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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폴란드 지형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북부 발트 해에서 남쪽의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펼쳐진 광활한 평원입니다. 폴란드에 불행스럽게도, 이 평원은 서쪽에는 동쪽을 침략하려는 유럽 국가들, 동쪽에는 서양을 침략하려는 아시아 제국들이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폴란드는 그 비옥한 토지와 자원을 천 년 이상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형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는 한때 주변 지역을 호령했던 강대국이기도 하였습니다.
반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미에슈코가 그니에즈노의 요새화된 정착지에 집중되어 있었던 폴라니에 부족을 통치했습니다. 약탈을 일삼는 마자르인들이 당시 크라쿠프 주변에 거주하던 비슬라니에 부족을 위협하자, 그들과 친밀했던 미에슈코는 폴라니 및 비슬라니를 통일하여 피아스트 왕조를 세웠습니다. 보헤미아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이 얘기하는 기독교의 영적, 현실적 이점에 설득당한 미에슈코는 기독교로 개정한 후 966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과거에는 어느 정도의 논란이 있었지만, 현재는 가장 회의적이었던 학자들조차 이 날짜를 폴란드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에슈코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여러 강력하거나 강압적인 군주들은 토속 신앙을 숭배하던 폴란드인들을 조금씩 개종시키고 왕가의 영향력을 확립했으며, 머뭇거리던 폴란드를 더 넓은 유럽 문화로 이끌었습니다. 미에슈코의 아들 볼레스와프는 순수한 폴란드-가톨릭의 기독교 조직을 구축했고 독일의 신성로마황제는 그의 세속적인 권한을 인정했습니다. 이어진 1025년의 대관식을 통해 볼레스와프는 최초의 '폴란드 왕'이 되었습니다.
폴란드는 곧 발트해에서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1100년에 이르러는 역사상의 국경을 어느 정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138년 볼레스와프 3세의 사망은 100여 년 지속된 왕국에 분쟁을 가져왔습니다. 장자 장속제가 없었던 폴란드는 볼레스와프의 여러 아들 간에 분할되었습니다. 이로 인한 분열은 향후 수 세기간 지속적인 내부분쟁과 외부압력을 초래했습니다.
피아스트 계보에 속한 소공작이었던 브와디스와프는 왕국을 다시 통일하는 데 그의 일생을 바친 공로를 인정받아 브와디스와프 1세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폴란드를 지켜내기 위해 이교도였던 리투아니아인들과 몽골인들을 상대로 십자군 원정을 감행했으며 독선적이고 탐욕 많은 튜턴 기사단을 추방하기 위한 전쟁도 불사했습니다. 브와디스와프가 사망하자 아들인 더 유능한 카지미에시 3세가 왕좌에 올랐고, 곧 카지미에시 대왕으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는 영악한 외교술과 짧지만 승리 일색이었던 전쟁을 통해 선친의 유산을 더욱 확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폴란드를 문화, 학문과 교역의 중심지로 만드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했습니다. 카지미에시는 왕국의 영토를 두 배로 늘렸고 국가의 경제 및 법적 체계를 재정비했으며 폴란드 최초의 대학교 설립을 위한 초석을 놓아 주었습니다. 카지미에시의 자유로운 통치 하에 폴란드는 억압받거나 핍박을 받는 이들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독일인들이 여러 도시에 정착했고 아르메니아인들과 슬라브족 난민들은 변방의 저지대로 옮겨갔으며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번영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던 카지미에시 대제는 1370년에 생을 마감했고 이로써 피아스트 왕조도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카지미에시는 조카였던 헝가리의 러요시 1세를 그의 후계자로 임명했습니다. 러요시 1세는 대부분의 시간을 헝가리에서 보냈고, 그가 1382년에 사망하자 고집 센 폴란드의 귀족들은 그의 막내딸 야드비가를 폴란드의 왕으로 선택했습니다. 야드비가와 결혼하고 가톨릭교로 개종한 후 브와디스와프 2세라는 폴란드 이름을 취한 리투아니아의 대공 요가일라 또한 왕이 되었습니다 두 왕은 함께 나라를 통치했는데, 1399년 그녀의 사망으로 폴란드 왕은 다시 평범한 한 명이 되었습니다.
튜턴 기사단과의 참혹한 전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리투아니아인들을 돕고자 했던 브와디스와프 2세는 1401년에 폴란드를 분쟁에 개입시켰습니다. 중세시대에서 가장 맹렬했던 전투 중 하나가 종식된 후인 1410년 7월, 그가 이끄는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그룬발드에서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고 튜턴 기사단은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사살되거나 포획되면서 사실상 박멸되었습니다.
야기에우워 군주들은 이어진 수십 년 동안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튜턴 기사들, 프로이센 공국, 보헤미아 및 헝가리 왕국과 모스크바 대공국, 그리고 남쪽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크림 타타르족 등 야욕에 불타는 인접 동맹국을 상대로 전투에 돌입하여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크림 타타르족의 경우 1474년부터 1569년까지 75회 이상의 급습을 감행했으나, 구제불능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폴란드의 왕들은 왕조 대대로 국경과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전투에서 거둔 수많은 승리보다 더 큰 중요성과 지속적인 영향력을 선사한 것은 야기에우워 왕조의 통치 하에서 이룬 사회적 및 과학적 발전이었습니다. 1505년에는 니힐 노비법이 통과되어 군주가 가지고 있던 입법권의 대부분이 폴란드 귀족들로 구성된 국회로 이양되면서 폴란드는 민주주의를 향해 불안정하지만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특히 보헤미아의 존 후스가 이끌었던 개신교 종교 개혁 운동은 폴란드의 가톨릭교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으며 이는 종교적 관용을 독려하는 법안의 제정으로 이어졌습니다. 르네상스의 이상에 자극을 받은 야기에우워 왕조의 지기스문트 1세와 2세는 폴란드의 예술과 문화를 장려했습니다. 또한, 1543년에는 폴란드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을 중심에 둔 태양계 모형을 주장하는 획기적인 저서가 발행되었습니다.
주변에 팽배한 민족주의, '민주주의'적 원칙과 이질적인 의도에 대한 일부 우려에 자극을 받은 폴란드 국회는 1569년 6월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결성을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란 군주를 선출하되 통치는 지방 의회와 중앙 의회의 귀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연방 국가를 지칭합니다. 자식이 없었던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국왕 지기스문트 2세는 법안에 동의하고 서명했습니다. 이 연방은 안정과 번영의 시대를 가져오고 서양의 문화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서부와 같은 지역에 전파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러시아, 스웨덴, 오스만, 카자크와 여러 까다로운 인접국과의 분쟁에도 자주 휘말리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대북방 전쟁 참전을 비롯한 여러 차례의 전쟁이 발발하고 권력이 약화된 국왕들이 연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나라에는 내부 개혁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18세기 중반, 폴란드 국회는 상업, 군사, 사회 및 교육 개혁을 감행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여기에는 1773년에 설립된 국민교육위원회(Commission of National Education)에 대한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럽 최초로 정부에서 지원한 이 교육 체계 덕분에 모든 평민이 성경을 혼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머지않아 폴란드 평민들은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폴란드에는 성경보다도 흔한 읽을거리들이 있었습니다. 앞선 수백 년 동안에는 여러 고결한 군주의 통치 하에 독특한 폴란드 문화가 발전하여 꽃을 피웠습니다. 크라시츠키 그리고 얀 포토키를 비롯한 폴란드 작가들은 각종 서정 문학과 시를 쏟아냈습니다. 비록 폴란드의 문화는 게르만, 슬라브, 라틴 및 비잔틴 계열의 문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나름의 독특한 성격을 가진 문화, 예술과 춤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폴란드인들이 특히 강한 면모를 보여준 분야는 강력한 음색과 음조, 템포와 조화가 돋보이는 음악이었습니다. 나중에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쇼팽 등의 작곡가들은 앞선 수십 년에 걸쳐 활동한 미엘체프스키, 오긴스키 및 시마노프스카의 위대한 작품들에서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폴란드는 농산물 수출을 통해 부를 축적했습니다. 연방은 유럽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곡물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농업 기술이 확산됨에 따라 폴란드는 과일, 향신료, 청어, 섬유, 목재, 맥주 및 와인의 주요 수출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생산물은 비스와, 부크, 네만 강을 따라 그단스크 등의 발트 해 항구로 운반되어 플랑드르 및 네덜란드로 수송되었습니다. 육상 수송로는 신성로마제국 구석까지 이어졌습니다. 엄청난 부를 정확하게 관리하기 위해 폴란드 국회에서는 1496년에 국가 화폐로 즐로티를 만들었습니다. 폴란드의 마지막 국왕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왕은 재위 기간 도중의 금융 개혁에 이어 즐로티를 표준화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폴란드가 멸망하기 직전에 이루어졌다는 점이 상당히 아이러니합니다.
개혁을 위한 엄청난 공공 지출로 인해 국고는 비었고 이에 따라 군사력은 약화되었으며 귀족들은 자신들의 목숨과 재산을 선뜻 내놓기가 쉽지 않았던 만큼, 폴란드의 주변 국가들의 개입을 막을 방안이 없었습니다. 1772년에는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폴란드 영토 일부를 점령함으로 제1차 폴란드 분할이 이루어졌습니다. 짧았던 폴란드-러시아 전쟁에 이어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제2차 폴란드 분할을 집행했고 폴란드에는 이제 자체적으로 경제와 군사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영토를 잃게 되었습니다. 1795년,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의한 제3차 폴란드 분할로 인해 폴란드의 마지막 남은 영토마저 넘어갔고 독립 폴란드는 사라졌습니다.
마지막 국토 분할에 이어 폴란드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나폴레옹 덕분에 폴란드 대공국이 프랑스 제국의 자유 의존국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폴란드를 다시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는 자유 국가로 복원되었지만 어렵게 얻은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당시 신생국이었던 소비에트 연합과 2년간의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1939년, 폴란드는 이전의 동맹국이었던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에 의해 분할되었습니다. 다시 태어난 폴란드는 철의 장막 뒤에 숨은 공산주의 국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폴란드는 녹슨 철의 장막을 걷어내고 러시아의 통치를 떨쳐 버린 국가 중 하나가 되어 다시 자유를 쟁취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치를 향한 폴란드인들의 의지만큼은 누구도 꺾기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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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폴란드 지형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북부 발트 해에서 남쪽의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펼쳐진 광활한 평원입니다. 폴란드에 불행스럽게도, 이 평원은 서쪽에는 동쪽을 침략하려는 유럽 국가들, 동쪽에는 서양을 침략하려는 아시아 제국들이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폴란드는 그 비옥한 토지와 자원을 천 년 이상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형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는 한때 주변 지역을 호령했던 강대국이기도 하였습니다.
반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미에슈코가 그니에즈노의 요새화된 정착지에 집중되어 있었던 폴라니에 부족을 통치했습니다. 약탈을 일삼는 마자르인들이 당시 크라쿠프 주변에 거주하던 비슬라니에 부족을 위협하자, 그들과 친밀했던 미에슈코는 폴라니 및 비슬라니를 통일하여 피아스트 왕조를 세웠습니다. 보헤미아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이 얘기하는 기독교의 영적, 현실적 이점에 설득당한 미에슈코는 기독교로 개정한 후 966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과거에는 어느 정도의 논란이 있었지만, 현재는 가장 회의적이었던 학자들조차 이 날짜를 폴란드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에슈코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여러 강력하거나 강압적인 군주들은 토속 신앙을 숭배하던 폴란드인들을 조금씩 개종시키고 왕가의 영향력을 확립했으며, 머뭇거리던 폴란드를 더 넓은 유럽 문화로 이끌었습니다. 미에슈코의 아들 볼레스와프는 순수한 폴란드-가톨릭의 기독교 조직을 구축했고 독일의 신성로마황제는 그의 세속적인 권한을 인정했습니다. 이어진 1025년의 대관식을 통해 볼레스와프는 최초의 '폴란드 왕'이 되었습니다.
폴란드는 곧 발트해에서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1100년에 이르러는 역사상의 국경을 어느 정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138년 볼레스와프 3세의 사망은 100여 년 지속된 왕국에 분쟁을 가져왔습니다. 장자 장속제가 없었던 폴란드는 볼레스와프의 여러 아들 간에 분할되었습니다. 이로 인한 분열은 향후 수 세기간 지속적인 내부분쟁과 외부압력을 초래했습니다.
피아스트 계보에 속한 소공작이었던 브와디스와프는 왕국을 다시 통일하는 데 그의 일생을 바친 공로를 인정받아 브와디스와프 1세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폴란드를 지켜내기 위해 이교도였던 리투아니아인들과 몽골인들을 상대로 십자군 원정을 감행했으며 독선적이고 탐욕 많은 튜턴 기사단을 추방하기 위한 전쟁도 불사했습니다. 브와디스와프가 사망하자 아들인 더 유능한 카지미에시 3세가 왕좌에 올랐고, 곧 카지미에시 대왕으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는 영악한 외교술과 짧지만 승리 일색이었던 전쟁을 통해 선친의 유산을 더욱 확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폴란드를 문화, 학문과 교역의 중심지로 만드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했습니다. 카지미에시는 왕국의 영토를 두 배로 늘렸고 국가의 경제 및 법적 체계를 재정비했으며 폴란드 최초의 대학교 설립을 위한 초석을 놓아 주었습니다. 카지미에시의 자유로운 통치 하에 폴란드는 억압받거나 핍박을 받는 이들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독일인들이 여러 도시에 정착했고 아르메니아인들과 슬라브족 난민들은 변방의 저지대로 옮겨갔으며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번영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던 카지미에시 대제는 1370년에 생을 마감했고 이로써 피아스트 왕조도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카지미에시는 조카였던 헝가리의 러요시 1세를 그의 후계자로 임명했습니다. 러요시 1세는 대부분의 시간을 헝가리에서 보냈고, 그가 1382년에 사망하자 고집 센 폴란드의 귀족들은 그의 막내딸 야드비가를 폴란드의 왕으로 선택했습니다. 야드비가와 결혼하고 가톨릭교로 개종한 후 브와디스와프 2세라는 폴란드 이름을 취한 리투아니아의 대공 요가일라 또한 왕이 되었습니다 두 왕은 함께 나라를 통치했는데, 1399년 그녀의 사망으로 폴란드 왕은 다시 평범한 한 명이 되었습니다.
튜턴 기사단과의 참혹한 전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리투아니아인들을 돕고자 했던 브와디스와프 2세는 1401년에 폴란드를 분쟁에 개입시켰습니다. 중세시대에서 가장 맹렬했던 전투 중 하나가 종식된 후인 1410년 7월, 그가 이끄는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군은 그룬발드에서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고 튜턴 기사단은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사살되거나 포획되면서 사실상 박멸되었습니다.
야기에우워 군주들은 이어진 수십 년 동안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튜턴 기사들, 프로이센 공국, 보헤미아 및 헝가리 왕국과 모스크바 대공국, 그리고 남쪽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크림 타타르족 등 야욕에 불타는 인접 동맹국을 상대로 전투에 돌입하여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크림 타타르족의 경우 1474년부터 1569년까지 75회 이상의 급습을 감행했으나, 구제불능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폴란드의 왕들은 왕조 대대로 국경과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전투에서 거둔 수많은 승리보다 더 큰 중요성과 지속적인 영향력을 선사한 것은 야기에우워 왕조의 통치 하에서 이룬 사회적 및 과학적 발전이었습니다. 1505년에는 니힐 노비법이 통과되어 군주가 가지고 있던 입법권의 대부분이 폴란드 귀족들로 구성된 국회로 이양되면서 폴란드는 민주주의를 향해 불안정하지만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특히 보헤미아의 존 후스가 이끌었던 개신교 종교 개혁 운동은 폴란드의 가톨릭교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으며 이는 종교적 관용을 독려하는 법안의 제정으로 이어졌습니다. 르네상스의 이상에 자극을 받은 야기에우워 왕조의 지기스문트 1세와 2세는 폴란드의 예술과 문화를 장려했습니다. 또한, 1543년에는 폴란드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을 중심에 둔 태양계 모형을 주장하는 획기적인 저서가 발행되었습니다.
주변에 팽배한 민족주의, '민주주의'적 원칙과 이질적인 의도에 대한 일부 우려에 자극을 받은 폴란드 국회는 1569년 6월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결성을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란 군주를 선출하되 통치는 지방 의회와 중앙 의회의 귀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연방 국가를 지칭합니다. 자식이 없었던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국왕 지기스문트 2세는 법안에 동의하고 서명했습니다. 이 연방은 안정과 번영의 시대를 가져오고 서양의 문화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서부와 같은 지역에 전파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러시아, 스웨덴, 오스만, 카자크와 여러 까다로운 인접국과의 분쟁에도 자주 휘말리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대북방 전쟁 참전을 비롯한 여러 차례의 전쟁이 발발하고 권력이 약화된 국왕들이 연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나라에는 내부 개혁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18세기 중반, 폴란드 국회는 상업, 군사, 사회 및 교육 개혁을 감행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여기에는 1773년에 설립된 국민교육위원회(Commission of National Education)에 대한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럽 최초로 정부에서 지원한 이 교육 체계 덕분에 모든 평민이 성경을 혼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머지않아 폴란드 평민들은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폴란드에는 성경보다도 흔한 읽을거리들이 있었습니다. 앞선 수백 년 동안에는 여러 고결한 군주의 통치 하에 독특한 폴란드 문화가 발전하여 꽃을 피웠습니다. 크라시츠키 그리고 얀 포토키를 비롯한 폴란드 작가들은 각종 서정 문학과 시를 쏟아냈습니다. 비록 폴란드의 문화는 게르만, 슬라브, 라틴 및 비잔틴 계열의 문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나름의 독특한 성격을 가진 문화, 예술과 춤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폴란드인들이 특히 강한 면모를 보여준 분야는 강력한 음색과 음조, 템포와 조화가 돋보이는 음악이었습니다. 나중에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쇼팽 등의 작곡가들은 앞선 수십 년에 걸쳐 활동한 미엘체프스키, 오긴스키 및 시마노프스카의 위대한 작품들에서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폴란드는 농산물 수출을 통해 부를 축적했습니다. 연방은 유럽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곡물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농업 기술이 확산됨에 따라 폴란드는 과일, 향신료, 청어, 섬유, 목재, 맥주 및 와인의 주요 수출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생산물은 비스와, 부크, 네만 강을 따라 그단스크 등의 발트 해 항구로 운반되어 플랑드르 및 네덜란드로 수송되었습니다. 육상 수송로는 신성로마제국 구석까지 이어졌습니다. 엄청난 부를 정확하게 관리하기 위해 폴란드 국회에서는 1496년에 국가 화폐로 즐로티를 만들었습니다. 폴란드의 마지막 국왕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왕은 재위 기간 도중의 금융 개혁에 이어 즐로티를 표준화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폴란드가 멸망하기 직전에 이루어졌다는 점이 상당히 아이러니합니다.
개혁을 위한 엄청난 공공 지출로 인해 국고는 비었고 이에 따라 군사력은 약화되었으며 귀족들은 자신들의 목숨과 재산을 선뜻 내놓기가 쉽지 않았던 만큼, 폴란드의 주변 국가들의 개입을 막을 방안이 없었습니다. 1772년에는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폴란드 영토 일부를 점령함으로 제1차 폴란드 분할이 이루어졌습니다. 짧았던 폴란드-러시아 전쟁에 이어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제2차 폴란드 분할을 집행했고 폴란드에는 이제 자체적으로 경제와 군사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영토를 잃게 되었습니다. 1795년,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의한 제3차 폴란드 분할로 인해 폴란드의 마지막 남은 영토마저 넘어갔고 독립 폴란드는 사라졌습니다.
마지막 국토 분할에 이어 폴란드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나폴레옹 덕분에 폴란드 대공국이 프랑스 제국의 자유 의존국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폴란드를 다시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는 자유 국가로 복원되었지만 어렵게 얻은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당시 신생국이었던 소비에트 연합과 2년간의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1939년, 폴란드는 이전의 동맹국이었던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에 의해 분할되었습니다. 다시 태어난 폴란드는 철의 장막 뒤에 숨은 공산주의 국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폴란드는 녹슨 철의 장막을 걷어내고 러시아의 통치를 떨쳐 버린 국가 중 하나가 되어 다시 자유를 쟁취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치를 향한 폴란드인들의 의지만큼은 누구도 꺾기 쉽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