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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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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한국

호주

지도자

비잔틴
특유 능력

탁시스

유닛이 비잔티움 종교로 개종한 성도(비잔티움 성도 포함)마다 전투력 또는 신앙력 +3을 얻습니다. 적 문명이나 도시 국가에 속한 유닛을 처치하면 비잔티움 종교가 인근 도시로 전파됩니다. 성지 특수지구가 있는 도시에서 위대한 선지자 점수 +1을 얻습니다.

역사적 배경
비잔티움 - 비잔틴 제국 - 구 로마제국의 동부를 의미합니다. 그 시대의 주민들은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을 몰랐습니다. 이 용어는 이후의 역사가들이 사용한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도시의 이름입니다(콘스탄티노플은 후에 점령되어 현재 이스탄불이 되었습니다). 동/서의 분할은 근본적인 문화, 언어 및 지중해 내에서의 정치적 분열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후 동방 정교회(동부)와 가톨릭(서부) 사이의 분열을 반영합니다. 비잔티움은 오스만에게 함락당한 1453년까지 로마의 발전과 종교적 영향력의 유산을 계승했으며 동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원전 150년경에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강국이었으나 군사적으로 약했던 그리스와 정복국 로마 사이의 관계는 복잡합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종교, 철학, 학문을 무단 도용했지만, 많은 로마인들은 자신들과 그리스인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전쟁을 좋아하고 팽창주의자였던 반면 그리스인들은 철학과 시를 선호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구분이 존재했습니다. 아드리아해의 한쪽은 라틴계가 차지했고 반대편은 그리스였습니다.

동로마 제국이 달랐던 만큼이나 교역로와의 연결은 동로마 제국에게 중요했으며, 서기 330년에 콘스탄티노플을 로마의 수도로 삼은 것에서 그 중요성이 나타납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수용한 최초의 로마 황제였으며, 지리적 이동과 종교적 변화는 모두 로마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이는 결국 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100년 동안 서로마 제국은 유럽 야만인들의 거듭되는 침략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동로마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고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 교역로들이 페르시아와 인도, 중국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서기 476년에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폐위되었으며 이후 아무도 황제에 오르지 못해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이를 로마의 멸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사실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로마 제국은 이제 콘스탄티노플과 같은 의미를 가졌으며 역사학자들(그리고 우리)이 '비잔틴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그들을 '로마인'이라고 계속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동로마 제국의 문화는 서로마 제국과 현저히 달랐습니다. (비잔틴 제국 국민들은 이집트에서는 콥트어를 사용하고, 근동 지역의 시리아에서는 시리아어를 사용했으며, 그 밖의 언어도 사용되고 있긴 했지만) 동로마 제국에서는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기독교는 서로마 제국에서도 중요했지만, 비잔틴 제국에서는 절대적인 중심이 되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그 국민들에게 세상에 내려온 신의 대리인이었으며 동방 정교회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틴 제국 뒤에 숨은 정신이었다면 유스티니아누스(527~565 통치)는 이를 더욱 강화한 보조 로켓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로켓은 수만 명의 사람이 죽고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황제도 죽을뻔했던 전차 경주 경쟁팀들(각 팀은 정치적인 함축적 의미를 가집니다)의 팬에 의한 폭동에 의해 발사되지 못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전차 경주 팬들보다 심각했던 것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이어받은 전쟁이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은 사산 왕조(페르시아) 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있었던 자리에는 여러 야만인 왕국이 존재했습니다. 로마 지역의 고트족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반달족이 그들입니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는 종종 모순되는 법과 관습이 어지럽게 뒤섞인 제국을 이어받게 됩니다.

이는 벅찬 문제였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는 의회를 임명해 관련법을 검토하고 새로운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와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길고 지리멸렬했던 고트 왕국과의 전쟁에서 로마와 이탈리아반도의 일부를 되찾았습니다.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일부 역사학자들이 5백만 명 가까이 죽었을 것으로 예상하는 전쟁에서 유스티니아누스가 반달 왕국을 황폐화시켰습니다. 유럽 또는 아프리카 역사에 처음 등장했던 선페스트도 큰 원인이었을 수 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에는 제국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번영했으며 로마는 다시 로마인(비잔틴 제국)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는 역사에서 비잔틴 제국의 훌륭한 연장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잔티움이 로마가 보유했던 지중해의 강자 타이틀을 되찾으려고 할 때 새로운 선수가 경기에 뛰어듭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사망하고 약 50년 후에 아랍의 선지자 무하마드가 등장합니다. 새로운 신앙인 이슬람교의 도움을 받은 아랍의 힘은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통일되었던 왕조는 무하마드가 사망한 직후 분열되었으며 옴미아드 왕조와 정통 칼리프국은 비잔틴 제국이 페르시아에게서 빼앗았던 영토와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리아와 이집트 지역을 빠르게 되찾았습니다. 동시에 북유럽에서 온 새로운 침략자인 슬라브족은 비잔틴 제국이 발칸 반도에 보유한 점령지를 위협했습니다.

아랍 군대는 674년에 최초로(마지막은 아닙니다)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습니다. 그들은 근처에 해군 기지를 세우고 이를 활용해 수년간 이 거대한 도시를 침략했습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4세와 도시의 거대한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그렇게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새롭고 강력한 무기를 해군에게 퍼부었습니다. 그것은 기름과 생석회를 섞어서 만들어 물에 떠 있는 배조차 불태울 수 있는 혼합물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그리스 화약'으로 포위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말이죠.

이 당시의 비잔틴 제국은 통탄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침략은 계속되었으며, 서쪽 대부분을 야만인 무리에게 잃었고, 아프리카와 근동 지역의 점령지를 상당 부분 잃어 제국이 상당히 침체되었습니다. 동쪽으로 향하는 교역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기억하십니까? 이 금은 이제 아랍 제국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도시들은 텅텅 비어갔으며 콘스탄티노플은 쇠퇴했습니다. 페르시아 및 아랍 제국과 싸우기 위해 발칸 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킴으로써, 다른 침략으로 인해 중앙아시아 대초원에서 후퇴했던 슬라브족에게 확장할 여유를 주게 됩니다. 이 새로운 슬라브족 정착지는 후에 비잔틴 제국에게 때로는 동맹이었으며 대부분 적이었던 불가리아로 통일됩니다.

이 모든 갈등속에서 새롭게 스페인을 정복해 부유했던 옴미아드 왕조는 다시 이 도시를 차지할 기회를 포착했고 두 번째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을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아랍인들은 승리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이미 불가리아와도 군사 협정을 체결한 야심만만한 장군 레오의 충성심을 확실하게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레오는 자신이 황제라고 천명했지만, 옴미아드 왕조의 종속국이 되기로 합의하는 대신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리스 화약과 기발한 수비 전략을 활용했습니다(예로 전략적 수로 전반을 사슬로 봉쇄했는데 이는 간단하지만, 함선을 막고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그리스 화약을 더 많이 퍼붓기 충분한 방법이었습니다). 레오는 스스로 새로운 로마 왕조를 세웠으며 아랍의 지도자들은 후퇴했습니다. 사실상 이 공성전에서의 패배는 우리 아는 것처럼 동유럽과 러시아의 종교적 및 정치적 모습을 바꾸어놓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까지의 비잔티움 이야기는 쇠락하는 제국의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몇 년 동안은 회복의 시기였습니다. 바실리우스 1세와 바실리우스 2세의 통치 아래 비잔틴 제국은 기병대에 전문적인 타그마 체계와 새로운 혁신을 도입해 군사력을 개선했습니다. 비잔티움 군대는 에게 해 연안 전역에서 아랍(당시에는 아바스조 영토에 편성되어 있었습니다)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바실리우스 2세는 불가리아인들을 예속시키기 위한 잔혹한 군사 작전을 이끌어 1018년에 그 잔류자들을 제국에 흡수시켰습니다. 루시가 볼가강을 약탈해 내려오고 있었으며 노르만족이 지중해를 위협하면서 먼 스칸디나비아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비잔틴 제국에 영향을 미치려 하고 있었습니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이들 무리 중 일부는 비잔틴 제국군에서도 속해 있었습니다.

1100년대에 비잔틴 제국은 마지막 황금기를 맞게 됩니다. 예술과 문학이 번창했고 도시와 국가는 모두 기반 시설의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종교는 비잔티움 주민의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으며 비잔틴 제국 시대에 구 로마와 이전의 서로마 제국에 근거지를 둔 가톨릭과 비잔틴 제국, 그리스, 동로마 제국에 기반을 둔 동방 정교회가 분열되었습니다. 무슬림 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성서의 '우상' 창조 금지에서 유래된 8~9세기의 동방 정교회 기독교는 종교적 인물의 형상인 우상 창조에 반대한 반면, 로마 교황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그리고 이는 756년 비잔티움 로마의 최종 패망의 원인이 되는 긴장감을 발생시킵니다). 이 '우상 파괴'의 물결은 약해졌지만, 로마의 교황이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에 의해 임명되지 않으면서 오래 지속되는 분열을 발생시켰습니다. 이 분립은 1054년에 서로마 제국(가톨릭) 교회가 동로마 제국(동방 정교회)으로부터 분리되면서 확정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논쟁의 대상은 우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교황이 다른 도시의 총대주교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느냐를 비롯한 수많은 의식 및 이론적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분열은 국민(키릴계와 라틴계), 언어(그리스어와 라틴어) 및 관습의 관점에서 동유럽과 서유럽이 갈라지는 징후이자 원인이었습니다.

1204년에 있었던 참혹했던 제4차 십자군에서 이 분열을 가장 확연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1182년에는 동방 정교회보다 가톨릭을 선호하는 이유로 대중들에게 비난을 받았으며, 라틴어를 구사하는 서구 지향적 섭정이었던 안디옥의 마리아 공주의 인기 없는 통치가 끝난 후 안드로니코스 콤네노스라는 찬탈자가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게 됩니다. 마리아가 폐위된 후 동방 정교회 왕권은 가톨릭을 신봉하며 라틴어를 말하는 콘스탄티노플 시민에 대한 대학살을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서쪽에서의 반 비잔틴 여론이 더욱 커졌으며, 수십 년 뒤 십자군은 이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콘스탄티노플을 대신 약탈하고 구 로마에 기반을 둔 가톨릭교 십자군 국가를 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십자군은 자리를 떴고, 동쪽과 서쪽의 분열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다른 세력이 등장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비잔틴 제국과 아랍 통치자들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중앙아시아 민족인 오스만 제국이 자신의 왕국을 위해 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잔틴 제국은 서서히 세력을 잃었고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전설적인 성벽이 오스만의 포격에 쓰러졌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현재 이스탄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유산은 동방 정교회를 통해 러시아, 그리스, 이집트 그리고 동유럽까지 퍼졌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유명한 성벽의 잔해도 남아 있습니다.
PortraitSqu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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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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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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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라
특수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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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속 목조 범선
특수 인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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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드롬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위치: 지중해 동부(현재의 터키 및 그리스)
크기
약 400만 제곱킬로미터
인구
2,600만(최대, 서기 540년경).
수도
콘스탄티노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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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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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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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라
특수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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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속 목조 범선
특수 인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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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드롬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위치: 지중해 동부(현재의 터키 및 그리스)
크기
약 400만 제곱킬로미터
인구
2,600만(최대, 서기 540년경).
수도
콘스탄티노플
특유 능력

탁시스

유닛이 비잔티움 종교로 개종한 성도(비잔티움 성도 포함)마다 전투력 또는 신앙력 +3을 얻습니다. 적 문명이나 도시 국가에 속한 유닛을 처치하면 비잔티움 종교가 인근 도시로 전파됩니다. 성지 특수지구가 있는 도시에서 위대한 선지자 점수 +1을 얻습니다.

역사적 배경
비잔티움 - 비잔틴 제국 - 구 로마제국의 동부를 의미합니다. 그 시대의 주민들은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을 몰랐습니다. 이 용어는 이후의 역사가들이 사용한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도시의 이름입니다(콘스탄티노플은 후에 점령되어 현재 이스탄불이 되었습니다). 동/서의 분할은 근본적인 문화, 언어 및 지중해 내에서의 정치적 분열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후 동방 정교회(동부)와 가톨릭(서부) 사이의 분열을 반영합니다. 비잔티움은 오스만에게 함락당한 1453년까지 로마의 발전과 종교적 영향력의 유산을 계승했으며 동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원전 150년경에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강국이었으나 군사적으로 약했던 그리스와 정복국 로마 사이의 관계는 복잡합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종교, 철학, 학문을 무단 도용했지만, 많은 로마인들은 자신들과 그리스인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전쟁을 좋아하고 팽창주의자였던 반면 그리스인들은 철학과 시를 선호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구분이 존재했습니다. 아드리아해의 한쪽은 라틴계가 차지했고 반대편은 그리스였습니다.

동로마 제국이 달랐던 만큼이나 교역로와의 연결은 동로마 제국에게 중요했으며, 서기 330년에 콘스탄티노플을 로마의 수도로 삼은 것에서 그 중요성이 나타납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수용한 최초의 로마 황제였으며, 지리적 이동과 종교적 변화는 모두 로마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이는 결국 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100년 동안 서로마 제국은 유럽 야만인들의 거듭되는 침략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동로마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고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 교역로들이 페르시아와 인도, 중국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서기 476년에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폐위되었으며 이후 아무도 황제에 오르지 못해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이를 로마의 멸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사실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로마 제국은 이제 콘스탄티노플과 같은 의미를 가졌으며 역사학자들(그리고 우리)이 '비잔틴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그들을 '로마인'이라고 계속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동로마 제국의 문화는 서로마 제국과 현저히 달랐습니다. (비잔틴 제국 국민들은 이집트에서는 콥트어를 사용하고, 근동 지역의 시리아에서는 시리아어를 사용했으며, 그 밖의 언어도 사용되고 있긴 했지만) 동로마 제국에서는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기독교는 서로마 제국에서도 중요했지만, 비잔틴 제국에서는 절대적인 중심이 되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그 국민들에게 세상에 내려온 신의 대리인이었으며 동방 정교회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틴 제국 뒤에 숨은 정신이었다면 유스티니아누스(527~565 통치)는 이를 더욱 강화한 보조 로켓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로켓은 수만 명의 사람이 죽고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황제도 죽을뻔했던 전차 경주 경쟁팀들(각 팀은 정치적인 함축적 의미를 가집니다)의 팬에 의한 폭동에 의해 발사되지 못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전차 경주 팬들보다 심각했던 것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이어받은 전쟁이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은 사산 왕조(페르시아) 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있었던 자리에는 여러 야만인 왕국이 존재했습니다. 로마 지역의 고트족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반달족이 그들입니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는 종종 모순되는 법과 관습이 어지럽게 뒤섞인 제국을 이어받게 됩니다.

이는 벅찬 문제였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는 의회를 임명해 관련법을 검토하고 새로운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와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길고 지리멸렬했던 고트 왕국과의 전쟁에서 로마와 이탈리아반도의 일부를 되찾았습니다.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일부 역사학자들이 5백만 명 가까이 죽었을 것으로 예상하는 전쟁에서 유스티니아누스가 반달 왕국을 황폐화시켰습니다. 유럽 또는 아프리카 역사에 처음 등장했던 선페스트도 큰 원인이었을 수 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에는 제국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번영했으며 로마는 다시 로마인(비잔틴 제국)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는 역사에서 비잔틴 제국의 훌륭한 연장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잔티움이 로마가 보유했던 지중해의 강자 타이틀을 되찾으려고 할 때 새로운 선수가 경기에 뛰어듭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사망하고 약 50년 후에 아랍의 선지자 무하마드가 등장합니다. 새로운 신앙인 이슬람교의 도움을 받은 아랍의 힘은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통일되었던 왕조는 무하마드가 사망한 직후 분열되었으며 옴미아드 왕조와 정통 칼리프국은 비잔틴 제국이 페르시아에게서 빼앗았던 영토와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리아와 이집트 지역을 빠르게 되찾았습니다. 동시에 북유럽에서 온 새로운 침략자인 슬라브족은 비잔틴 제국이 발칸 반도에 보유한 점령지를 위협했습니다.

아랍 군대는 674년에 최초로(마지막은 아닙니다)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습니다. 그들은 근처에 해군 기지를 세우고 이를 활용해 수년간 이 거대한 도시를 침략했습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4세와 도시의 거대한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그렇게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새롭고 강력한 무기를 해군에게 퍼부었습니다. 그것은 기름과 생석회를 섞어서 만들어 물에 떠 있는 배조차 불태울 수 있는 혼합물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그리스 화약'으로 포위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말이죠.

이 당시의 비잔틴 제국은 통탄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침략은 계속되었으며, 서쪽 대부분을 야만인 무리에게 잃었고, 아프리카와 근동 지역의 점령지를 상당 부분 잃어 제국이 상당히 침체되었습니다. 동쪽으로 향하는 교역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기억하십니까? 이 금은 이제 아랍 제국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도시들은 텅텅 비어갔으며 콘스탄티노플은 쇠퇴했습니다. 페르시아 및 아랍 제국과 싸우기 위해 발칸 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킴으로써, 다른 침략으로 인해 중앙아시아 대초원에서 후퇴했던 슬라브족에게 확장할 여유를 주게 됩니다. 이 새로운 슬라브족 정착지는 후에 비잔틴 제국에게 때로는 동맹이었으며 대부분 적이었던 불가리아로 통일됩니다.

이 모든 갈등속에서 새롭게 스페인을 정복해 부유했던 옴미아드 왕조는 다시 이 도시를 차지할 기회를 포착했고 두 번째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을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아랍인들은 승리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이미 불가리아와도 군사 협정을 체결한 야심만만한 장군 레오의 충성심을 확실하게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레오는 자신이 황제라고 천명했지만, 옴미아드 왕조의 종속국이 되기로 합의하는 대신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리스 화약과 기발한 수비 전략을 활용했습니다(예로 전략적 수로 전반을 사슬로 봉쇄했는데 이는 간단하지만, 함선을 막고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그리스 화약을 더 많이 퍼붓기 충분한 방법이었습니다). 레오는 스스로 새로운 로마 왕조를 세웠으며 아랍의 지도자들은 후퇴했습니다. 사실상 이 공성전에서의 패배는 우리 아는 것처럼 동유럽과 러시아의 종교적 및 정치적 모습을 바꾸어놓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까지의 비잔티움 이야기는 쇠락하는 제국의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몇 년 동안은 회복의 시기였습니다. 바실리우스 1세와 바실리우스 2세의 통치 아래 비잔틴 제국은 기병대에 전문적인 타그마 체계와 새로운 혁신을 도입해 군사력을 개선했습니다. 비잔티움 군대는 에게 해 연안 전역에서 아랍(당시에는 아바스조 영토에 편성되어 있었습니다)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바실리우스 2세는 불가리아인들을 예속시키기 위한 잔혹한 군사 작전을 이끌어 1018년에 그 잔류자들을 제국에 흡수시켰습니다. 루시가 볼가강을 약탈해 내려오고 있었으며 노르만족이 지중해를 위협하면서 먼 스칸디나비아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비잔틴 제국에 영향을 미치려 하고 있었습니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이들 무리 중 일부는 비잔틴 제국군에서도 속해 있었습니다.

1100년대에 비잔틴 제국은 마지막 황금기를 맞게 됩니다. 예술과 문학이 번창했고 도시와 국가는 모두 기반 시설의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종교는 비잔티움 주민의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으며 비잔틴 제국 시대에 구 로마와 이전의 서로마 제국에 근거지를 둔 가톨릭과 비잔틴 제국, 그리스, 동로마 제국에 기반을 둔 동방 정교회가 분열되었습니다. 무슬림 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성서의 '우상' 창조 금지에서 유래된 8~9세기의 동방 정교회 기독교는 종교적 인물의 형상인 우상 창조에 반대한 반면, 로마 교황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그리고 이는 756년 비잔티움 로마의 최종 패망의 원인이 되는 긴장감을 발생시킵니다). 이 '우상 파괴'의 물결은 약해졌지만, 로마의 교황이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에 의해 임명되지 않으면서 오래 지속되는 분열을 발생시켰습니다. 이 분립은 1054년에 서로마 제국(가톨릭) 교회가 동로마 제국(동방 정교회)으로부터 분리되면서 확정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논쟁의 대상은 우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교황이 다른 도시의 총대주교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느냐를 비롯한 수많은 의식 및 이론적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분열은 국민(키릴계와 라틴계), 언어(그리스어와 라틴어) 및 관습의 관점에서 동유럽과 서유럽이 갈라지는 징후이자 원인이었습니다.

1204년에 있었던 참혹했던 제4차 십자군에서 이 분열을 가장 확연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1182년에는 동방 정교회보다 가톨릭을 선호하는 이유로 대중들에게 비난을 받았으며, 라틴어를 구사하는 서구 지향적 섭정이었던 안디옥의 마리아 공주의 인기 없는 통치가 끝난 후 안드로니코스 콤네노스라는 찬탈자가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게 됩니다. 마리아가 폐위된 후 동방 정교회 왕권은 가톨릭을 신봉하며 라틴어를 말하는 콘스탄티노플 시민에 대한 대학살을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서쪽에서의 반 비잔틴 여론이 더욱 커졌으며, 수십 년 뒤 십자군은 이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콘스탄티노플을 대신 약탈하고 구 로마에 기반을 둔 가톨릭교 십자군 국가를 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십자군은 자리를 떴고, 동쪽과 서쪽의 분열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다른 세력이 등장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비잔틴 제국과 아랍 통치자들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중앙아시아 민족인 오스만 제국이 자신의 왕국을 위해 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잔틴 제국은 서서히 세력을 잃었고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전설적인 성벽이 오스만의 포격에 쓰러졌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현재 이스탄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유산은 동방 정교회를 통해 러시아, 그리스, 이집트 그리고 동유럽까지 퍼졌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유명한 성벽의 잔해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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