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 또는 최근에 나타난 문명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세계의 교차로에 위치한 인도는 북부의 마우리아와 굽타(한때 알렉산더와 충돌하기도 함), 동남아시아와 깊은 관계를 가진 촐라 남부 등 다양한 제국과 정복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와 초기 근대 시기의 인도는 다른 침략자들의 지배하에 놓였습니다. 무갈 제국은 몽골족의 후손들이 수립했고, 인도 예술, 건축, 업적의 눈부신 하이라이트가 되었습니다. 이슬람 통치하에 타지마할, 붉은 요새 같은 건축물들이 등장했습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등장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1498년 바스쿠 다 가마의 함대는 아프리카를 우회하여 인도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지만 사실 인도의 여러 왕국과 제국 중 일부는 로마 제국 시절부터 이미 서양과 무역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은 아대륙 해안을 따라 교역소를 구축했고 곧 이어 인가를 받은 무역 회사로 가장한 네덜란드인,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합작 회사인 영국 동인도 회사(Honorable East India Company)는 1600년 12월에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극동 지역과 기본 제화를 거래할 수 있는 인가를 받았으며 전성기에는 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이 이 회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이 회사는 인도에 재산을 보유한 유일한 유럽 기업이 되었습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수많은 약소국으로 이루어진 현지의 복잡한 정책 외에 지역 신앙의 엄청난 다양성까지 상대해야 했습니다. 인도는 수많은 신앙을 아우르는 종교의 땅으로, 아대륙은 네 가지의 주요 종교(힌두교, 불교, 시크교, 자이나교), 그리고 여기서 파생된 수많은 종파와 분파가 탄생한 곳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정복자들이 들여온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심지어는 유대교를 비롯한 다른 여러 종교 역시 이곳에 발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이전에는 이질적이었던) 카스트 제도 등을 공식화하고 자신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존재했던 매우 다양한 관습들을 '힌두교'라는 범주로 묶는 등 몇 가지 '사안'의 책임이 있습니다.
영국 정부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 자치권에 종식을 고하게 된 것은 믿음의 위기 때문이었습니다. 1857년에는 회사가 아대륙의 지배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비록 부패하고 비효율적이기는 하지만 나름의 행정부, 군대와 사회 공공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항상 그렇듯 세포이의 항쟁이 일어난 데에는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었지만 현지 병사들의 머스킷총에 사용되는 기름칠한 탄약포가 새로 도입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새로운 탄약포의 화약을 개봉하려면 입으로 물어서 뜯어야 했는데 인도인들은 왜인지 실탄에 우지와 돼지 지방이 칠해져 있다고 믿었고 이는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부대원들이 새로운 탄약포로 사용하도록 고집하며 섬나라 특유의 편협한 공감 능력을 보였고, 현지의 병사들은 즉시 들고 일어났습니다.
심각한 유혈 사태가 발생했고 소위 '제1차 인도 독립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군이 동원되었습니다. 영국 국민들의 분노로 인해 왕실에서는 이듬해에 회사를 없애고 재산을 모두 압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매우 효율적인 영국인들은 향후 몇 년에 걸쳐 인도의 군대, 금융 체계와 식민지 행정을 재정비했습니다. 인도는 영국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빅토리아 여왕은 수많은 호칭에 '인도의 황후'라는 직위를 또 하나 추가하게 되었고, 이어진 90년 동안 영국령 인도 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영국인들이 통일을 마무리하고 국경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며 최대한 많은 부를 쥐어 짜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인도의 풍경과 인프라를 다듬었습니다. 영국인들은 학교, 병원, 도서관, 야외 공연장을 비롯해 문명의 흔적으로 여기는 온갖 건물을 건축했으며 많은 인도인들이 이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영국인들은 이해하기 쉬운 인구 단위로 인종과 종교의 개념을 성문화했습니다. 영국인들은 법, 화폐, 법적 감금, 처형 방식 및 우편 등에 대한 획일적인 표준화를 시작했습니다. 영국인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기술을 들여왔으며 전신망, 신문, 관개 체계, 도로와 철도를 인도 전역에 건설했고, 그뿐만 아니라 인도의 정체 의식 확립을 독려했으며 적어도 서로에게 이질감을 보이는 현지 부족 모두가 혐오할 만한 적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1880년부터 1920년까지 이어진 영국의 통치 하에 인도의 경제와 인구는 매년 1%씩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현지인들의 사회 및 윤리 양식에 반복적으로 개입하기 좋아했던 영국인들은 인도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는데, 예를 들어 1890년대에는 영국과 인도의 다양한 개혁가들이 과부 개가의 허용을 주장했습니다. 커즌 경은 종교적 불화를 완화하고 행정부의 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05년에 벵골을 동쪽의 무슬림과 서쪽의 힌두교로 분립했지만 1906년에 그가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흐지부지되었습니다. 1909년의 몰리민토 개혁을 통해 인도인들은 식민지 및 지방 정부에서 제한적이나마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인도무슬림연맹과 인도 국민회의파의 성장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영국인의 확고한 이념적이며 조직적인 정책에 반해 자체적인 민족운동이 발생했으며, 특히 새롭게 부상한 인도의 중산층 사이에서 이러한 과정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자치를 향한 또 다른 자극제는 심각한 기근의 반복이었습니다. 식민지 정부의 운영이 부실했고 수익을 얻기 위해 식품류를 다시 영국으로 보낸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서기 1876년부터 1878년까지 이어진 대기근으로 인해 영국에서 관리하는 영토에서만 55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아직 편입되지 않은 번왕국에서도 수백만 명이 추가로 사망했습니다. 20년 후에 발생한 기근으로 500만 명이 또 사망했고 2년 후인 1899년에 백만 명이 추가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는 개선된 인프라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수출을 위해 철도를 통해 항구로 곡식을 실어나를 수 있었지만, 곡식을 기른 지역민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주기적으로 인구를 격감시켰던 유행병 역시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립과 자립을 향한 진보의 분수령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열정적인 애국심이 불타는 인도의 독립주의자들과 대부분의 인도 국민들이 이를 환영했습니다. 이미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시작한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젊은 남성들을 적극적으로 모병하는 데 동의했으며 보어-줄루 전쟁 당시의 모병 방식과는 달리 이번에는 의무병보다는 전투 병력에 집중했습니다. 간디를 옹호하는 몇몇 사람들은 인도가 나중에 다시 독립을 쟁취했을 때 훈련과 경험을 갖춘 군대를 보유하도록 하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지의 다양한 정치 정당과 대부분의 민족운동 참여자들은 열정을 다해 인도의 깃발을 흔들었습니다. 다만 벵골과 같은 분쟁 지역에서는 지방 행정부를 마비시키기 위한 목적 등으로 소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높은 사상자율, 높은 세금으로 인해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교역 단절은 대체적으로 분쟁이 많았던 독립주의 단체들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인도 국민들의 희생에 자치 권한과 같은 보상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16년, 인도 국민회의파와 인도무슬림연맹은 러크나우 협정을 체결하여 영국인들이 인도에서 나가도록 함께 압력을 가하기로 동의했습니다.
피에 젖은 1919년의 암리차르 학살사건에 이어 1921년에는 간디가 약간의 논란 속에 인도 국민회의파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습니다. 간디는 고팔 고칼레와 여러 중립 인사의 영향력 아래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즉시 비폭력 시민불복종을 통한 저항 정책을 구현했습니다. 이는 반영 운동에 참여했던 다른 지도자들이 의회에서 사임하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이 중에는 치타 다스, 애니 베전트와 모틸랄 네루와 같은 충실한 운동가도 포함되었습니다. 그 결과 의회가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향후 20년에 걸쳐 간디는 영국 통치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집회, 시위 및 행진을 주최했습니다. 영국의 소금세에 항의하기 위해 간디와 수천 명의 추종자가 소금을 만들기 위해 바다로 행진한 1930년의 유명한 '소금 행진'도 이 중 하나에 속합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구금되었으며, 인도철회운동에 개입했다는 죄목으로 1942년부터 2년 동안 구금되어 있는 동안에는 그의 아내가 사망하고 그는 말라리아에 걸렸습니다. 그가 대의를 위해 희생한 순교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영국 정부에서는 바로 그를 석방시켰지만 그는 인도가 독립한지 불과 몇 개월 후에 힌두교 국수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어 결국에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국력이 기울고 간디의 성가신 전략에 대한 묘안을 찾지 못한 영국 의회는 1947년에 인도독립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안을 통해 영국 행정부와 군대 전체의 철수 날짜와 영국 식민지의 분립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영국 식민지는 많은 논란이 일었던 래드클리프 선을 따라 힌두교인 인도와 무슬림 국가인 파키스탄으로 분립됩니다. 8월 14일 오후 11시 57분, 파키스탄은 독립과 자유를 선언했으며 자정이 지난 오전 12시 2분에는 인도가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남은 560개의 번왕국에는 두 국가 중 하나로 편입하거나 독립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비록 의도는 좋았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이러한 권한은 무시되었습니다.
이 종교의 땅에서 철저하게 상이한 믿음을 가진 두 나라가 분립되어 탄생함으로 인해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졌으며 약 1,500만 명의 신도들이 자신의 진영으로 움직이기 위해 래드클리프 선을 넘었습니다. 난민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건전하고 현명한 판단력을 보였습니다. 두 신흥 국가에는 자유를 선사한 성공적인 저항의 비폭력적 성격을 기만하는 끝없는 유혈 사태를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고 난민들은 그 결과로 인한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집단 폭력 행위 또한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백만 명이 넘는 힌두교, 회교와 시크교의 신도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에는 불신이라는 구시대의 유물이 남게 되었습니다.
1950년 1월에 인도는 사회주의 민주공화국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후로 인도는 파키스탄과의 간헐적인 전쟁과 중국과의 국경 분쟁을 제외하고는 국제 친선의 일원인 진보적이고 평화로운 국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 또는 최근에 나타난 문명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세계의 교차로에 위치한 인도는 북부의 마우리아와 굽타(한때 알렉산더와 충돌하기도 함), 동남아시아와 깊은 관계를 가진 촐라 남부 등 다양한 제국과 정복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와 초기 근대 시기의 인도는 다른 침략자들의 지배하에 놓였습니다. 무갈 제국은 몽골족의 후손들이 수립했고, 인도 예술, 건축, 업적의 눈부신 하이라이트가 되었습니다. 이슬람 통치하에 타지마할, 붉은 요새 같은 건축물들이 등장했습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등장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1498년 바스쿠 다 가마의 함대는 아프리카를 우회하여 인도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지만 사실 인도의 여러 왕국과 제국 중 일부는 로마 제국 시절부터 이미 서양과 무역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은 아대륙 해안을 따라 교역소를 구축했고 곧 이어 인가를 받은 무역 회사로 가장한 네덜란드인,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합작 회사인 영국 동인도 회사(Honorable East India Company)는 1600년 12월에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극동 지역과 기본 제화를 거래할 수 있는 인가를 받았으며 전성기에는 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이 이 회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이 회사는 인도에 재산을 보유한 유일한 유럽 기업이 되었습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수많은 약소국으로 이루어진 현지의 복잡한 정책 외에 지역 신앙의 엄청난 다양성까지 상대해야 했습니다. 인도는 수많은 신앙을 아우르는 종교의 땅으로, 아대륙은 네 가지의 주요 종교(힌두교, 불교, 시크교, 자이나교), 그리고 여기서 파생된 수많은 종파와 분파가 탄생한 곳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정복자들이 들여온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심지어는 유대교를 비롯한 다른 여러 종교 역시 이곳에 발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이전에는 이질적이었던) 카스트 제도 등을 공식화하고 자신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존재했던 매우 다양한 관습들을 '힌두교'라는 범주로 묶는 등 몇 가지 '사안'의 책임이 있습니다.
영국 정부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 자치권에 종식을 고하게 된 것은 믿음의 위기 때문이었습니다. 1857년에는 회사가 아대륙의 지배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비록 부패하고 비효율적이기는 하지만 나름의 행정부, 군대와 사회 공공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항상 그렇듯 세포이의 항쟁이 일어난 데에는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었지만 현지 병사들의 머스킷총에 사용되는 기름칠한 탄약포가 새로 도입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새로운 탄약포의 화약을 개봉하려면 입으로 물어서 뜯어야 했는데 인도인들은 왜인지 실탄에 우지와 돼지 지방이 칠해져 있다고 믿었고 이는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영국인들은 부대원들이 새로운 탄약포로 사용하도록 고집하며 섬나라 특유의 편협한 공감 능력을 보였고, 현지의 병사들은 즉시 들고 일어났습니다.
심각한 유혈 사태가 발생했고 소위 '제1차 인도 독립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군이 동원되었습니다. 영국 국민들의 분노로 인해 왕실에서는 이듬해에 회사를 없애고 재산을 모두 압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매우 효율적인 영국인들은 향후 몇 년에 걸쳐 인도의 군대, 금융 체계와 식민지 행정을 재정비했습니다. 인도는 영국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빅토리아 여왕은 수많은 호칭에 '인도의 황후'라는 직위를 또 하나 추가하게 되었고, 이어진 90년 동안 영국령 인도 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영국인들이 통일을 마무리하고 국경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며 최대한 많은 부를 쥐어 짜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인도의 풍경과 인프라를 다듬었습니다. 영국인들은 학교, 병원, 도서관, 야외 공연장을 비롯해 문명의 흔적으로 여기는 온갖 건물을 건축했으며 많은 인도인들이 이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영국인들은 이해하기 쉬운 인구 단위로 인종과 종교의 개념을 성문화했습니다. 영국인들은 법, 화폐, 법적 감금, 처형 방식 및 우편 등에 대한 획일적인 표준화를 시작했습니다. 영국인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기술을 들여왔으며 전신망, 신문, 관개 체계, 도로와 철도를 인도 전역에 건설했고, 그뿐만 아니라 인도의 정체 의식 확립을 독려했으며 적어도 서로에게 이질감을 보이는 현지 부족 모두가 혐오할 만한 적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1880년부터 1920년까지 이어진 영국의 통치 하에 인도의 경제와 인구는 매년 1%씩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현지인들의 사회 및 윤리 양식에 반복적으로 개입하기 좋아했던 영국인들은 인도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는데, 예를 들어 1890년대에는 영국과 인도의 다양한 개혁가들이 과부 개가의 허용을 주장했습니다. 커즌 경은 종교적 불화를 완화하고 행정부의 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05년에 벵골을 동쪽의 무슬림과 서쪽의 힌두교로 분립했지만 1906년에 그가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흐지부지되었습니다. 1909년의 몰리민토 개혁을 통해 인도인들은 식민지 및 지방 정부에서 제한적이나마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인도무슬림연맹과 인도 국민회의파의 성장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영국인의 확고한 이념적이며 조직적인 정책에 반해 자체적인 민족운동이 발생했으며, 특히 새롭게 부상한 인도의 중산층 사이에서 이러한 과정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자치를 향한 또 다른 자극제는 심각한 기근의 반복이었습니다. 식민지 정부의 운영이 부실했고 수익을 얻기 위해 식품류를 다시 영국으로 보낸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서기 1876년부터 1878년까지 이어진 대기근으로 인해 영국에서 관리하는 영토에서만 55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아직 편입되지 않은 번왕국에서도 수백만 명이 추가로 사망했습니다. 20년 후에 발생한 기근으로 500만 명이 또 사망했고 2년 후인 1899년에 백만 명이 추가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는 개선된 인프라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수출을 위해 철도를 통해 항구로 곡식을 실어나를 수 있었지만, 곡식을 기른 지역민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주기적으로 인구를 격감시켰던 유행병 역시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립과 자립을 향한 진보의 분수령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열정적인 애국심이 불타는 인도의 독립주의자들과 대부분의 인도 국민들이 이를 환영했습니다. 이미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시작한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젊은 남성들을 적극적으로 모병하는 데 동의했으며 보어-줄루 전쟁 당시의 모병 방식과는 달리 이번에는 의무병보다는 전투 병력에 집중했습니다. 간디를 옹호하는 몇몇 사람들은 인도가 나중에 다시 독립을 쟁취했을 때 훈련과 경험을 갖춘 군대를 보유하도록 하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지의 다양한 정치 정당과 대부분의 민족운동 참여자들은 열정을 다해 인도의 깃발을 흔들었습니다. 다만 벵골과 같은 분쟁 지역에서는 지방 행정부를 마비시키기 위한 목적 등으로 소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높은 사상자율, 높은 세금으로 인해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교역 단절은 대체적으로 분쟁이 많았던 독립주의 단체들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인도 국민들의 희생에 자치 권한과 같은 보상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16년, 인도 국민회의파와 인도무슬림연맹은 러크나우 협정을 체결하여 영국인들이 인도에서 나가도록 함께 압력을 가하기로 동의했습니다.
피에 젖은 1919년의 암리차르 학살사건에 이어 1921년에는 간디가 약간의 논란 속에 인도 국민회의파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습니다. 간디는 고팔 고칼레와 여러 중립 인사의 영향력 아래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즉시 비폭력 시민불복종을 통한 저항 정책을 구현했습니다. 이는 반영 운동에 참여했던 다른 지도자들이 의회에서 사임하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이 중에는 치타 다스, 애니 베전트와 모틸랄 네루와 같은 충실한 운동가도 포함되었습니다. 그 결과 의회가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향후 20년에 걸쳐 간디는 영국 통치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집회, 시위 및 행진을 주최했습니다. 영국의 소금세에 항의하기 위해 간디와 수천 명의 추종자가 소금을 만들기 위해 바다로 행진한 1930년의 유명한 '소금 행진'도 이 중 하나에 속합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구금되었으며, 인도철회운동에 개입했다는 죄목으로 1942년부터 2년 동안 구금되어 있는 동안에는 그의 아내가 사망하고 그는 말라리아에 걸렸습니다. 그가 대의를 위해 희생한 순교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영국 정부에서는 바로 그를 석방시켰지만 그는 인도가 독립한지 불과 몇 개월 후에 힌두교 국수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어 결국에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국력이 기울고 간디의 성가신 전략에 대한 묘안을 찾지 못한 영국 의회는 1947년에 인도독립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안을 통해 영국 행정부와 군대 전체의 철수 날짜와 영국 식민지의 분립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영국 식민지는 많은 논란이 일었던 래드클리프 선을 따라 힌두교인 인도와 무슬림 국가인 파키스탄으로 분립됩니다. 8월 14일 오후 11시 57분, 파키스탄은 독립과 자유를 선언했으며 자정이 지난 오전 12시 2분에는 인도가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남은 560개의 번왕국에는 두 국가 중 하나로 편입하거나 독립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비록 의도는 좋았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이러한 권한은 무시되었습니다.
이 종교의 땅에서 철저하게 상이한 믿음을 가진 두 나라가 분립되어 탄생함으로 인해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졌으며 약 1,500만 명의 신도들이 자신의 진영으로 움직이기 위해 래드클리프 선을 넘었습니다. 난민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건전하고 현명한 판단력을 보였습니다. 두 신흥 국가에는 자유를 선사한 성공적인 저항의 비폭력적 성격을 기만하는 끝없는 유혈 사태를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고 난민들은 그 결과로 인한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집단 폭력 행위 또한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백만 명이 넘는 힌두교, 회교와 시크교의 신도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에는 불신이라는 구시대의 유물이 남게 되었습니다.
1950년 1월에 인도는 사회주의 민주공화국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후로 인도는 파키스탄과의 간헐적인 전쟁과 중국과의 국경 분쟁을 제외하고는 국제 친선의 일원인 진보적이고 평화로운 국가로 자리 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