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 전초기지를 해산시킬 때 일반적인 경험치 외에도 부족 마을 보상을 함께 받습니다. 도시 국가의 유닛 징병에 드는 비용이 절반이 됩니다.
역사적 배경
수메르는 실질적인 왕국이나 제국보다는 공통의 관습을 가지고 가끔씩 중앙 권력의 통치를 받은 도시 국가들의 연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메르는 여전히 세계 최초의 '문명'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왕권(패권)을 부여하기 시작했고 이는 영향력을 갖춘 안정적인 도시 국가의 통치자들이 왕조를 세웠다가 곧 이어 다른 왕조에 의해 무너지는 경우로 이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키시, 라가시, 우르, 우루크, 아다브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3000년 이전에 문어(원시 문자 시대 이전의 표어문자)를 개발하여, 이는 후대 역사학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록,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수메르로 불리게 된 지역의 최초 개화 세력이 우바이드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당시에는 문명의 기준이 높지 않았음). 이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형성된 습지에서 물을 빼냈고 흙벽돌 오두막과 벽을 올렸으며 밭을 관개하고 직조, 가죽, 석조, 도자기와 문자를 고안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북부의 산악 국가에서 포획된 노예들을 이용하기 시작한 이들은 문명 사회의 또 다른 특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이들은 몇 개의 도시를 건설했으며, 대부분의 도시에는 보통 신의 계시를 받는 왕과 여러 장로로 구성된 중앙 행정부가 있는 사원이 도시 한가운데에 배치되었습니다. 이러한 대대적인 도심화를 통해 수메르 문명은 기원전 4000년경에 드디어 연합되었습니다.
신의 계시를 받는 왕이 단순한 독재 군주로 진화하게 된 시기는 기원전 2900년경이었으며, 이때부터 수메르의 '왕조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왕조 시대는 수없이 많은 수메르 왕들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회자됩니다. 여러 왕조가 몇 년 동안 여러 회에 걸쳐 수메르의 왕권을 차지했고, 예로 우루크 왕조는 다섯 차례, 카시 왕조는 세 차례에 걸쳐 수메르를 통치했습니다. 도시 국가 연합에 대한 지배권은 성지 니푸르의 사제단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수메르 왕의 권한은 자신의 도시를 제외하고는 제한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수메르 왕에게는 수메르 전역의 평화를 유지시켜야 할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수메르의 왕들은 아주 유능하지는 못했습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다양한 일부 고서와 기념물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향후 몇백 년의 시간 동안 높은 벽의 구축(길가메시가 자신의 우루크에 높은 벽을 건설한 경우 등)으로 인해 폭력이 증가했고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작은 마을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영향력 있는 도시 국가들이 교역과 방어를 위해 함께 뭉치기 시작했고, 일부 도시 국가들이 무력을 통해 다른 도시 국가 위에 군림하고자 했던 것 역시 필연적이었습니다.
이를 처음 달성한 인물은 라가시 왕조(기원전 2500-2270년)의 에안나툼이었습니다. 그는 사실상 키시, 우루크, 라르사 등을 비롯한 수메르 전체를 합병했으며 라가시 최대의 적수였던 움마를 속국으로 축소시켰습니다. 라가시의 왕들은 공포에 기반한 국가 정책을 활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독수리 석비에는 라가시에 대적한 적들의 끔찍한 최후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종국에는 움마의 왕들이 라가시를 전복시키고 우루크를 정복한 후 이를 자신들의 수도로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토가 페르시아 만부터 지중해까지 닿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움마인들은 아카드의 사르곤 대제가 휩쓸고 들어오기 이전까지 수메르를 통치한 최후의 수메르인들이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셈족과 관계없는 수메르인들과 셈족 계열인 아카드인들의 운명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카드 왕국은 사르곤의 우월한 군대가 발길이 닿는 대부분의 도시 국가들을 점령한 기원전 2400년경에 절정을 찍었습니다. 신중했던 니푸르를 아카드인들이 점령하자 불가피한 상황을 인지한 사제단은 패권이 수메르에서 아카드로 넘어갔음을 인정했고, 수메르어를 대체한 셈족의 아카드어는 시간이 흐른 뒤에는 '문어'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아카드인들의 관습은 수메르인들의 관습으로 변형되었고 여러 종교들은 서로 뒤섞이다가 하나로 통합되었습니다.
노예와 농노들의 열악한 상황만 제외한다면 모든 상황이 순탄하게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아카드 제국이 붕괴되면서 지역에 무정부 상태의 암흑기가 도래했고, 이는 기원전 2112년경에 우르 제3왕조가 부상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관개 체계가 허물어졌고 경작지가 방치되었으며 자그로스 산맥의 야만적인 구티족이 수메르를 휩쓸었습니다. 구티족은 문명의 이기에 대한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대부분의 도시 국가에 구티족 출신의 통치자를 세운 이들은 농업, 기록이나 공공 안전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속설에 따르면 이들은 수메르의 가축들을 풀어 자유롭게 노닐도록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수십 년에 걸친 극심한 가뭄으로 곡물 가격이 폭등하면서 지역 전역에 심각한 기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아카드의 수도는 약탈에 능한 야만인들에 의해 아직까지도 그 잔해가 발견되지 않을 정도로 여러 차례에 걸쳐 완벽하게 유린당했습니다. 이러한 대혼란을 틈타 수메르 남부의 여러 도시 국가들은 독립 체제를 되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문제에 대처할 수 없었던 구티족은 철수했고 라가시 왕조는 지역에서 다시 강세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2093년경, 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라가시 왕조는 니푸르의 사제단에 의해 우월성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광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50년이 채 되지 않아 라가시 제2왕조는 우르남무와 그의 아들 슐기가 통치하는 우르 제3왕조로 교체되었습니다. 라가시 다음에 들어선 왕조인 우루크의 우투-헨갈이 구티족의 마지막 왕인 티리간과 나머지 구티인들과 싸워 이김으로써 수메르인들이 힘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왕명표에 따르면 우루크 제5왕조는 우르남무가 승하하면서 불과 7년 후에 급작스럽게 끝이 난 것으로 확인됩니다. 확실한 정황은 없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우르의 반란을 주장하는 반면 남무가 헨갈의 친척이었던 관계로 평화롭게 왕이 되었다는 가설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남무와 그의 아들은 멀게는 북부 메소포타미아까지 아우르는 모든 도시 국가를 정복하고 굴복시킴으로써 '수메르 문예 부흥'에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세련된 문화가 다시 부흥하였고 새로운 석비가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 구티가 떠난 이래로 종교 활동이 다시 시작되었고 농업이 다시 번창했습니다. 그리고 문명의 초석인 세계 최초의 법전, 우르남무 법전이 세워졌습니다. 이 법전에는 일련의 범죄와 정해진 처벌이 명시(대부분은 금전적 형벌이지만 처형을 당하거나 팔다리가 잘려나갈 수도 있었음)되어 있습니다. 또한 남무는 위대한 공업 계획에 착수했고, 부유층에서는 미술 및 문학 사업을 후원했습니다. 건축과 조각 분야의 발전은 특히 괄목할 만했으며 지구라트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매우 진보된 모습을 보여주어 역사학자들은 이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 신-수메르시대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슐기는 그의 걸출한 선친을 능가했으며, 그는 우르에 집중되어 있는 행정 절차를 공식화하기 위한 결정적인 단계를 취했습니다. 현대 문명에도 영향을 미친 관료 체제, 공문서 기록, 세금 체계 및 달력은 그가 표준화 한 것입니다. 그는 영토를 위한 상비군을 구축했고 제대로 기록된 모든 세금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크게 감동받은 사제단에서는 슐기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격화했으며 이는 현대와는 달리 아주 보기 드문 영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손자인 이비신이 왕으로 즉위한 기원전 1963년 무렵에는 수메르의 상황은 좋지 못하게 변하였습니다. 이비신이 재위한 후 처음 20년 동안에는 호전적인 아모리족의 약탈과 침략이 반복되었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의 통솔 능력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엘람은 독립을 선포한 후 상인들의 짐마차와 무방비 상태의 정착지를 약탈하는 행위에 동참하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비신은 우르와 니푸르의 주변 지역을 강화했지만 큰 효과는 거두진 못했습니다.
왕국은 수메르를 방어할 힘이 없어 보였고 비틀거리는 패권에서 벗어나 엘람의 통치를 따르려고 하는 도시 국가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곡물의 가격은 평상시보다 60배가 상승했고 여러 도시 국가에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요한계시록의 4기사가 수메르 전역에 나타났습니다. 수메르가 멸망하기 직전, 이비신에게 남은 곳은 자신의 도시 국가인 우르 밖에 없었습니다. 기원전 1940년에는 엘람의 군대와 자그로스의 '야만' 부족이 우르를 약탈하고 이비신을 생포했습니다. 그는 엘람으로 끌려가 감금되었고 얼마 후에 사망했습니다. 사인에 대한 정보는 따로 기록된 바가 없습니다.
수메르의 찬란했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이들이 처음으로 이룩한 성과는 오랜 세월에도 변함없이 건재합니다. 저명한 수메르 학자인 사무엘 노아 크레이머는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History Begins at Sumer)'라는 책에 이러한 39건의 업적을 나열했습니다.
강 주변의 반건조 지대에서 농사를 짓던 수메르인들은 최초로 용수로, 운하와 저수지를 건설했습니다. 비록 글자를 처음으로 고안하지는 않았지만 수메르인들은 수백 년에 걸쳐 글자를 능숙하게 활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후세가 기억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기록해 두었고, 이러한 기록들을 보관소(최초의 '도서관')에 처음으로 보관한 이들 역시 수메르인들이었으며 서정시, 영웅담, 동물우화, 자서전, 애가 등의 문학 형식을 처음으로 정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쓰기에 능했던 수메르인들은 서면 계약서의 개념 또한 개발했습니다. 누구도 빼갈 수 없도록 이러한 계약서를 보관소에 보관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죠. 이는 '외상' 비용을 처리하는 데 유용했고, 처음에 제시 가격의 일부만 지불하고 나머지 금액을 '빚'으로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은 수메르 경제의 확실한 자극제가 되었지만 판매자에게는 큰 매력이 없었습니다. 또한 누구나 기록을 추적할 수 있도록 숫자를 순서대로 표준화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지불이 정연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일년을 달로, 하루를 표준적인 증가 형식으로 나눈 최초의 민족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이들은 바퀴를 제대로 활용한 최초의 문명이었으며 수레와 쟁기는 물론 전차에까지 바퀴를 장착했습니다. 그래서 교역, 농업, 전쟁에 소비되는 시간이 크게 단축되었습니다. 비록 바퀴를 처음으로 고안한 민족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역사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바퀴를 다양하게 활용할 줄 알았던 민족은 당연이 수메르인들이었고, 아쉬운 점이라면 이들이 보유한 말의 수가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메르인들이 발명한 '최초'의 발명품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하지만 결국 수메르 문명은 적절한 건축 자재가 부족하여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흙벽돌 만으로는 북쪽, 남쪽, 동쪽에서 몰려드는 수많은 야만인들을 막아낼 높고 튼튼한 성벽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는 진정한 '문명의 요람'인 수메르 덕분에 자신들의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야만인 전초기지를 해산시킬 때 일반적인 경험치 외에도 부족 마을 보상을 함께 받습니다. 도시 국가의 유닛 징병에 드는 비용이 절반이 됩니다.
역사적 배경
수메르는 실질적인 왕국이나 제국보다는 공통의 관습을 가지고 가끔씩 중앙 권력의 통치를 받은 도시 국가들의 연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메르는 여전히 세계 최초의 '문명'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왕권(패권)을 부여하기 시작했고 이는 영향력을 갖춘 안정적인 도시 국가의 통치자들이 왕조를 세웠다가 곧 이어 다른 왕조에 의해 무너지는 경우로 이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키시, 라가시, 우르, 우루크, 아다브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3000년 이전에 문어(원시 문자 시대 이전의 표어문자)를 개발하여, 이는 후대 역사학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록,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수메르로 불리게 된 지역의 최초 개화 세력이 우바이드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당시에는 문명의 기준이 높지 않았음). 이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형성된 습지에서 물을 빼냈고 흙벽돌 오두막과 벽을 올렸으며 밭을 관개하고 직조, 가죽, 석조, 도자기와 문자를 고안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북부의 산악 국가에서 포획된 노예들을 이용하기 시작한 이들은 문명 사회의 또 다른 특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이들은 몇 개의 도시를 건설했으며, 대부분의 도시에는 보통 신의 계시를 받는 왕과 여러 장로로 구성된 중앙 행정부가 있는 사원이 도시 한가운데에 배치되었습니다. 이러한 대대적인 도심화를 통해 수메르 문명은 기원전 4000년경에 드디어 연합되었습니다.
신의 계시를 받는 왕이 단순한 독재 군주로 진화하게 된 시기는 기원전 2900년경이었으며, 이때부터 수메르의 '왕조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왕조 시대는 수없이 많은 수메르 왕들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회자됩니다. 여러 왕조가 몇 년 동안 여러 회에 걸쳐 수메르의 왕권을 차지했고, 예로 우루크 왕조는 다섯 차례, 카시 왕조는 세 차례에 걸쳐 수메르를 통치했습니다. 도시 국가 연합에 대한 지배권은 성지 니푸르의 사제단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수메르 왕의 권한은 자신의 도시를 제외하고는 제한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수메르 왕에게는 수메르 전역의 평화를 유지시켜야 할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수메르의 왕들은 아주 유능하지는 못했습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다양한 일부 고서와 기념물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향후 몇백 년의 시간 동안 높은 벽의 구축(길가메시가 자신의 우루크에 높은 벽을 건설한 경우 등)으로 인해 폭력이 증가했고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작은 마을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영향력 있는 도시 국가들이 교역과 방어를 위해 함께 뭉치기 시작했고, 일부 도시 국가들이 무력을 통해 다른 도시 국가 위에 군림하고자 했던 것 역시 필연적이었습니다.
이를 처음 달성한 인물은 라가시 왕조(기원전 2500-2270년)의 에안나툼이었습니다. 그는 사실상 키시, 우루크, 라르사 등을 비롯한 수메르 전체를 합병했으며 라가시 최대의 적수였던 움마를 속국으로 축소시켰습니다. 라가시의 왕들은 공포에 기반한 국가 정책을 활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독수리 석비에는 라가시에 대적한 적들의 끔찍한 최후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종국에는 움마의 왕들이 라가시를 전복시키고 우루크를 정복한 후 이를 자신들의 수도로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토가 페르시아 만부터 지중해까지 닿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움마인들은 아카드의 사르곤 대제가 휩쓸고 들어오기 이전까지 수메르를 통치한 최후의 수메르인들이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셈족과 관계없는 수메르인들과 셈족 계열인 아카드인들의 운명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카드 왕국은 사르곤의 우월한 군대가 발길이 닿는 대부분의 도시 국가들을 점령한 기원전 2400년경에 절정을 찍었습니다. 신중했던 니푸르를 아카드인들이 점령하자 불가피한 상황을 인지한 사제단은 패권이 수메르에서 아카드로 넘어갔음을 인정했고, 수메르어를 대체한 셈족의 아카드어는 시간이 흐른 뒤에는 '문어'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아카드인들의 관습은 수메르인들의 관습으로 변형되었고 여러 종교들은 서로 뒤섞이다가 하나로 통합되었습니다.
노예와 농노들의 열악한 상황만 제외한다면 모든 상황이 순탄하게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아카드 제국이 붕괴되면서 지역에 무정부 상태의 암흑기가 도래했고, 이는 기원전 2112년경에 우르 제3왕조가 부상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관개 체계가 허물어졌고 경작지가 방치되었으며 자그로스 산맥의 야만적인 구티족이 수메르를 휩쓸었습니다. 구티족은 문명의 이기에 대한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대부분의 도시 국가에 구티족 출신의 통치자를 세운 이들은 농업, 기록이나 공공 안전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속설에 따르면 이들은 수메르의 가축들을 풀어 자유롭게 노닐도록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수십 년에 걸친 극심한 가뭄으로 곡물 가격이 폭등하면서 지역 전역에 심각한 기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아카드의 수도는 약탈에 능한 야만인들에 의해 아직까지도 그 잔해가 발견되지 않을 정도로 여러 차례에 걸쳐 완벽하게 유린당했습니다. 이러한 대혼란을 틈타 수메르 남부의 여러 도시 국가들은 독립 체제를 되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문제에 대처할 수 없었던 구티족은 철수했고 라가시 왕조는 지역에서 다시 강세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2093년경, 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라가시 왕조는 니푸르의 사제단에 의해 우월성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광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50년이 채 되지 않아 라가시 제2왕조는 우르남무와 그의 아들 슐기가 통치하는 우르 제3왕조로 교체되었습니다. 라가시 다음에 들어선 왕조인 우루크의 우투-헨갈이 구티족의 마지막 왕인 티리간과 나머지 구티인들과 싸워 이김으로써 수메르인들이 힘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왕명표에 따르면 우루크 제5왕조는 우르남무가 승하하면서 불과 7년 후에 급작스럽게 끝이 난 것으로 확인됩니다. 확실한 정황은 없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우르의 반란을 주장하는 반면 남무가 헨갈의 친척이었던 관계로 평화롭게 왕이 되었다는 가설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남무와 그의 아들은 멀게는 북부 메소포타미아까지 아우르는 모든 도시 국가를 정복하고 굴복시킴으로써 '수메르 문예 부흥'에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세련된 문화가 다시 부흥하였고 새로운 석비가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 구티가 떠난 이래로 종교 활동이 다시 시작되었고 농업이 다시 번창했습니다. 그리고 문명의 초석인 세계 최초의 법전, 우르남무 법전이 세워졌습니다. 이 법전에는 일련의 범죄와 정해진 처벌이 명시(대부분은 금전적 형벌이지만 처형을 당하거나 팔다리가 잘려나갈 수도 있었음)되어 있습니다. 또한 남무는 위대한 공업 계획에 착수했고, 부유층에서는 미술 및 문학 사업을 후원했습니다. 건축과 조각 분야의 발전은 특히 괄목할 만했으며 지구라트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매우 진보된 모습을 보여주어 역사학자들은 이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 신-수메르시대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슐기는 그의 걸출한 선친을 능가했으며, 그는 우르에 집중되어 있는 행정 절차를 공식화하기 위한 결정적인 단계를 취했습니다. 현대 문명에도 영향을 미친 관료 체제, 공문서 기록, 세금 체계 및 달력은 그가 표준화 한 것입니다. 그는 영토를 위한 상비군을 구축했고 제대로 기록된 모든 세금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크게 감동받은 사제단에서는 슐기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격화했으며 이는 현대와는 달리 아주 보기 드문 영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손자인 이비신이 왕으로 즉위한 기원전 1963년 무렵에는 수메르의 상황은 좋지 못하게 변하였습니다. 이비신이 재위한 후 처음 20년 동안에는 호전적인 아모리족의 약탈과 침략이 반복되었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의 통솔 능력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엘람은 독립을 선포한 후 상인들의 짐마차와 무방비 상태의 정착지를 약탈하는 행위에 동참하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비신은 우르와 니푸르의 주변 지역을 강화했지만 큰 효과는 거두진 못했습니다.
왕국은 수메르를 방어할 힘이 없어 보였고 비틀거리는 패권에서 벗어나 엘람의 통치를 따르려고 하는 도시 국가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곡물의 가격은 평상시보다 60배가 상승했고 여러 도시 국가에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요한계시록의 4기사가 수메르 전역에 나타났습니다. 수메르가 멸망하기 직전, 이비신에게 남은 곳은 자신의 도시 국가인 우르 밖에 없었습니다. 기원전 1940년에는 엘람의 군대와 자그로스의 '야만' 부족이 우르를 약탈하고 이비신을 생포했습니다. 그는 엘람으로 끌려가 감금되었고 얼마 후에 사망했습니다. 사인에 대한 정보는 따로 기록된 바가 없습니다.
수메르의 찬란했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이들이 처음으로 이룩한 성과는 오랜 세월에도 변함없이 건재합니다. 저명한 수메르 학자인 사무엘 노아 크레이머는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History Begins at Sumer)'라는 책에 이러한 39건의 업적을 나열했습니다.
강 주변의 반건조 지대에서 농사를 짓던 수메르인들은 최초로 용수로, 운하와 저수지를 건설했습니다. 비록 글자를 처음으로 고안하지는 않았지만 수메르인들은 수백 년에 걸쳐 글자를 능숙하게 활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후세가 기억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기록해 두었고, 이러한 기록들을 보관소(최초의 '도서관')에 처음으로 보관한 이들 역시 수메르인들이었으며 서정시, 영웅담, 동물우화, 자서전, 애가 등의 문학 형식을 처음으로 정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쓰기에 능했던 수메르인들은 서면 계약서의 개념 또한 개발했습니다. 누구도 빼갈 수 없도록 이러한 계약서를 보관소에 보관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죠. 이는 '외상' 비용을 처리하는 데 유용했고, 처음에 제시 가격의 일부만 지불하고 나머지 금액을 '빚'으로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은 수메르 경제의 확실한 자극제가 되었지만 판매자에게는 큰 매력이 없었습니다. 또한 누구나 기록을 추적할 수 있도록 숫자를 순서대로 표준화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지불이 정연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일년을 달로, 하루를 표준적인 증가 형식으로 나눈 최초의 민족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이들은 바퀴를 제대로 활용한 최초의 문명이었으며 수레와 쟁기는 물론 전차에까지 바퀴를 장착했습니다. 그래서 교역, 농업, 전쟁에 소비되는 시간이 크게 단축되었습니다. 비록 바퀴를 처음으로 고안한 민족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역사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바퀴를 다양하게 활용할 줄 알았던 민족은 당연이 수메르인들이었고, 아쉬운 점이라면 이들이 보유한 말의 수가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메르인들이 발명한 '최초'의 발명품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하지만 결국 수메르 문명은 적절한 건축 자재가 부족하여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흙벽돌 만으로는 북쪽, 남쪽, 동쪽에서 몰려드는 수많은 야만인들을 막아낼 높고 튼튼한 성벽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는 진정한 '문명의 요람'인 수메르 덕분에 자신들의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