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도시는 일반적( 인구 기반 보통 허용치 이상) 허용치보다 1개 더 많은 특수지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
비스마르크가 다양한 이들을 상대로 개인의 이익이 다수의 이익보다 중요하다는 내용을 납득시킨 서기 1870년 전까지 '독일'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평화로운' 갈리아에서 라인 강 너머에 위치한 야만인의 땅을 지칭하기 위해 '게르마니아'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독일은 라인 강에서 비슬라 강으로, 발트 해 연안에서 다뉴브 강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언급한 것처럼 갈리아는 호전적이었지만 문명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튜토니인들은 야만적이고 무례하여 정복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습니다. 아마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이 무례한 족속들은 '별개의 독립적인 부족(gentes)과 왕국(regna)'이 되었습니다. 공통 언어(사실 부족 간의 방언은 다른 게르만 족들이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음), 공통 관습과 서로를 죽고 죽이는 공통적인 문화유산 외에는 이들을 연합할 어떠한 방도도 없었습니다.
당시 이들을 잠시나마 하나로 융합할 인물은 800년 12월에 교황 레오 3세가 서쪽의 황제로 즉위시킨 샤를마뉴 밖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이를 확정 지은 사건은 공작 오토 1세를 '독일의 왕'(Rex Teutonicorum)으로 임명하는 936년의 대관식이었습니다. 또한 나중에는 제국의 이양(translatio imperii) 원칙에 따라 교황 요한 12세가 오토 1세를 신성로마황제로 선포하며, 이후에 황제와 교황은 많은 실랑이 끝에 '오토의 특권'에 서명했습니다. 이 내용에 따르면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영적 수장으로 인정되었으므로 고위 성직자가 성경 구절을 원하는 대로 해석할 수 없었으며 독일의 왕 겸 황제가 세속적 보호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오토 1세는 '부족 후령'(독일을 구성하는 강력하고 자주적인 다섯 후령 즉, 프랑코니아, 바이에른, 로타링기아, 작센 및 슈바벤)을 달래고 프랑스인, 마자르인, 이탈리아인과 슬라브인들과 싸우고 각종 반란을 진압하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느라 삶을 거의 즐기지 못했습니다.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항상 수반되는 변화 요인으로 복잡하게 뒤엉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독일의 왕은 1356년에 작성된 황금 문서의 내용에 따라 '일곱 선제후'(세 명의 대주교와 네 명의 독일 왕자)가 선출했습니다. 실제로 독일인들이 여기에 동의하는 데에만 4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전에는 독일의 왕을 선출하는 과정이 의례적인 무정부 상태를 연상시켰습니다. 30년 전쟁 덕분에 개신교와 가톨릭의 균형 유지를 위한 또 다른 유권자가 추가되었으며 1692년에는 교착 상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또 한 명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이 모든 상황을 종식시키기 바로 이전 시점이었던 1803년에는 유권자에 대한 입헌 구조가 개정되었습니다. 왕으로 선출된 이후에는 신성로마황제로의 즉위를 위한 대관식이 그저 당시의 교황에 의해 진행되는 격식에 불과했습니다.
황위를 포기할 수 없었던 색슨, 잘리어, 호헨스타우펜, 벨프, 룩셈부르크, 비텔스바흐와 수많은 합스부르크의 왕 겸 황제가 오토 대제의 뒤를 따랐습니다. 하인리히 4세와 프레드리히 바르바로사와 같은 위대하고 영예로운 황제가 있었던 반면 오토 4세와 루드비히 4세와 같은 부패하고 교만한 황제들도 존재했습니다. 각 황제는 각자의 능력이나 정책과 상관없이 자신의 '권력'과 특권을 질투하는 수백 개의 소왕국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조합이 불안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1040년경에는 프랑코니아가 프랑크푸르트의 도시 국가, 마인츠의 왕자-주교, 슈파이어 및 보름스, 헤센의 백작령을 비롯한 여러 작은 독립체로 분할되었습니다. 1200년대에는 튜턴 기사단이 동쪽에 프로이센을 개척하여 영토를 확장했으며 야망을 가진 독일 귀족들은 보헤미아, 실레지아와 포메라니아를 슬라브인들로부터 취했고, 비슷한 양상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비교적 평화로웠으며 더 중요한 사실은 번영을 누렸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번영의 일부는 한자 동맹 때문입니다. 한자 동맹은 발트 해와 북해 해안을 따라 상업을 지배한 항구와 은행 길드 간의 '상업적 동맹'입니다. 목재, 모피, 광석과 어류가 서쪽으로 수출되었고 완제품은 동쪽으로 유입되었습니다. 1226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칙령에 따라 '제국 자유 도시'가 된 뤼베크 도심에 소재한 이 동맹은 쾰른, 브레멘 및 함부르크 등의 도시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았으며 멀게는 런던과 노브고로드의 항구에서도 창고와 사무실을 운영했습니다. 이 동맹은 1200년대부터 1500년대 초반까지 번창했습니다. 이 무렵에는 독일의 모든 평민들이 유럽에서 가장 높은 생활 수준을 즐겼습니다. 또한 전쟁과 역병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증가했으며 1500년에는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의 수가 5백만에서 6백만 사이에 달했습니다. 이 중 다수는 장인과 상인이 되었으며 각 직군은 길드로 편성되었습니다. 또한 일부 길드에서는 여성의 가입을 허용했습니다.
한편 도시가 성장하고 현금이 넘치기 시작한 덕분에 예술이 꽃을 피웠습니다. 12세기에는 수녀원장이었던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영향력 있는 신학 및 약학 논문은 물론 전례용 시, 노래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덕극을 집필했습니다. 100년 후에는 폰 데어 포겔바이데가 당대 유럽 서정시의 수준을 크게 높였습니다. 이어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라는 마인츠의 사상가가 금속활자와 인쇄기를 고안했습니다. 평민들의 식자율이 올라가고 현인들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문해력이 독일에 보편화되기까지는 2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발전은 개혁, 북유럽 르네상스와 과학 혁명이라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독일은 모든 분야에서 원활한 진보를 보이고 있었지만 마틴 루터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이 사제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인쇄된 성경을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하였으며, 1517년 10월에는 비텐베르크의 만인성자 교회 정문에 그가 쓴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그의 '개신교' 신학은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유럽 최대 규모의 민중 봉기였던 농민전쟁과 더욱 유혈이 낭자했던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조약 이후의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 조약에 의해 루터교가 합법으로 인정되었으며 지역에서 통치자의 신앙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이 무너졌습니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가톨릭 연맹과 신교도 연방의 군대와 상인들이 '비신자'를 제멋대로 학살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광기가 알아서 소멸될 때까지 독일의 인구가 20~38% 정도 감소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틴 루터의 걸출한 면모는 역설적이게도 알브레히트 뒤러 등의 화가와 요하네스 로이힐린과 같은 학자와 파헬벨 등의 음악가는 물론 엘리아스 홀과 한스 크룸퍼를 비롯한 수많은 유명 건축가들과 함께 독일 르네상스의 연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명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은 1600년대와 1700년대를 아우르는 독일의 과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디서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과학의 발견, 이해 및 남용을 위한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비록 공상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가장 유명한 과학자 중 한 명인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잉골슈타트 대학교에서 연구에 몰두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슈투트가르트의 요하네스 케플러는 우주론 분야에 대변혁을 일으켰습니다. 다방면에서 박식했던 폰 라이프니츠는 미적분학을 발견하고 1700년에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했습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윤리학의 과학적 근거를 모색했습니다. 작센의 천문학자 마리아 빙켈만과 프랑크푸르트의 박물학자 마리아 메리안은 다른 독일 여성들도 광기 어린 과학자로 이름을 알릴 수 있도록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또한 인쇄 산업이 성장하여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이들의 마음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독일의 예술가와 과학자들이 문명을 개화하는 동안에도 신성로마제국은 계속해서 휘청거렸습니다. 역사상에서 당시에는 유럽의 봉건제가 사라지고 있었고 부르주아 계급이 부상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좀 더 활동적인 왕조들이 독일의 여러 왕국에서 고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왕조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가, 작센의 벨프 왕가, 헤센의 헤세-카셀 왕가 등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왕가는 합스부르크의 통치 하에서 갈라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1500년경부터 독일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군림해 왔고, 심지어 점차 정통 혈통이 사라지고 바이에른의 카를 7세가 잠시나마(1742-1745) 황제로 재위했을 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이 왕좌를 굳건히 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개혁의 의지가 팽배했고 황제의 반응은 뒤늦었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가 전쟁 비용을 충당하고 그의 아들인 막시밀리언 1세를 독일의 왕으로 즉위시키기 위해 독일 공작들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던 시점에 그는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를 요구하는 연합 전산과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유권자 의회, 그리고 다른 공작들이 왕에게 조언을 제안하고 감독할 수 있는 제국 의회(Reichstag)의 설립을 '요청'했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제1차 제국 의회의 소집을 회피했지만 우유부단하고 우둔한 그의 아들은 결국 보름스 국회를 소집했고, 여기서 왕과 공작들은 제국개혁(Reichsreform)이라 불리는 최초의 4개 법안에 동의했습니다. 이 개혁안에는 분열되고 있는 제국에 '항구적 평화'(독일 귀족 간의 분쟁을 금지)와 공공 시설 지원을 위한 국세인 '커먼 페니히'를 포함한 필수 체계를 제공하는 일련의 법안이 포함되었습니다. 나중에 열린 의회에서는 더 많은 법과 개혁안, 그리고 세금이 추가되었습니다.
1700년대 중반에는 여러 사건들이 독일 왕국이나 신성로마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한 때 늦은 노력보다 앞서 전개되었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다양한 통치자들이 사병과 외교단을 유지했고 이제는 '왕'의 명령이나 행동과는 상관없이 이를 독립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슐레지엔 전쟁과 7년 전쟁에서는 프로이센이 '계몽절대주의'라는 인도 하에 유럽 전역에서 '강대국'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에서는 통치자들이 궁전, 첩과 미술품에 많은 돈을 지출했습니다. 헤세-카셀과 하노버의 백작들은 정예 군사를 용병으로 빌려주는 방식으로 수익을 올렸습니다. 또한 결국에는 하노버의 공작들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으며 고국의 정세에는 관심을 잃었습니다.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 독립 혁명 당시에 잉글랜드의 왕으로 재위했던 조지 3세는 하노버를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통일을 위한 모든 구실과 독일 왕국은 프랑스 혁명과 곧 이어 발발한 나폴레옹 전쟁에 의해 결국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독일의 합병과 세속화는 유혈이 낭자했던 프랑스 혁명이라는 망령에 의해 가속화 되었습니다. 당시 합병이란 한 군주의 영토를 인접한 군주의 영토와 합병하고 합병당한 군주에게 협상된 권한을 남겨주는 과정이었고, 세속화는 주변 귀족들에 의해 방치되고 있는 교회의 수많은 소규모 토지를 흡수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또한 1792년을 기점으로 혁명 프랑스는 대부분의 독일 국가들과 각개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독일 왕국과 신성로마제국은 아우스테를리츠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직후인 1806년 초에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가 퇴위하면서 나폴레옹에 의해 와해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독일 왕국 대부분을 라인 동맹으로 재편성했으며 이는 1815년에 독일 연방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각 도시는 일반적( 인구 기반 보통 허용치 이상) 허용치보다 1개 더 많은 특수지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
비스마르크가 다양한 이들을 상대로 개인의 이익이 다수의 이익보다 중요하다는 내용을 납득시킨 서기 1870년 전까지 '독일'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평화로운' 갈리아에서 라인 강 너머에 위치한 야만인의 땅을 지칭하기 위해 '게르마니아'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독일은 라인 강에서 비슬라 강으로, 발트 해 연안에서 다뉴브 강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언급한 것처럼 갈리아는 호전적이었지만 문명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튜토니인들은 야만적이고 무례하여 정복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습니다. 아마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이 무례한 족속들은 '별개의 독립적인 부족(gentes)과 왕국(regna)'이 되었습니다. 공통 언어(사실 부족 간의 방언은 다른 게르만 족들이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음), 공통 관습과 서로를 죽고 죽이는 공통적인 문화유산 외에는 이들을 연합할 어떠한 방도도 없었습니다.
당시 이들을 잠시나마 하나로 융합할 인물은 800년 12월에 교황 레오 3세가 서쪽의 황제로 즉위시킨 샤를마뉴 밖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이를 확정 지은 사건은 공작 오토 1세를 '독일의 왕'(Rex Teutonicorum)으로 임명하는 936년의 대관식이었습니다. 또한 나중에는 제국의 이양(translatio imperii) 원칙에 따라 교황 요한 12세가 오토 1세를 신성로마황제로 선포하며, 이후에 황제와 교황은 많은 실랑이 끝에 '오토의 특권'에 서명했습니다. 이 내용에 따르면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영적 수장으로 인정되었으므로 고위 성직자가 성경 구절을 원하는 대로 해석할 수 없었으며 독일의 왕 겸 황제가 세속적 보호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오토 1세는 '부족 후령'(독일을 구성하는 강력하고 자주적인 다섯 후령 즉, 프랑코니아, 바이에른, 로타링기아, 작센 및 슈바벤)을 달래고 프랑스인, 마자르인, 이탈리아인과 슬라브인들과 싸우고 각종 반란을 진압하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느라 삶을 거의 즐기지 못했습니다.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항상 수반되는 변화 요인으로 복잡하게 뒤엉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독일의 왕은 1356년에 작성된 황금 문서의 내용에 따라 '일곱 선제후'(세 명의 대주교와 네 명의 독일 왕자)가 선출했습니다. 실제로 독일인들이 여기에 동의하는 데에만 4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전에는 독일의 왕을 선출하는 과정이 의례적인 무정부 상태를 연상시켰습니다. 30년 전쟁 덕분에 개신교와 가톨릭의 균형 유지를 위한 또 다른 유권자가 추가되었으며 1692년에는 교착 상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또 한 명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이 모든 상황을 종식시키기 바로 이전 시점이었던 1803년에는 유권자에 대한 입헌 구조가 개정되었습니다. 왕으로 선출된 이후에는 신성로마황제로의 즉위를 위한 대관식이 그저 당시의 교황에 의해 진행되는 격식에 불과했습니다.
황위를 포기할 수 없었던 색슨, 잘리어, 호헨스타우펜, 벨프, 룩셈부르크, 비텔스바흐와 수많은 합스부르크의 왕 겸 황제가 오토 대제의 뒤를 따랐습니다. 하인리히 4세와 프레드리히 바르바로사와 같은 위대하고 영예로운 황제가 있었던 반면 오토 4세와 루드비히 4세와 같은 부패하고 교만한 황제들도 존재했습니다. 각 황제는 각자의 능력이나 정책과 상관없이 자신의 '권력'과 특권을 질투하는 수백 개의 소왕국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조합이 불안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1040년경에는 프랑코니아가 프랑크푸르트의 도시 국가, 마인츠의 왕자-주교, 슈파이어 및 보름스, 헤센의 백작령을 비롯한 여러 작은 독립체로 분할되었습니다. 1200년대에는 튜턴 기사단이 동쪽에 프로이센을 개척하여 영토를 확장했으며 야망을 가진 독일 귀족들은 보헤미아, 실레지아와 포메라니아를 슬라브인들로부터 취했고, 비슷한 양상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비교적 평화로웠으며 더 중요한 사실은 번영을 누렸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번영의 일부는 한자 동맹 때문입니다. 한자 동맹은 발트 해와 북해 해안을 따라 상업을 지배한 항구와 은행 길드 간의 '상업적 동맹'입니다. 목재, 모피, 광석과 어류가 서쪽으로 수출되었고 완제품은 동쪽으로 유입되었습니다. 1226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칙령에 따라 '제국 자유 도시'가 된 뤼베크 도심에 소재한 이 동맹은 쾰른, 브레멘 및 함부르크 등의 도시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았으며 멀게는 런던과 노브고로드의 항구에서도 창고와 사무실을 운영했습니다. 이 동맹은 1200년대부터 1500년대 초반까지 번창했습니다. 이 무렵에는 독일의 모든 평민들이 유럽에서 가장 높은 생활 수준을 즐겼습니다. 또한 전쟁과 역병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증가했으며 1500년에는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의 수가 5백만에서 6백만 사이에 달했습니다. 이 중 다수는 장인과 상인이 되었으며 각 직군은 길드로 편성되었습니다. 또한 일부 길드에서는 여성의 가입을 허용했습니다.
한편 도시가 성장하고 현금이 넘치기 시작한 덕분에 예술이 꽃을 피웠습니다. 12세기에는 수녀원장이었던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영향력 있는 신학 및 약학 논문은 물론 전례용 시, 노래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덕극을 집필했습니다. 100년 후에는 폰 데어 포겔바이데가 당대 유럽 서정시의 수준을 크게 높였습니다. 이어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라는 마인츠의 사상가가 금속활자와 인쇄기를 고안했습니다. 평민들의 식자율이 올라가고 현인들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문해력이 독일에 보편화되기까지는 2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발전은 개혁, 북유럽 르네상스와 과학 혁명이라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독일은 모든 분야에서 원활한 진보를 보이고 있었지만 마틴 루터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이 사제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인쇄된 성경을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하였으며, 1517년 10월에는 비텐베르크의 만인성자 교회 정문에 그가 쓴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그의 '개신교' 신학은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유럽 최대 규모의 민중 봉기였던 농민전쟁과 더욱 유혈이 낭자했던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조약 이후의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 조약에 의해 루터교가 합법으로 인정되었으며 지역에서 통치자의 신앙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이 무너졌습니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가톨릭 연맹과 신교도 연방의 군대와 상인들이 '비신자'를 제멋대로 학살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광기가 알아서 소멸될 때까지 독일의 인구가 20~38% 정도 감소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틴 루터의 걸출한 면모는 역설적이게도 알브레히트 뒤러 등의 화가와 요하네스 로이힐린과 같은 학자와 파헬벨 등의 음악가는 물론 엘리아스 홀과 한스 크룸퍼를 비롯한 수많은 유명 건축가들과 함께 독일 르네상스의 연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명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은 1600년대와 1700년대를 아우르는 독일의 과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디서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과학의 발견, 이해 및 남용을 위한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비록 공상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가장 유명한 과학자 중 한 명인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잉골슈타트 대학교에서 연구에 몰두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슈투트가르트의 요하네스 케플러는 우주론 분야에 대변혁을 일으켰습니다. 다방면에서 박식했던 폰 라이프니츠는 미적분학을 발견하고 1700년에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했습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윤리학의 과학적 근거를 모색했습니다. 작센의 천문학자 마리아 빙켈만과 프랑크푸르트의 박물학자 마리아 메리안은 다른 독일 여성들도 광기 어린 과학자로 이름을 알릴 수 있도록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또한 인쇄 산업이 성장하여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이들의 마음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독일의 예술가와 과학자들이 문명을 개화하는 동안에도 신성로마제국은 계속해서 휘청거렸습니다. 역사상에서 당시에는 유럽의 봉건제가 사라지고 있었고 부르주아 계급이 부상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좀 더 활동적인 왕조들이 독일의 여러 왕국에서 고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왕조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가, 작센의 벨프 왕가, 헤센의 헤세-카셀 왕가 등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왕가는 합스부르크의 통치 하에서 갈라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1500년경부터 독일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군림해 왔고, 심지어 점차 정통 혈통이 사라지고 바이에른의 카를 7세가 잠시나마(1742-1745) 황제로 재위했을 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이 왕좌를 굳건히 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개혁의 의지가 팽배했고 황제의 반응은 뒤늦었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가 전쟁 비용을 충당하고 그의 아들인 막시밀리언 1세를 독일의 왕으로 즉위시키기 위해 독일 공작들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던 시점에 그는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를 요구하는 연합 전산과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유권자 의회, 그리고 다른 공작들이 왕에게 조언을 제안하고 감독할 수 있는 제국 의회(Reichstag)의 설립을 '요청'했습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제1차 제국 의회의 소집을 회피했지만 우유부단하고 우둔한 그의 아들은 결국 보름스 국회를 소집했고, 여기서 왕과 공작들은 제국개혁(Reichsreform)이라 불리는 최초의 4개 법안에 동의했습니다. 이 개혁안에는 분열되고 있는 제국에 '항구적 평화'(독일 귀족 간의 분쟁을 금지)와 공공 시설 지원을 위한 국세인 '커먼 페니히'를 포함한 필수 체계를 제공하는 일련의 법안이 포함되었습니다. 나중에 열린 의회에서는 더 많은 법과 개혁안, 그리고 세금이 추가되었습니다.
1700년대 중반에는 여러 사건들이 독일 왕국이나 신성로마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한 때 늦은 노력보다 앞서 전개되었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다양한 통치자들이 사병과 외교단을 유지했고 이제는 '왕'의 명령이나 행동과는 상관없이 이를 독립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슐레지엔 전쟁과 7년 전쟁에서는 프로이센이 '계몽절대주의'라는 인도 하에 유럽 전역에서 '강대국'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에서는 통치자들이 궁전, 첩과 미술품에 많은 돈을 지출했습니다. 헤세-카셀과 하노버의 백작들은 정예 군사를 용병으로 빌려주는 방식으로 수익을 올렸습니다. 또한 결국에는 하노버의 공작들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으며 고국의 정세에는 관심을 잃었습니다.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 독립 혁명 당시에 잉글랜드의 왕으로 재위했던 조지 3세는 하노버를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통일을 위한 모든 구실과 독일 왕국은 프랑스 혁명과 곧 이어 발발한 나폴레옹 전쟁에 의해 결국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독일의 합병과 세속화는 유혈이 낭자했던 프랑스 혁명이라는 망령에 의해 가속화 되었습니다. 당시 합병이란 한 군주의 영토를 인접한 군주의 영토와 합병하고 합병당한 군주에게 협상된 권한을 남겨주는 과정이었고, 세속화는 주변 귀족들에 의해 방치되고 있는 교회의 수많은 소규모 토지를 흡수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또한 1792년을 기점으로 혁명 프랑스는 대부분의 독일 국가들과 각개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독일 왕국과 신성로마제국은 아우스테를리츠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직후인 1806년 초에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가 퇴위하면서 나폴레옹에 의해 와해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독일 왕국 대부분을 라인 동맹으로 재편성했으며 이는 1815년에 독일 연방으로 대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