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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 능력

마지막 선지자

플레이어가 위대한 선지자가 없을 시, 마지막에서 두 번째 위대한 선지자를 다른 문명이 영입하는 경우, 플레이어는 마지막 위대한 선지자를 즉시 얻습니다. 아라비아의 종교를 믿는 타 문명 도시마다 과학 +1을 제공합니다.

역사적 배경
62세에 마지막 순례를 통해 하즈(Hajj)의 초석을 마련한 선지자 무함마드는 몇 개월 후에 병환을 앓았으며 서기 632년 6월에 메디나에서 생을 달리 했습니다. 수니파 성경에 따르면 그의 추종자들은 아부 바크르 시디크를 아미르 알 무미닌('믿는 자들의 왕') 즉, 무함마드의 계승자이자 최초의 정통 칼리파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아파에서는 무함마드가 자신의 사위이자 사촌인 알리를 그의 정신적인 임시 후계자로 직접 선택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시작된 분립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메디나의 아부 바크르와 능력 있는 세 명의 후계자의 통치 하에, 선지자의 계시에 힘입은 이슬람 전사들은 사방으로 보이는 사막과 초원 곳곳을 누비며 페르시아, 시리아, 이집트와 아나톨리아 및 북아프리카 해안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650년에서 655년 사이에 지중해의 키프로스, 크레테, 로도스 섬과 시칠리아의 다수 지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으며 비잔틴 제국의 국경까지 넘보고 있었습니다. 655년, 비잔틴의 황제 콘트산스 2세는 아랍의 맹습에 대적하여 직접 함대를 끌고 나섰지만 약 500척의 전함을 잃고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전성기의 정통 칼리파국은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이 최초의 아랍 칼리프 체제 하에서 피정복민들은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따라 호의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기독교, 유대교, 조로아스터교를 비롯한 일신교의 신도들에게는 개종의 기회가 주어졌으며, 개종할 경우 이슬람 시민의 모든 권리 및 보호 혜택과 이에 상응하는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무슬림 외의 신앙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계속해서 영위할 수 있었으며 자체 성서에 따른 법적 권한도 주어졌습니다. 단, 코란과 어긋나는 부분은 예외였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정책이었으며 이후 몇백 년에 걸쳐 아랍의 칼리프들에게 유용하게 작용했습니다.

무함마드에 따르면 '이슬람의 집'(Dar al-Islamiyyah)에 의한 통치 역시 알라의 뜻이었습니다. 아라비아 전체를 관장하는 아미르의 책임을 두 번째로 감당하게 된 칼리프 우마르는 확장세에 있던 제국을 12개의 지방으로 분할했으며, 각 지방에 '왈리'(Wali)를 두어 일상적인 통치 업무를 처리하게 했습니다. 또한 각 지방에는 징수행정관에서 수석 판사(카디)에 이르는 여섯 명의 관료를 임명했습니다. 우마르는 위반 시 끔찍한 처벌이 적용되는 엄격한 행위 규범을 수립했습니다. 각 관료는 매년 메카로 하즈를 다녀와야 했고 그곳에서 자신에게 올라온 모든 이의 사항에 답변해야 했습니다. 부패와 권력 남용을 완화하기 위해 칼리프는 공무원에게 높은 급여를 지급하도록 법적으로 명시했습니다. 우마르는 페르시아의 광신도 집단에 의해 암살당했지만 그의 행정 정책은 수백 년에 걸쳐 제국 전역에서 지속되었습니다.

656년, 제3대 칼리프인 우스만의 암살에 이어 시아파가 옹호하는 알리가 후계자로 선택되었습니다. 하지만 우스만의 친족이자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무아위야는 수니파를 등에 업고 있었으며, '바스라'라는 도시에 기반을 둔 암살자들에 대한 복수를 공표했습니다. 하지만 알리는 무슬림이 무슬림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이러한 복수심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알리, 무아위야와 카와리지파, 이렇게 세 진영 사이의 분쟁이었던 최초의 이슬람 내전에서 칼리프는 대부분의 영토를 무아위야에게 조금씩 빼앗겼습니다. 이어서 661년에는 이슬람 지도자 살해를 위한 카와리지파의 정교한 계획에 의해 알리가 암살되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카와리지파는 무아위야를 제거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알리의 살아남은 아들과 협의를 맺은 무아위야는 칼리프의 지위를 얻어 옴미아드 왕조를 건립했으며 계속해서 카와리지파를 진압해 나갔습니다.

옴미아드 왕조는 100년을 채 지속하지 못했지만 비잔틴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닥치는 대로 점령했습니다. 이븐 마르완(685-705년)과 술라이만(715-717년) 등의 유능한 옴미아드 칼리프들은 수도인 다마스쿠스와 카프카스, 마그레브, 인도 아대륙의 신드, 알안달루스(이베리아), 사마르칸트, 트란스옥시아나, 호라즘 등 여러 지역에서 이슬람의 깃발을 휘날렸습니다. 옴미아드 왕조는 이러한 과정에서 문명 역사상 다섯 번째로 큰 제국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투 및 건설 국가로서의 지워지지 않는 족적을 문명 자체에 남겼습니다. 예를 들어 압드 이븐 마리완은 아랍어를 제국의 공식어로 지정했으며, 이슬람 통화를 규격화하고, 우편 체계를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메카의 카바를 보수하고 심지어는 예루살렘에 바위 사원까지 건설했으며, 건축은 후세에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의 아들은 바위 사원 맞은편의 알 아크사 사원과 다마스쿠스의 대 모스크를 건축했으며 수많은 도로, 굴착정과 산악 단축로를 건설했습니다. 이러한 건설은 군대의 기동력을 개선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혜택을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옴미아드 왕조는 종교적으로 관대했습니다. 기독교와 유대인이 중요한 전초기지를 방어했고 옴미아드는 여전히 대부분의 인구가 기독교였던 시리아와 후미 지역에 대한 걱정 없이 비잔틴국과 대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낙원에서도 문제는 계속되었습니다. 740년부터 743년에 일어난 두 차례의 내전과 베르베르 반란으로 옴미아드 왕조는 약화되었습니다. 칼리프들이 참여하여 국경 주변에서 수시로 발발한 전투 또한 상황을 악화시켰고, 전쟁, 그리고 빈곤층을 향한 관용에 대한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여러 칼리프가 시작한 모든 복지 프로그램으로 인해 국고는 말라 버렸습니다. 결국 시아파의 분파로 아바스조 부족이 이끈 하시미야 당파는 747년에 칼리프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750년 1월, 두 가문과 서로의 동맹은 자브강 전투에서 만났으며 옴미아드는 대패했습니다. 다마스쿠스는 4월에 아바스조 가문의 손에 넘어갔고 옴미아드의 마지막 칼리프는 8월에 이집트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몇 남지 않은 옴미아드 일족은 북아프리카를 넘어 이베리아로 도주했으며 이곳에서 1031년까지 지속된 옴미아드 왕조(코르도바 칼리프국)를 세웠습니다.

이제 아바스조에서 광활한 아라비아 지역을 통치할 차례였습니다. 이들은 매우 능한 모습을 보였으며 알 킬라파 알 아바시아가 이슬람의 황금기를 아우를 정도였습니다. 당시 무슬림 칼리프 체제는 과학, 기술학, 약학, 철학, 문학을 비롯한 주요 분야에서 세계의 지식 및 예술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정권을 잡은 아바스조 일족은 개혁과 정치 편법을 통해 제국을 안정화해야 했습니다.

같은 계보의 최초 5대 칼리프가 통치하는 동안 군대가 재구성되었으며 이제 아립 및 무슬림 외의 인원도 포함되었습니다. 모두에게 교육이 장려되었고 탈라스 전투에서 사로잡힌 중국 포로들에 의해 서양 최초의 제지 공장이 건설되었습니다. 통화는 왕실의 후원 하에 규격화 및 안정화되었고 상인에게 유리한 법과 세제를 통해 상업이 장려되었습니다. 옴미아드 왕조에 비해 좀 더 종교적으로 편향된 아바스조 왕조에 의해 이슬람 율법이 다시 법적 체계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이들이 지방의 권한을 귀족 가문에 양보함으로써 코란에서 옹호하는 움마(무슬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의지를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알안달루스 및 바그레브는 옴미아드 왕조로, 모로코는 이드리스 왕조로, 이프리키야는 아글라브 왕조로, 이집트는 파티마 왕조로 권한이 넘어갔습니다.

786년에 하룬 알 라시드가 아바스조의 5대 칼리프로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간혹 불만을 품은 일부 부족원들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진보적이었으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했습니다. 샤를마뉴의 '위대한' 수도 아헨에 겨우 10,000명의 인구가 거주했을 당시 바그다드에는 행복하고 건강한 백만 명의 시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룬의 아들인 칼리프 압둘라 알 마문은 그의 부친이 바그다드에 건립한 지혜의 집을 기관화하여 세 대륙의 가장 위대한 학자들을 모으고 제자와 선생을 포함한 다른 이들과 함께 아이디어와 문화를 공유했습니다. 지혜의 집은 인류와 과학을 위한 최고의 중심지였으며 그리스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 라틴어와 여러 유럽 언어는 물론 아랍어까지 아우르는 문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고를 보유했습니다. 하지만 훌라구 칸이 이끄는 몽골족이 바그다드를 약탈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결국 35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역사의 파도, 혹은 기독교인들로부터, 로마보다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머나먼 서쪽에서는 레콩키스타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고 옴미아드 왕조는 이베리아에서 조금씩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중요하게도 바티칸의 교황 우르바노스 2세는 통합된 기독교가 통합 이슬람으로부터 성지를 '되찾아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결과가 좋지 못했던 1096년의 민중 십자군, 그리고 문제의 근원인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큰 성공을 거둔 제1차 십자군으로 이어진 일련의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레반트에서 집단 학살이 다시 재연되었으며 이는 몇 세대에 걸쳐 지속되었습니다. 아바스조 시대의 나머지 역사는 기독교와 무슬림 간의 분쟁으로 정의됩니다.

이단자를 몰아낼 수 있는 인물은 살라딘으로 더 잘 알려진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뿐이었습니다. 살라딘은 누르 앗딘의 사령관이자 셀주크 시리아의 총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던 술탄 파티마에 의해 이집트의 고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174년에 누르 앗딘이 승하하자, 살라딘은 이집트의 술탄으로서 아이유브 왕조를 건설하겠다고 공표했으며 곧 이어 시리아를 정복했습니다. 살라딘은 카이로에서 통치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 소규모 반란 등을 견뎌내며 새로운 아라비아의 칼리프 국가로 이슬람을 통합했습니다. 그는 십자군으로 관심을 돌렸는데, 진정으로 위대한 군사 사령관이었던 그는 얼마 뒤에 예루살렘을 재탈환했고 레반트에서 십자군 국가 대부분을 박살냈으며 1192년 6월에는 사자왕 리차드 1세와 람라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조약에 따라 이슬람은 예루살렘에 대한 유지 권리를 확고히 할 수 있었으며 도시를 방문하는 기독교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살라딘에 이어 일곱 명의 아이유브 술탄이 재위했으며 이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에 당면했습니다. 살라딘은 제국에 '공동 주권'이라는 체계를 구축했는데 이는 아이유브의 구성원들이 여러 지역을 '부술탄'으로서 통치하고 한 명의 술탄은 술탄 알 무아잠이라는 최고 지위자로 공표되어 군림하는 구조였습니다. 이는 논란을 야기하는 정치적 구조였습니다. 2세대가 채 지나지 않아 아이유브의 술탄 체제는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남과 동시에 열광적인 교황들에게 자극을 받은 이교도들은 '기독교 구원'을 위한 추가적인 십자군 원정에 나섰고 맘루크 왕조는 이집트에 대한 아이유부의 지배력을 무너뜨렸습니다. 곧 이어 몽골군이 밀고 내려왔습니다. 몇 년에 걸친 국경전 이후 대 칸은 그의 형제인 훌라구에게 나일 강 주변까지 몽골 제국을 확장하도록 명령했습니다. 1258년, 훌라구 칸은 바그다드를 점령했으며 칼리프와 일족을 포함한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비록 후속 왕조는 생존하게 되었고 다른 이슬람 제국이 들어섰지만 '아라비아 칼리프 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600년이 넘는 영광스러웠던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수치스러운 종말이었으며 신도들이 절대 잊지 못할 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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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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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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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술탄)
특수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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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특수 인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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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라사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아시아-아프리카
크기
약 1,500만 제곱킬로미터(옴미아드 왕조 당시)
인구
약 3,400만명(옴미아드 왕조 당시)
수도
다수(메디나, 쿠파,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카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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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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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라사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아시아-아프리카
크기
약 1,500만 제곱킬로미터(옴미아드 왕조 당시)
인구
약 3,400만명(옴미아드 왕조 당시)
수도
다수(메디나, 쿠파,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카이로)
특유 능력

마지막 선지자

플레이어가 위대한 선지자가 없을 시, 마지막에서 두 번째 위대한 선지자를 다른 문명이 영입하는 경우, 플레이어는 마지막 위대한 선지자를 즉시 얻습니다. 아라비아의 종교를 믿는 타 문명 도시마다 과학 +1을 제공합니다.

역사적 배경
62세에 마지막 순례를 통해 하즈(Hajj)의 초석을 마련한 선지자 무함마드는 몇 개월 후에 병환을 앓았으며 서기 632년 6월에 메디나에서 생을 달리 했습니다. 수니파 성경에 따르면 그의 추종자들은 아부 바크르 시디크를 아미르 알 무미닌('믿는 자들의 왕') 즉, 무함마드의 계승자이자 최초의 정통 칼리파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아파에서는 무함마드가 자신의 사위이자 사촌인 알리를 그의 정신적인 임시 후계자로 직접 선택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시작된 분립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메디나의 아부 바크르와 능력 있는 세 명의 후계자의 통치 하에, 선지자의 계시에 힘입은 이슬람 전사들은 사방으로 보이는 사막과 초원 곳곳을 누비며 페르시아, 시리아, 이집트와 아나톨리아 및 북아프리카 해안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650년에서 655년 사이에 지중해의 키프로스, 크레테, 로도스 섬과 시칠리아의 다수 지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으며 비잔틴 제국의 국경까지 넘보고 있었습니다. 655년, 비잔틴의 황제 콘트산스 2세는 아랍의 맹습에 대적하여 직접 함대를 끌고 나섰지만 약 500척의 전함을 잃고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전성기의 정통 칼리파국은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이 최초의 아랍 칼리프 체제 하에서 피정복민들은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따라 호의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기독교, 유대교, 조로아스터교를 비롯한 일신교의 신도들에게는 개종의 기회가 주어졌으며, 개종할 경우 이슬람 시민의 모든 권리 및 보호 혜택과 이에 상응하는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무슬림 외의 신앙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계속해서 영위할 수 있었으며 자체 성서에 따른 법적 권한도 주어졌습니다. 단, 코란과 어긋나는 부분은 예외였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정책이었으며 이후 몇백 년에 걸쳐 아랍의 칼리프들에게 유용하게 작용했습니다.

무함마드에 따르면 '이슬람의 집'(Dar al-Islamiyyah)에 의한 통치 역시 알라의 뜻이었습니다. 아라비아 전체를 관장하는 아미르의 책임을 두 번째로 감당하게 된 칼리프 우마르는 확장세에 있던 제국을 12개의 지방으로 분할했으며, 각 지방에 '왈리'(Wali)를 두어 일상적인 통치 업무를 처리하게 했습니다. 또한 각 지방에는 징수행정관에서 수석 판사(카디)에 이르는 여섯 명의 관료를 임명했습니다. 우마르는 위반 시 끔찍한 처벌이 적용되는 엄격한 행위 규범을 수립했습니다. 각 관료는 매년 메카로 하즈를 다녀와야 했고 그곳에서 자신에게 올라온 모든 이의 사항에 답변해야 했습니다. 부패와 권력 남용을 완화하기 위해 칼리프는 공무원에게 높은 급여를 지급하도록 법적으로 명시했습니다. 우마르는 페르시아의 광신도 집단에 의해 암살당했지만 그의 행정 정책은 수백 년에 걸쳐 제국 전역에서 지속되었습니다.

656년, 제3대 칼리프인 우스만의 암살에 이어 시아파가 옹호하는 알리가 후계자로 선택되었습니다. 하지만 우스만의 친족이자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무아위야는 수니파를 등에 업고 있었으며, '바스라'라는 도시에 기반을 둔 암살자들에 대한 복수를 공표했습니다. 하지만 알리는 무슬림이 무슬림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이러한 복수심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알리, 무아위야와 카와리지파, 이렇게 세 진영 사이의 분쟁이었던 최초의 이슬람 내전에서 칼리프는 대부분의 영토를 무아위야에게 조금씩 빼앗겼습니다. 이어서 661년에는 이슬람 지도자 살해를 위한 카와리지파의 정교한 계획에 의해 알리가 암살되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카와리지파는 무아위야를 제거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알리의 살아남은 아들과 협의를 맺은 무아위야는 칼리프의 지위를 얻어 옴미아드 왕조를 건립했으며 계속해서 카와리지파를 진압해 나갔습니다.

옴미아드 왕조는 100년을 채 지속하지 못했지만 비잔틴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닥치는 대로 점령했습니다. 이븐 마르완(685-705년)과 술라이만(715-717년) 등의 유능한 옴미아드 칼리프들은 수도인 다마스쿠스와 카프카스, 마그레브, 인도 아대륙의 신드, 알안달루스(이베리아), 사마르칸트, 트란스옥시아나, 호라즘 등 여러 지역에서 이슬람의 깃발을 휘날렸습니다. 옴미아드 왕조는 이러한 과정에서 문명 역사상 다섯 번째로 큰 제국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투 및 건설 국가로서의 지워지지 않는 족적을 문명 자체에 남겼습니다. 예를 들어 압드 이븐 마리완은 아랍어를 제국의 공식어로 지정했으며, 이슬람 통화를 규격화하고, 우편 체계를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메카의 카바를 보수하고 심지어는 예루살렘에 바위 사원까지 건설했으며, 건축은 후세에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의 아들은 바위 사원 맞은편의 알 아크사 사원과 다마스쿠스의 대 모스크를 건축했으며 수많은 도로, 굴착정과 산악 단축로를 건설했습니다. 이러한 건설은 군대의 기동력을 개선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혜택을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옴미아드 왕조는 종교적으로 관대했습니다. 기독교와 유대인이 중요한 전초기지를 방어했고 옴미아드는 여전히 대부분의 인구가 기독교였던 시리아와 후미 지역에 대한 걱정 없이 비잔틴국과 대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낙원에서도 문제는 계속되었습니다. 740년부터 743년에 일어난 두 차례의 내전과 베르베르 반란으로 옴미아드 왕조는 약화되었습니다. 칼리프들이 참여하여 국경 주변에서 수시로 발발한 전투 또한 상황을 악화시켰고, 전쟁, 그리고 빈곤층을 향한 관용에 대한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여러 칼리프가 시작한 모든 복지 프로그램으로 인해 국고는 말라 버렸습니다. 결국 시아파의 분파로 아바스조 부족이 이끈 하시미야 당파는 747년에 칼리프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750년 1월, 두 가문과 서로의 동맹은 자브강 전투에서 만났으며 옴미아드는 대패했습니다. 다마스쿠스는 4월에 아바스조 가문의 손에 넘어갔고 옴미아드의 마지막 칼리프는 8월에 이집트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몇 남지 않은 옴미아드 일족은 북아프리카를 넘어 이베리아로 도주했으며 이곳에서 1031년까지 지속된 옴미아드 왕조(코르도바 칼리프국)를 세웠습니다.

이제 아바스조에서 광활한 아라비아 지역을 통치할 차례였습니다. 이들은 매우 능한 모습을 보였으며 알 킬라파 알 아바시아가 이슬람의 황금기를 아우를 정도였습니다. 당시 무슬림 칼리프 체제는 과학, 기술학, 약학, 철학, 문학을 비롯한 주요 분야에서 세계의 지식 및 예술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정권을 잡은 아바스조 일족은 개혁과 정치 편법을 통해 제국을 안정화해야 했습니다.

같은 계보의 최초 5대 칼리프가 통치하는 동안 군대가 재구성되었으며 이제 아립 및 무슬림 외의 인원도 포함되었습니다. 모두에게 교육이 장려되었고 탈라스 전투에서 사로잡힌 중국 포로들에 의해 서양 최초의 제지 공장이 건설되었습니다. 통화는 왕실의 후원 하에 규격화 및 안정화되었고 상인에게 유리한 법과 세제를 통해 상업이 장려되었습니다. 옴미아드 왕조에 비해 좀 더 종교적으로 편향된 아바스조 왕조에 의해 이슬람 율법이 다시 법적 체계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이들이 지방의 권한을 귀족 가문에 양보함으로써 코란에서 옹호하는 움마(무슬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의지를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알안달루스 및 바그레브는 옴미아드 왕조로, 모로코는 이드리스 왕조로, 이프리키야는 아글라브 왕조로, 이집트는 파티마 왕조로 권한이 넘어갔습니다.

786년에 하룬 알 라시드가 아바스조의 5대 칼리프로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간혹 불만을 품은 일부 부족원들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진보적이었으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했습니다. 샤를마뉴의 '위대한' 수도 아헨에 겨우 10,000명의 인구가 거주했을 당시 바그다드에는 행복하고 건강한 백만 명의 시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룬의 아들인 칼리프 압둘라 알 마문은 그의 부친이 바그다드에 건립한 지혜의 집을 기관화하여 세 대륙의 가장 위대한 학자들을 모으고 제자와 선생을 포함한 다른 이들과 함께 아이디어와 문화를 공유했습니다. 지혜의 집은 인류와 과학을 위한 최고의 중심지였으며 그리스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 라틴어와 여러 유럽 언어는 물론 아랍어까지 아우르는 문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고를 보유했습니다. 하지만 훌라구 칸이 이끄는 몽골족이 바그다드를 약탈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결국 35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역사의 파도, 혹은 기독교인들로부터, 로마보다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머나먼 서쪽에서는 레콩키스타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고 옴미아드 왕조는 이베리아에서 조금씩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중요하게도 바티칸의 교황 우르바노스 2세는 통합된 기독교가 통합 이슬람으로부터 성지를 '되찾아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결과가 좋지 못했던 1096년의 민중 십자군, 그리고 문제의 근원인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큰 성공을 거둔 제1차 십자군으로 이어진 일련의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레반트에서 집단 학살이 다시 재연되었으며 이는 몇 세대에 걸쳐 지속되었습니다. 아바스조 시대의 나머지 역사는 기독교와 무슬림 간의 분쟁으로 정의됩니다.

이단자를 몰아낼 수 있는 인물은 살라딘으로 더 잘 알려진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뿐이었습니다. 살라딘은 누르 앗딘의 사령관이자 셀주크 시리아의 총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던 술탄 파티마에 의해 이집트의 고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174년에 누르 앗딘이 승하하자, 살라딘은 이집트의 술탄으로서 아이유브 왕조를 건설하겠다고 공표했으며 곧 이어 시리아를 정복했습니다. 살라딘은 카이로에서 통치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 소규모 반란 등을 견뎌내며 새로운 아라비아의 칼리프 국가로 이슬람을 통합했습니다. 그는 십자군으로 관심을 돌렸는데, 진정으로 위대한 군사 사령관이었던 그는 얼마 뒤에 예루살렘을 재탈환했고 레반트에서 십자군 국가 대부분을 박살냈으며 1192년 6월에는 사자왕 리차드 1세와 람라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조약에 따라 이슬람은 예루살렘에 대한 유지 권리를 확고히 할 수 있었으며 도시를 방문하는 기독교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살라딘에 이어 일곱 명의 아이유브 술탄이 재위했으며 이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에 당면했습니다. 살라딘은 제국에 '공동 주권'이라는 체계를 구축했는데 이는 아이유브의 구성원들이 여러 지역을 '부술탄'으로서 통치하고 한 명의 술탄은 술탄 알 무아잠이라는 최고 지위자로 공표되어 군림하는 구조였습니다. 이는 논란을 야기하는 정치적 구조였습니다. 2세대가 채 지나지 않아 아이유브의 술탄 체제는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남과 동시에 열광적인 교황들에게 자극을 받은 이교도들은 '기독교 구원'을 위한 추가적인 십자군 원정에 나섰고 맘루크 왕조는 이집트에 대한 아이유부의 지배력을 무너뜨렸습니다. 곧 이어 몽골군이 밀고 내려왔습니다. 몇 년에 걸친 국경전 이후 대 칸은 그의 형제인 훌라구에게 나일 강 주변까지 몽골 제국을 확장하도록 명령했습니다. 1258년, 훌라구 칸은 바그다드를 점령했으며 칼리프와 일족을 포함한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비록 후속 왕조는 생존하게 되었고 다른 이슬람 제국이 들어섰지만 '아라비아 칼리프 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600년이 넘는 영광스러웠던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수치스러운 종말이었으며 신도들이 절대 잊지 못할 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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