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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

크메르

페르시아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한국

호주

지도자

호주
특유 능력

남쪽의 땅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에 주거공간 +3을 제공합니다. 목장은 문화 폭탄을 촉발합니다. 캠퍼스, 상업 중심지, 성지 및 극장가가 멋진 매력도 타일에 위치한 경우 관련 생산량 +1, 놀라운 매력도에 위치한 경우 관련 생산량 +3을 제공합니다.

역사적 배경
애버리지니, 재소자, 극빈자, 탐광자와 부시레인저에 의해 차례로 정착된 '남쪽의 땅'은 4만5천 년 전 인도네시아 섬들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북쪽으로 건너온 사람들로부터 처음 정착되었습니다. 서기 1770년 제임스 쿡이 연안을 항해하며 대영제국의 영토로 주장하기 전까지, 구술과 영적인 문화가 풍부한 이곳의 수렵-채집민은 고립 속에서 번영했습니다. 네덜란드인 빌렘 얀스존과 영국인 윌리엄 댐피어가 더 일찌감치 호주를 발견했었지만, 외지고 위험한 땅에서 기회를 포착한 것은 쿡 선장이 처음이었습니다.

새로이 국가로 설립된 미국이 죄수 유형지로 향한 영국 죄수 수송선들을 거부하자 영국 정부당국은 계획을 바꿔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원치 않는 사회의 쓰레기들을 떠넘길 곳은 지구 반대편이 적격'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아서 필립 준장은 해군 호위선 2척, 수인 수송선 6척, 화물선 3척, 총 11척으로 구성된 최초의 수인 선단을 이끌고 영국에서 출발하여 뉴사우스웨일스로 향했습니다. 1788년 1월 보터니만에 도착한 필립 준장은 근방의 늪지대가 식민지로는 너무 유해하다고 판단하여 정착지를 더 북쪽의 천연 항만인 포트잭슨만으로 이전하였는데, 이곳이 오늘날 시드니하버로 더 잘 알려진 곳입니다.

아주 작은 변방 마을 시드니의 초기는 매우 험난했습니다. 18세기 말 전문 범죄자(잡범도 마찬가지)들은 하루아침에 능숙한 농부가 될 수 없었고, 보급선은 자주 오지 않았습니다. 1788년과 1792년 사이 추가로 3,546명의 남성 재소자와 766명의 여성 재소자가 수송되었는데, 대부분 병들거나 기력이 쇠퇴하여 중노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1790년 제2 수인 선단이 도착했을 때 수송 인원의 25% 이상이 항해 중에 사망했고, 제3 수인 선단 도착자들의 상태는 최초로 도착한 자들마저도 질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필립 총독은 주민들이 재소자인 것에 연연하지 않고 식민지의 성공과 개척민의 안녕을 진심으로 위했습니다. 그는 탐사대를 파견하여 더 좋은 경작지를 찾게 했고, 무역선을 환영했으며, 공중위생을 위한 조치를 촉진했습니다. 또한 과밀 거주를 해소하기 위해 위성 정착지들을 개척했으며, 현실과 동떨어진 영국발 명령들을 무시했습니다. 1792년 말 필립 총독이 영국으로 귀국했을 때에는 식민지가 마침내 안정화되어 자발적으로 이주하는 개척자들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 주민들은 초기에 시간을 초월한 마법의 왕국과 같은, 꿈의 시대에 살고 있던 원주민 애버리지니들을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18세기 말에는 300여 개의 씨족에 250여 개의 언어와 700여 개의 방언을 구사하는 100만 명 정도의 원주민이 있었습니다. 각 씨족은 사막, 열대우림 또는 산의 일부 등 특정 지역과 영적으로 연계되어 있었습니다. 애버리지니에 의하면 토템 영혼의 선조들이 세계가 창조되던 꿈의 시대에 삶의 모든 부분을 만들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엮었다고 합니다.

대륙의 서쪽은 네덜란드가 지배권을 주장했지만, 영국인들은 민족국가들이 보통 취하는 수동공격적인 의견 충돌의 형태로 호주 해안 곳곳에 정착지를 세웠습니다. 현재 태즈메이니아로 알려진 반디멘스랜드는 1803년에 개척되었고, 오래가지 못한 포트 던다스 식민지는 브레머 선장에 의해 1824년에 세워졌고, 브리즈번 강어귀에 새로운 죄수 유형지가 1824년에 세워졌으며, 록이어 소령은 1826년 킹조지 사운드에 정착지를 세웠습니다. 따라서, 같은 해 대영제국은 대륙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삶 또는 손쉬운 탈취를 위해 이주민이 몰려오자 식민지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군인 및 범죄자 출신 이주민이 현재의 브리즈번 인근 유게라 부족을 몰아내고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퍼스는 1829년 영국의 귀족 출신 이주민들에 의해 정착되었습니다. 멜버른은 1835년에 무단점유자들이 포트필립 만에 들어가 정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영국 왕실의 인가를 받은 남호주회사는 애들레이드를 세웠습니다.

역사학자 로이드 롭슨의 수치에 의하면 80년간 (1788~1868년) 161,700명의 재소자가 여러 호주 식민지로 수송되었습니다. 이중 대략 3분의 2는 과밀인 호황기 산업 도시들(특히 중부지방 및 북부)로부터 이주한 도둑들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활기차게 성장하는 영국의 식민지에 꼭 필요한 상인들과 전문 기술을 가진 학식 있는 자들이 더욱 자주 운행된 선박을 통해 이주했습니다.

1820년대 초부터 점점 더 많은 무단점유자들이 개척된 정착지 주변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광대한 목장을 세워 양 떼를 기르고 밀과 귀리를 경작했습니다. 운영에 필요한 간접비는 미미하여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다른 이들도 따라나섰습니다. 양모는 호주의 가장 크고 수익성 높은 수출품이 되었고, 대부분 영국의 제융소로 보내졌습니다. 1850년까지 200여 명의 무단점유자가 300,000제곱킬로미터 이상을 차지하여 대륙에서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사회적 신분을 형성했습니다.

한편, 버크 총독은 영국 식민청 선언으로 호주 대륙을 무주지로 선포했습니다. 즉, 영국은 왕실 외에 그 어떤 국가나 사람도 호주 영토를 소유할 수 없다고 기록함으로써 애버리지니 씨족과의 조약 가능성을 조기에 차단했습니다. 유럽인들로부터 수입된 천연두, 독감, 홍역, 백일해, 결핵 등의 질병들은 원주민들에게 치명적이었고, 이러한 법률 조차 사실상 필요없게 만들었습니다. 시드니의 경우, 식민지가 세워진 지 얼마 안 되어 인근 애버리지니의 절반이 천연두 발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물론, 식민지 주민들도 첫 거주자들을 죽이는데 직접 거들지 않았다는 건 아닙니다. 혹스베리 전쟁(1795~1816년), 페뮬웨이의 전쟁(1795~1802년), 테드버리의 전쟁(1808~1809년)과 네피언 전쟁(1814~1816년)은 유럽/애버리지니 관계의 분위기를 확립했습니다.

1851년 뉴사우스웨일스와 중앙 빅토리아에서 발견된 금광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몰렸는데, 최종적으로는 캘리포니아의 1848년 골드러시 이상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초래했습니다. 중국, 캘리포니아 채금지, 아일랜드, 영국과 인도로부터 젊은 남성들이 선박 가득히 몰려왔고 몇몇 모험심 많은 젊은 여성들도 합류했습니다. 예능인, 사기꾼, 떠돌이, 돌팔이, 술집 주인들이 실제 탐광자들과 함께 몰려 혼돈의 축제가 열렸습니다. 빅토리아 식민지는 1850년 고작 76,000명에서 1859년 530,000명 이상까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성장했습니다. 정부는 인가와 가혹한 공권력으로 질서를 확립하려 했지만 이는 폭력만을 부추겼고, 결국 30명 이상의 '채금자'가 사망하고 더 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1854년 밸러랫 싸움으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몇 개월 후 왕립위원회에서는 확장하는 채금지의 관리를 위한 인가 폐지, 경찰 재편성 및 광부 선거권을 포함한 여러 급진적 개혁을 진행하였습니다.

채금지와 아웃백에서의 유혈 사태에도 불구하고 금과 양모에서 발견된 부유함은 멜버른, 빅토리아와 시드니에 투자와 문명을 가져왔습니다. 1880년대에 이미 도시들은 현대적이고 문화적이었고, 길거리에서 총격 사태는 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 대륙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호주에서 태어났고, 자신들을 호주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주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호주의 문학과 예술 운동에 반영되었습니다. 이러한 발전과 문화적인 요소로 인해 호주 식민지 주민들이 지리적으로 먼 영국에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했습니다.

1890년 6개 식민지의 대표들(초기에는 소수의 뉴질랜드인도 포함)이 멜버른에서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호주의 식민지들이 단결하고 대표단을 선출하여 헌법 제정 회의를 열 것을 촉구했습니다. 바로 다음 해에 시드니에서 '오스트랄라시아 연방협의회'가 개회되었고, 많은 논의 끝에 헌법 초안을 타결했습니다. 1900년 3월, 많은 망설임 끝에 호주 대표단이 입법안을 가지고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영국 의회는 7월에 승인하였고, 빅토리아 여왕 또한 곧 서명했습니다. 임시 내각 조성, 영연방 형성의 감독과 첫 선거를 치르기 위해 왕실을 대표하는 영국 귀족이 호주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01년 1월 1일에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이 설립되었습니다.

호주 농경지의 상당 부분을 영구적으로 파괴한 혹독한 가뭄과 토끼 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국가는 번영했고 조용히 존재했습니다. 호주 의회는 법(불명예스러운 1901년 이민 제한법 등 포함)을 제정하고, 잔존하는 식민군에서 국군과 해군을 급조했으며, 지구 반대편의 식민지 관련 사항에도 개입하여 1906년 영국령 뉴기니를 호주의 파푸아 보호령으로 이양했습니다. 모든 것은 평화로워 보였으나, 이는 신생 국가가 세계 대전으로 끌려들어 가면서 바뀌었습니다.

호주 인구 490만 명 중 10분의 1 정도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군 복무를 지원했습니다. 이들 중 6만 명 이상이 서부 전선 갈리폴리와 중동에서 사망했습니다. 이 희생의 대가로 호주 대표단은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여 그 결과로 비준된 국제 조약에 호주 역사상 처음으로 서명하게 되었습니다. 호주는 또한 국제 연맹의 회원국이 되었고, 그 노고로 독일령 뉴기니, 비스마르크 제도와 아주 작은 섬인 나우루 등 몇몇 독일 식민지를 이양받았습니다.

1920년대는 노동 문제, 걷잡을 수 없는 근대화, 대공황과 다양한 정치적 위기를 불러왔습니다. 1930년대에는 여기에 국제적 갈등마저 추가되었고, 특히 일본의 남태평양 세력 확장은 자유당과 노동당 양당이 1937년에 국방비 증가를 선거 캠페인 주제로 선정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정부가 부각한 대영제국과의 '제국 방어 정책'으로 호주는 1939년 9월 또 다른 세계 전쟁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호주 부대들이 지중해와 해상에서 활약을 보였지만, 2년 이내에 일본 제국이 태평양, 동남아,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넘어 공격하면서 그들은 보다 직접적인 위협에 맞서야 했습니다. 1942년 2월, 다윈의 항구는 엄청난 공습을 받았고, 이는 호주 본토에 감행된 100여 개 이상의 공습 중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커틴 총리에 의해 고무된 호주는 여러 전선에서 교전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북쪽 뉴기니의 정글은 일본 침략의 발판이 될 수 있어 중요했습니다. 커틴 정부는 국내에서는 배급제 시행, 난민 수용, 공장 및 조선소 건설, 전 국민에게 '끝까지 헤치고 나가자'고 격려하는 등, 국가를 전면적인 전시 태세로 전환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호주는 27,000명의 병사, 조종사 및 선원을 잃었습니다.

호주는 번영하는 수출 경제, 정부에서 대규모로 지원한 유럽 이민자 유치 정책, 교외 지역의 폭발적인 성장, 예술계의 '신국가주의', 애버리지니를 위한 공민권 수립, 그리고 냉전 시대의 편집증적인 벼랑 끝 전술 대부분을 피해가며 전후 경제 호황을 누렸습니다. 21세기는 호주 국민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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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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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커틴
특수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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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거
특수 인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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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백 목장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호주 대륙
크기
약 770만 제곱킬로미터
인구
약 2,400만 명(2017년 추정치)
수도
멜버른, 현재 캔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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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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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커틴
특수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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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거
특수 인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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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백 목장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호주 대륙
크기
약 770만 제곱킬로미터
인구
약 2,400만 명(2017년 추정치)
수도
멜버른, 현재 캔버라
특유 능력

남쪽의 땅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에 주거공간 +3을 제공합니다. 목장은 문화 폭탄을 촉발합니다. 캠퍼스, 상업 중심지, 성지 및 극장가가 멋진 매력도 타일에 위치한 경우 관련 생산량 +1, 놀라운 매력도에 위치한 경우 관련 생산량 +3을 제공합니다.

역사적 배경
애버리지니, 재소자, 극빈자, 탐광자와 부시레인저에 의해 차례로 정착된 '남쪽의 땅'은 4만5천 년 전 인도네시아 섬들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북쪽으로 건너온 사람들로부터 처음 정착되었습니다. 서기 1770년 제임스 쿡이 연안을 항해하며 대영제국의 영토로 주장하기 전까지, 구술과 영적인 문화가 풍부한 이곳의 수렵-채집민은 고립 속에서 번영했습니다. 네덜란드인 빌렘 얀스존과 영국인 윌리엄 댐피어가 더 일찌감치 호주를 발견했었지만, 외지고 위험한 땅에서 기회를 포착한 것은 쿡 선장이 처음이었습니다.

새로이 국가로 설립된 미국이 죄수 유형지로 향한 영국 죄수 수송선들을 거부하자 영국 정부당국은 계획을 바꿔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원치 않는 사회의 쓰레기들을 떠넘길 곳은 지구 반대편이 적격'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아서 필립 준장은 해군 호위선 2척, 수인 수송선 6척, 화물선 3척, 총 11척으로 구성된 최초의 수인 선단을 이끌고 영국에서 출발하여 뉴사우스웨일스로 향했습니다. 1788년 1월 보터니만에 도착한 필립 준장은 근방의 늪지대가 식민지로는 너무 유해하다고 판단하여 정착지를 더 북쪽의 천연 항만인 포트잭슨만으로 이전하였는데, 이곳이 오늘날 시드니하버로 더 잘 알려진 곳입니다.

아주 작은 변방 마을 시드니의 초기는 매우 험난했습니다. 18세기 말 전문 범죄자(잡범도 마찬가지)들은 하루아침에 능숙한 농부가 될 수 없었고, 보급선은 자주 오지 않았습니다. 1788년과 1792년 사이 추가로 3,546명의 남성 재소자와 766명의 여성 재소자가 수송되었는데, 대부분 병들거나 기력이 쇠퇴하여 중노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1790년 제2 수인 선단이 도착했을 때 수송 인원의 25% 이상이 항해 중에 사망했고, 제3 수인 선단 도착자들의 상태는 최초로 도착한 자들마저도 질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필립 총독은 주민들이 재소자인 것에 연연하지 않고 식민지의 성공과 개척민의 안녕을 진심으로 위했습니다. 그는 탐사대를 파견하여 더 좋은 경작지를 찾게 했고, 무역선을 환영했으며, 공중위생을 위한 조치를 촉진했습니다. 또한 과밀 거주를 해소하기 위해 위성 정착지들을 개척했으며, 현실과 동떨어진 영국발 명령들을 무시했습니다. 1792년 말 필립 총독이 영국으로 귀국했을 때에는 식민지가 마침내 안정화되어 자발적으로 이주하는 개척자들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 주민들은 초기에 시간을 초월한 마법의 왕국과 같은, 꿈의 시대에 살고 있던 원주민 애버리지니들을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18세기 말에는 300여 개의 씨족에 250여 개의 언어와 700여 개의 방언을 구사하는 100만 명 정도의 원주민이 있었습니다. 각 씨족은 사막, 열대우림 또는 산의 일부 등 특정 지역과 영적으로 연계되어 있었습니다. 애버리지니에 의하면 토템 영혼의 선조들이 세계가 창조되던 꿈의 시대에 삶의 모든 부분을 만들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엮었다고 합니다.

대륙의 서쪽은 네덜란드가 지배권을 주장했지만, 영국인들은 민족국가들이 보통 취하는 수동공격적인 의견 충돌의 형태로 호주 해안 곳곳에 정착지를 세웠습니다. 현재 태즈메이니아로 알려진 반디멘스랜드는 1803년에 개척되었고, 오래가지 못한 포트 던다스 식민지는 브레머 선장에 의해 1824년에 세워졌고, 브리즈번 강어귀에 새로운 죄수 유형지가 1824년에 세워졌으며, 록이어 소령은 1826년 킹조지 사운드에 정착지를 세웠습니다. 따라서, 같은 해 대영제국은 대륙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삶 또는 손쉬운 탈취를 위해 이주민이 몰려오자 식민지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군인 및 범죄자 출신 이주민이 현재의 브리즈번 인근 유게라 부족을 몰아내고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퍼스는 1829년 영국의 귀족 출신 이주민들에 의해 정착되었습니다. 멜버른은 1835년에 무단점유자들이 포트필립 만에 들어가 정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영국 왕실의 인가를 받은 남호주회사는 애들레이드를 세웠습니다.

역사학자 로이드 롭슨의 수치에 의하면 80년간 (1788~1868년) 161,700명의 재소자가 여러 호주 식민지로 수송되었습니다. 이중 대략 3분의 2는 과밀인 호황기 산업 도시들(특히 중부지방 및 북부)로부터 이주한 도둑들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활기차게 성장하는 영국의 식민지에 꼭 필요한 상인들과 전문 기술을 가진 학식 있는 자들이 더욱 자주 운행된 선박을 통해 이주했습니다.

1820년대 초부터 점점 더 많은 무단점유자들이 개척된 정착지 주변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광대한 목장을 세워 양 떼를 기르고 밀과 귀리를 경작했습니다. 운영에 필요한 간접비는 미미하여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다른 이들도 따라나섰습니다. 양모는 호주의 가장 크고 수익성 높은 수출품이 되었고, 대부분 영국의 제융소로 보내졌습니다. 1850년까지 200여 명의 무단점유자가 300,000제곱킬로미터 이상을 차지하여 대륙에서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사회적 신분을 형성했습니다.

한편, 버크 총독은 영국 식민청 선언으로 호주 대륙을 무주지로 선포했습니다. 즉, 영국은 왕실 외에 그 어떤 국가나 사람도 호주 영토를 소유할 수 없다고 기록함으로써 애버리지니 씨족과의 조약 가능성을 조기에 차단했습니다. 유럽인들로부터 수입된 천연두, 독감, 홍역, 백일해, 결핵 등의 질병들은 원주민들에게 치명적이었고, 이러한 법률 조차 사실상 필요없게 만들었습니다. 시드니의 경우, 식민지가 세워진 지 얼마 안 되어 인근 애버리지니의 절반이 천연두 발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물론, 식민지 주민들도 첫 거주자들을 죽이는데 직접 거들지 않았다는 건 아닙니다. 혹스베리 전쟁(1795~1816년), 페뮬웨이의 전쟁(1795~1802년), 테드버리의 전쟁(1808~1809년)과 네피언 전쟁(1814~1816년)은 유럽/애버리지니 관계의 분위기를 확립했습니다.

1851년 뉴사우스웨일스와 중앙 빅토리아에서 발견된 금광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몰렸는데, 최종적으로는 캘리포니아의 1848년 골드러시 이상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초래했습니다. 중국, 캘리포니아 채금지, 아일랜드, 영국과 인도로부터 젊은 남성들이 선박 가득히 몰려왔고 몇몇 모험심 많은 젊은 여성들도 합류했습니다. 예능인, 사기꾼, 떠돌이, 돌팔이, 술집 주인들이 실제 탐광자들과 함께 몰려 혼돈의 축제가 열렸습니다. 빅토리아 식민지는 1850년 고작 76,000명에서 1859년 530,000명 이상까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성장했습니다. 정부는 인가와 가혹한 공권력으로 질서를 확립하려 했지만 이는 폭력만을 부추겼고, 결국 30명 이상의 '채금자'가 사망하고 더 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1854년 밸러랫 싸움으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몇 개월 후 왕립위원회에서는 확장하는 채금지의 관리를 위한 인가 폐지, 경찰 재편성 및 광부 선거권을 포함한 여러 급진적 개혁을 진행하였습니다.

채금지와 아웃백에서의 유혈 사태에도 불구하고 금과 양모에서 발견된 부유함은 멜버른, 빅토리아와 시드니에 투자와 문명을 가져왔습니다. 1880년대에 이미 도시들은 현대적이고 문화적이었고, 길거리에서 총격 사태는 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 대륙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호주에서 태어났고, 자신들을 호주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주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호주의 문학과 예술 운동에 반영되었습니다. 이러한 발전과 문화적인 요소로 인해 호주 식민지 주민들이 지리적으로 먼 영국에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했습니다.

1890년 6개 식민지의 대표들(초기에는 소수의 뉴질랜드인도 포함)이 멜버른에서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호주의 식민지들이 단결하고 대표단을 선출하여 헌법 제정 회의를 열 것을 촉구했습니다. 바로 다음 해에 시드니에서 '오스트랄라시아 연방협의회'가 개회되었고, 많은 논의 끝에 헌법 초안을 타결했습니다. 1900년 3월, 많은 망설임 끝에 호주 대표단이 입법안을 가지고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영국 의회는 7월에 승인하였고, 빅토리아 여왕 또한 곧 서명했습니다. 임시 내각 조성, 영연방 형성의 감독과 첫 선거를 치르기 위해 왕실을 대표하는 영국 귀족이 호주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01년 1월 1일에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이 설립되었습니다.

호주 농경지의 상당 부분을 영구적으로 파괴한 혹독한 가뭄과 토끼 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국가는 번영했고 조용히 존재했습니다. 호주 의회는 법(불명예스러운 1901년 이민 제한법 등 포함)을 제정하고, 잔존하는 식민군에서 국군과 해군을 급조했으며, 지구 반대편의 식민지 관련 사항에도 개입하여 1906년 영국령 뉴기니를 호주의 파푸아 보호령으로 이양했습니다. 모든 것은 평화로워 보였으나, 이는 신생 국가가 세계 대전으로 끌려들어 가면서 바뀌었습니다.

호주 인구 490만 명 중 10분의 1 정도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군 복무를 지원했습니다. 이들 중 6만 명 이상이 서부 전선 갈리폴리와 중동에서 사망했습니다. 이 희생의 대가로 호주 대표단은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여 그 결과로 비준된 국제 조약에 호주 역사상 처음으로 서명하게 되었습니다. 호주는 또한 국제 연맹의 회원국이 되었고, 그 노고로 독일령 뉴기니, 비스마르크 제도와 아주 작은 섬인 나우루 등 몇몇 독일 식민지를 이양받았습니다.

1920년대는 노동 문제, 걷잡을 수 없는 근대화, 대공황과 다양한 정치적 위기를 불러왔습니다. 1930년대에는 여기에 국제적 갈등마저 추가되었고, 특히 일본의 남태평양 세력 확장은 자유당과 노동당 양당이 1937년에 국방비 증가를 선거 캠페인 주제로 선정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정부가 부각한 대영제국과의 '제국 방어 정책'으로 호주는 1939년 9월 또 다른 세계 전쟁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호주 부대들이 지중해와 해상에서 활약을 보였지만, 2년 이내에 일본 제국이 태평양, 동남아,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넘어 공격하면서 그들은 보다 직접적인 위협에 맞서야 했습니다. 1942년 2월, 다윈의 항구는 엄청난 공습을 받았고, 이는 호주 본토에 감행된 100여 개 이상의 공습 중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커틴 총리에 의해 고무된 호주는 여러 전선에서 교전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북쪽 뉴기니의 정글은 일본 침략의 발판이 될 수 있어 중요했습니다. 커틴 정부는 국내에서는 배급제 시행, 난민 수용, 공장 및 조선소 건설, 전 국민에게 '끝까지 헤치고 나가자'고 격려하는 등, 국가를 전면적인 전시 태세로 전환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호주는 27,000명의 병사, 조종사 및 선원을 잃었습니다.

호주는 번영하는 수출 경제, 정부에서 대규모로 지원한 유럽 이민자 유치 정책, 교외 지역의 폭발적인 성장, 예술계의 '신국가주의', 애버리지니를 위한 공민권 수립, 그리고 냉전 시대의 편집증적인 벼랑 끝 전술 대부분을 피해가며 전후 경제 호황을 누렸습니다. 21세기는 호주 국민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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