없이도 부를 얻고자 했던 이들의 잦은 습격을 불러왔습니다.

케르마는 도시와 도로를 강화하면서 나일 강을 따라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케르마의 동맹 마을, 요새와 교역소는 나일 강의 제1폭포부터 제5폭포까지의 거리와 동일한 약 1,287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졌습니다. 이 시기 케르마는 이집트만큼이나 거대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도시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케르마는 기원전 2천 년부터 급격하게 소멸했습니다. 케르마가 자체 문자를 보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케르마 왕국에 대한 기록은 대다수가 이집트 문서에 남아있으며, 이중 대부분은 케르마와 이웃 국가 누비아의 갈등을 서술합니다.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케르마는 매우 중앙집중화된 국가였지만, 자체 문자 없이 그토록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웃 왕국들과 지속해서 갈등을 겪었음에도 이집트는 케르마 군대의 다수를 이루는 무시무시한 누비아 궁수들에게 빗대어 누비아를 '활의 민족'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이 전사들이 적들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던지, 이집트는 누비아 영토 내에 건설한 자국의 요새를 '활 방어소'라고 명명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동경과 선포의 뜻을 동시에 담았습니다.

케르마의 국력은 기원전 1580년 정점에 달했으나, 결국 힉소스와의 잘못된 동맹 관계로 인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동쪽 지방의 침략자인 힉소스는 기원전 17세기 중반에 이집트 일부를 정복했으나, 반란군과 테베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한 이집트 왕조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케르마는 이집트의 남은 왕국을 쪼개어 영원히 멸망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거의 성공하여, 이후 30년간 케르마는 이집트 영토 깊숙이 침략하여 종교 유물과 문화재 등을 약탈하기를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이집트는 결국 힉소스 정복자들을 떨치고 일어나 격퇴했습니다. 케르마의 침공은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이집트의 모든 문건에서는 케르마 침공과 힉소스의 '15대 왕조'에 대한 기록이 삭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케르마에 보관된 이집트의 보물까지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파라오들은 케르마에게 당했던 굴욕을 잊지 않았습니다. 투트모세 1세는 1세기 후 케르마를 정복하며 이러한 설욕을 갚았습니다. 그의 후계자 투트모세 3세는 누비아 영토로 더욱 깊이 침공해 들어가 결국 게벨 바르칼 산과 인근 도시 나파타까지 이집트의 남쪽 국경을 확대했습니다.

누비아는 약 4세기 동안 이집트의 통치하에 놓였습니다. 물론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누비아와 이집트의 문화는 융합되었습니다. 케르마는 잊혀갔으며 이 지역은 점차 이집트의 금맥이자 홍해로 향하는 길목, 그리고 이후 이집트의 적군이 두려워하는 이집트 궁수로 이름난 곳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10세기경 이집트가 지중해 국가들과의 관계에 치중하고 이후 이집트의 새 왕국이 몰락하자, 누비아는 내국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리비아의 왕자들이 몸집이 지나치게 불어난 이집트를 예속시키면서 쿠시 왕국이 점차 그 위세를 떨치게 되었습니다.

이때 운명의 장난처럼 쿠시 왕 피이가 리비아의 침입자들로부터 하부 이집트를 해방하라는 아문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문 신은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 3세가 게벨 바르칼에 신전을 지어 바친 이집트의 신입니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누비아 왕은 나일 삼각주를 정복하고 25대 왕조를 건립했으며, 이집트의 과거 영광을 재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이집트는 잠깐이나마 이전의 위세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피이와 그의 후계자들은 오랫동안 외세의 통치를 받으며 약화된 기념비, 사원, 공공 사업의 재건을 최우선으로 진행했습니다. 이집트 문화의 재건은 25대 왕조의 위대한 업적이었지만 계속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리 벌집이 작더라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는 교훈이 있지만, 25대 왕조의 여러 파라오는 근동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를 무시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근동 지역을 자국의 속국으로 여기던 강력한 신아시리아 제국과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신아시리아 군주에게 대항하는 가나안의 반란에 관한 피이의 지원 또한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신아시리아의 에사르하돈 왕은 기원전 674년 이집트를 침공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침략자들은 단 3년 만에 25대 왕조를 멸망시키며 누비아 제국의 야망을 종식시켰습니다.

하지만 누비아는 이집트에서 물러남으로써 궁극적으로 이득을 얻게 되었습니다. 신아시리아가 본보기를 보여주자 지중해 인근의 다른 국가들 역시 이집트를 속국으로 삼는 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누비아는 수도를 네파타에서 더 멀리 떨어진 메로에로 이전했는데, 그리스 상인들이 이곳을 통해 홍해로 나아가게 됨으로써 나일 강가의 무역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로 인해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 등 북부 여러 나라도 메로에로 이전한 쿠시 왕국까지 침공해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25년경 누비아는 로마 제국과 충돌했습니다. 로마 장군 페트로니우스는 누비아의 애꾸눈 칸다케(또는 '여왕') 아마니레나스와 반복적으로 부딪혔습니다. 로마 군대가 나파타를 정복하고 아문 신전을 파괴하자, 아마니레나스는 거세게 저항했으며 결국 페트로니우스는 정복보다 평화 협정을 맺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는 누비아를 옛 적대국이 아니라 우호적인 보호국으로 대함으로써 쿠시 왕국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평화 협정을 맺었습니다.

로마에 의한 파괴의 기간이 지나간 후, 기원전 1세기에 칸다케 아마니토레(그녀의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 자세히 언급)가 주도한 메로에 건설자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 재건의 시대는 1세기에 북동부의 베자 왕조가 메로에를 정복하며 끝을 맺었습니다. 누비아를 확장시키려는 베자 왕조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내국에서 일어난 반란과 악숨 왕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누비아는 영구적으로 정복당했습니다.
PortraitSquare
icon_civilization_unknown

특성

지도자
icon_leader_default
아마니토레
특수 유닛
icon_civilization_unknown
피타티 궁수
특수 인프라
icon_civilization_unknown
누비아 피라미드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아프리카
크기
최대 126만 제곱킬로미터(전성기 기준)
인구
약 115만명(전성기 기준)
수도
케르마, 네파타, 메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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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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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니토레
특수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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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티 궁수
특수 인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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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아 피라미드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아프리카
크기
최대 126만 제곱킬로미터(전성기 기준)
인구
약 115만명(전성기 기준)
수도
케르마, 네파타, 메로에
특유 능력

타-세티

원거리 유닛 생성 시 +30%의 생산력을 받습니다. 모든 원거리 유닛이 +50%의 전투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전략 자원 위에 있는 광산에서 생산력 +1을 제공합니다. 보너스 자원과 사치 자원 위에 있는 광산에서 금 +2를 제공합니다.

역사적 배경
아프리카 북부의 나일 강 변곡점을 따라 위치한 누비아는 홍해와 나일 삼각주 사이의 통로이자, 나일 강 원천에서부터 지중해 입구까지 이어졌을 수 있는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불행하게도 누비아 북부와 국경을 맞댄 이집트인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누비아와 이집트는 먼 땅에서부터 차례로 쳐들어온 침략자들이 양국의 경쟁 관계를 종식시킬 때까지 서로 경계하는 이웃 국가이자 정복자이자 속국의 관계를 수천 년간 주고받았습니다.

최초의 누비아 문명은 오늘날의 수단 지역에서 발생했습니다. 도시 국가인 케르마는 나일 강의 제3폭포 남쪽의 비옥한 분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나일 강 옆이라는 이상적인 위치는 케르마를 육로와 수로가 두루 통하는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어주었습니다. 흑단과 금 등 풍부한 광물의 발견과 채취도 케르마의 부상에 기여했습니다. 무역과 함께 찾아온 부는 무역 없이도 부를 얻고자 했던 이들의 잦은 습격을 불러왔습니다.

케르마는 도시와 도로를 강화하면서 나일 강을 따라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케르마의 동맹 마을, 요새와 교역소는 나일 강의 제1폭포부터 제5폭포까지의 거리와 동일한 약 1,287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졌습니다. 이 시기 케르마는 이집트만큼이나 거대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도시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케르마는 기원전 2천 년부터 급격하게 소멸했습니다. 케르마가 자체 문자를 보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케르마 왕국에 대한 기록은 대다수가 이집트 문서에 남아있으며, 이중 대부분은 케르마와 이웃 국가 누비아의 갈등을 서술합니다.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케르마는 매우 중앙집중화된 국가였지만, 자체 문자 없이 그토록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웃 왕국들과 지속해서 갈등을 겪었음에도 이집트는 케르마 군대의 다수를 이루는 무시무시한 누비아 궁수들에게 빗대어 누비아를 '활의 민족'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이 전사들이 적들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던지, 이집트는 누비아 영토 내에 건설한 자국의 요새를 '활 방어소'라고 명명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동경과 선포의 뜻을 동시에 담았습니다.

케르마의 국력은 기원전 1580년 정점에 달했으나, 결국 힉소스와의 잘못된 동맹 관계로 인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동쪽 지방의 침략자인 힉소스는 기원전 17세기 중반에 이집트 일부를 정복했으나, 반란군과 테베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한 이집트 왕조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케르마는 이집트의 남은 왕국을 쪼개어 영원히 멸망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거의 성공하여, 이후 30년간 케르마는 이집트 영토 깊숙이 침략하여 종교 유물과 문화재 등을 약탈하기를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이집트는 결국 힉소스 정복자들을 떨치고 일어나 격퇴했습니다. 케르마의 침공은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이집트의 모든 문건에서는 케르마 침공과 힉소스의 '15대 왕조'에 대한 기록이 삭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케르마에 보관된 이집트의 보물까지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파라오들은 케르마에게 당했던 굴욕을 잊지 않았습니다. 투트모세 1세는 1세기 후 케르마를 정복하며 이러한 설욕을 갚았습니다. 그의 후계자 투트모세 3세는 누비아 영토로 더욱 깊이 침공해 들어가 결국 게벨 바르칼 산과 인근 도시 나파타까지 이집트의 남쪽 국경을 확대했습니다.

누비아는 약 4세기 동안 이집트의 통치하에 놓였습니다. 물론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누비아와 이집트의 문화는 융합되었습니다. 케르마는 잊혀갔으며 이 지역은 점차 이집트의 금맥이자 홍해로 향하는 길목, 그리고 이후 이집트의 적군이 두려워하는 이집트 궁수로 이름난 곳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10세기경 이집트가 지중해 국가들과의 관계에 치중하고 이후 이집트의 새 왕국이 몰락하자, 누비아는 내국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리비아의 왕자들이 몸집이 지나치게 불어난 이집트를 예속시키면서 쿠시 왕국이 점차 그 위세를 떨치게 되었습니다.

이때 운명의 장난처럼 쿠시 왕 피이가 리비아의 침입자들로부터 하부 이집트를 해방하라는 아문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문 신은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세 3세가 게벨 바르칼에 신전을 지어 바친 이집트의 신입니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누비아 왕은 나일 삼각주를 정복하고 25대 왕조를 건립했으며, 이집트의 과거 영광을 재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이집트는 잠깐이나마 이전의 위세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피이와 그의 후계자들은 오랫동안 외세의 통치를 받으며 약화된 기념비, 사원, 공공 사업의 재건을 최우선으로 진행했습니다. 이집트 문화의 재건은 25대 왕조의 위대한 업적이었지만 계속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리 벌집이 작더라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는 교훈이 있지만, 25대 왕조의 여러 파라오는 근동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를 무시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근동 지역을 자국의 속국으로 여기던 강력한 신아시리아 제국과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신아시리아 군주에게 대항하는 가나안의 반란에 관한 피이의 지원 또한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신아시리아의 에사르하돈 왕은 기원전 674년 이집트를 침공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침략자들은 단 3년 만에 25대 왕조를 멸망시키며 누비아 제국의 야망을 종식시켰습니다.

하지만 누비아는 이집트에서 물러남으로써 궁극적으로 이득을 얻게 되었습니다. 신아시리아가 본보기를 보여주자 지중해 인근의 다른 국가들 역시 이집트를 속국으로 삼는 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누비아는 수도를 네파타에서 더 멀리 떨어진 메로에로 이전했는데, 그리스 상인들이 이곳을 통해 홍해로 나아가게 됨으로써 나일 강가의 무역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로 인해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 등 북부 여러 나라도 메로에로 이전한 쿠시 왕국까지 침공해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25년경 누비아는 로마 제국과 충돌했습니다. 로마 장군 페트로니우스는 누비아의 애꾸눈 칸다케(또는 '여왕') 아마니레나스와 반복적으로 부딪혔습니다. 로마 군대가 나파타를 정복하고 아문 신전을 파괴하자, 아마니레나스는 거세게 저항했으며 결국 페트로니우스는 정복보다 평화 협정을 맺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는 누비아를 옛 적대국이 아니라 우호적인 보호국으로 대함으로써 쿠시 왕국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평화 협정을 맺었습니다.

로마에 의한 파괴의 기간이 지나간 후, 기원전 1세기에 칸다케 아마니토레(그녀의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 자세히 언급)가 주도한 메로에 건설자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 재건의 시대는 1세기에 북동부의 베자 왕조가 메로에를 정복하며 끝을 맺었습니다. 누비아를 확장시키려는 베자 왕조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내국에서 일어난 반란과 악숨 왕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누비아는 영구적으로 정복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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