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르네상스 및 산업 시대 불가사의 건설에 대해 생산력 +20%를 제공합니다. 모든 시대의 불가사의 관광 생산량이 100% 증가합니다.
역사적 배경
프랑스는 고급 요리, 오트쿠튀르, 카운터 테너와 수많은 상류 문화를 문명에 선사했습니다. 하지만 문화가 프랑스인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들은 백년 전쟁에서 공포 정치 및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시도와 같은 사건 또한 세계사에 선사해 주었습니다.
로마인들이 까다로운 갈리아인들에 대한 통치를 포기한 이후인 암흑시대 초반에는 여러 곳의 프랑크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이러한 왕국들은 두 세대의 시간이 지나자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샤를마뉴 제국 서쪽에 위치한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마침내 프랑스의 중세 왕국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카롤링거의 마지막 왕이 사망하자 랭스의 대주교는 왕족 간의 내란으로 인한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프란치아의 대영주들을 소집하여 새로운 통치자를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결국에는 일드 프랑스 직영지의 공작 위그 카페가 왕으로 선출되었으며 서기 987년 7월에 랭스의 고위 성직자에 의해 프랑크의 왕(Rex Francorum)으로 즉위했습니다. 순식간에 근대의 프랑스가 형성되었습니다. 비록 몇 차례의 중단 기간은 있었지만 1848년까지 군림하여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카페 왕조가 장기간에 걸쳐 군림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기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카페 가문의 왕들은 비록 독실함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모두가 가톨릭이었고, 따라서 프랑스에 강력한 중앙 정부가 집권하는 것을 선호한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완고한 잉글랜드를 제외한 다른 군주들은 카페 왕조를 걸출하고 전통 있는 왕가로 인정하게 되어서, 카페 왕조는 본질적으로 다른 군주에 비해 우월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카페 왕족들은 상당히 화목한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왕위 계승 시점에도 그랬습니다. 전통적으로 왕의 남동생들에게는 장자 상속제로 인해 발생될 수 있는 울분을 달랠 수 있도록 속지(공작 영지, 카운티, 도시 등)를 제공했습니다. 물론 여형제에게는 별다른 혜택이 없었으며 왕위 계승 이후에는 최대한 빨리 결혼해야 했지만, 프랑스는 가톨릭과 위그노 교도 간의 종교 분쟁을 제외하고는 인접 국가에 확산되었던 내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카페 왕조의 통치 하에 예술과 공예는 물론 종교(가톨릭교)와 교육 분야까지 꽃을 피웠고 1150년경에는 파리대학교(소르본 대학교)가 설립되며 카페 왕조는 평민들의 전반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향후 200년에 걸쳐 카페 왕조의 힘과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졌습니다. 하지만 성지 해방을 위한 여러 차례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거나, 이탈리아 도시 국가 간의 분쟁에 개입하거나, 프랑스의 이교도 운동을 억압하여 유혈 사태를 초래하거나, 1312년에 성전 기사단을 학살하여 그들의 부를 취하는 등의 과오도 있었지만, 가장 큰 과오라면 116년에 걸쳐 지속된 백년 전쟁을 꼽을 수 있습니다.
유럽이 14세기에 접어들면서 프랑스는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로 자리잡았고 1328년에는 필립 6세가 왕좌를 차지했습니다. 영국의 왕들인 플랜태저넷가 일가가 아키텐을 소유하고 프랑스 왕좌에 대한 욕심을 살짝 비췄지만 필립 6세가 왕위를 계승한 시점에는 압박을 넣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337년에 필립 6세가 아키텐을 몰수하고 이에 분노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그의 통치권을 재천명하면서 두 왕조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435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침략했고 장시간의 행군 끝에 크레시에서의 유명한 전투에서 오만한 프랑스 기사들을 학살하여 승리를 거둔 후 칼레 항구를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흑사병이 창궐하여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추가적인 군사 작전은 지연되며, 이는 새로운 세대의 귀족들에게 성가신 일이 되었습니다.
1356년에 역병이 가라앉자 또 다시 유혈 사태가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해 9월에는 푸아티에에서 흑태자 에드워드 왕자와 교전하던 프랑스 왕이 사로잡히고 그를 보좌하던 귀족들이 대부분 목숨을 잃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왕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장 2세는 포로 상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전쟁은 장기전 양상을 뛰다가 아쟁쿠르에서 프랑스가 또 한 번 학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420년에 체결된 트루아 조약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권을 통합하여 당시 미성년자였던 잉글랜드의 왕 헨리 6세를 즉위시키도록 선포하였지만, 모두가 이 조약에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황태자 샤를 7세는 사생아라는 이유로 무시되었지만 프랑스의 수많은 애국자들은 잉글랜드의 어떤 통치자보다도 프랑스인을 왕으로 원했습니다. 이 중에는 '잔'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금 '괴상한' 여성 농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 소녀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환영을 경험했다고 하는 걸 보면 '괴상한' 정도를 넘어섰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잔 다르크는 프랑스인들을 고무시켜 승리로 이끌었으며 잉글랜드인들을 전선으로 다시 몰아내었습니다. 샤를은 1429년에 왕위에 올랐고 성녀 잔 다르크는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건은 카페 왕조의 방계 가문인 발루아 왕가가 프랑스의 왕좌를 차지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후대의 카페 왕족은 이전 왕족에 비해 더 많은 권력과 영향력을 지녔습니다. 필리프 1세(사랑에 빠진 왕, 1060-1108년)는 파리의 남작들을 다스리기 힘들어했던 반면 카페 왕조의 또 다른 방계 가문인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1589-1108년)는 교황과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황제 모두에게 대적하는 대범함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왕들은 대부분 통치 기간이 짧은 편이었지만 문명에 미친 영향력은 선대의 어떤 왕들보다도 컸습니다.
루이 일가(공정했던 루이 13세, 태양왕 루이 14세, 많은 이들이 사랑했던 루이 15세,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비운의 루이 16세)의 찬란했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는 대륙 최고의 강대국이자 유럽 문화와 교양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루이 13세의 재위 시절에는 프랑스가 식민지 경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탐험가와 식민주의자들이 북아프리카,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로 넘어가 프랑스의 문화를 강요했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태양왕 루이 14세의 집권 기간에는 베르사이유 궁전이 거의 완공되었고 봉건제의 마지막 남은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단, 과거의 농노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죠. 튀렌느와 보방과 같은 훌륭한 장군, 몰리에르와 라신을 비롯한 위대한 작가들과 다른 예술 분야의 재능 있는 인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은 루이 16세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덕분에 예술, 특히 건축과 내부 디자인(값비싼 루이 15세풍의 작품 등) 분야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프랑스는 두 세대의 시간을 거치며 우중충했던 고딕 양식에서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전환했습니다. 하지만 앙시앙 레짐(프랑스 혁명 전의 구제도)은 1789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빈부격차의 차이에 괴로워하던 파리의 시민들은 7월에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몰려가 군주제라는 족쇄를 끊어 버렸습니다. 공화주의를 위한 계획이 시작되었고 혁명의 함성이 온 땅을 뒤덮었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관념과 로베스피에르, 당통과 마라를 비롯한 참신한 젊은이들에 고무된 이들은 '인도적인' 단두대를 사용하여 특권층에 속해 있던 수천 명의 귀족과 공안위원회와 대립하는 모든 이들을 처형함으로써 공포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1793년 6월의 헌법에 따라 프랑스 제1공화국이 세워졌고 헌법을 수립한 대부분의 작성자들은 나중에 구금되거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유럽의 나머지 군주들은 이러한 자유주의가 활개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으며 머지 않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스페인 등으로 구성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프랑스를 공격했습니다.
1795년에는 선거로 선출된 다섯 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총재 정부가 들어섰지만 큰 성과는 없었습니다. 공화국을 위한 전투에서 성공을 거두며 힘을 모은 코르시카 출신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9년 11월의 쿠데타를 통해 총재 정부를 혁파하고 프랑스 제1제국을 세웠습니다. 향후 15년에 걸쳐 프랑스는 6개국으로 이루어진 연합군과의 연속적인 전투에 돌입했으며 대부분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마주한 연합군의 수적 우위는 압도적이었습니다. 이베리아와 러시아의 변방에서 프랑스는 수천 명의 병력을 잃었고 완강한 영국군이 바다를 장악했습니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루이지애나를 신생국인 미국에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역사적인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에 이어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은 라이프치히에서 프랑스 대육군을 무찌르고 1814년 3월에 파리에 입성했으며 나폴레옹을 엘바 섬으로 유배 보내고 부르봉 왕가를 다시 왕위에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보나파르트는 프랑스로 복귀하여 또 다른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통풍을 앓고 있던 루이 18세는 정신을 차리고 파리에서 도주한 후 네덜란드로 피난했습니다. 유럽의 군주들은 또 다른 동맹을 결성해야 했으며 100일 간의 충돌 끝에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를 괴멸시켰고, 나폴레옹은 다시 섬 감옥으로 유배되었고 여기서 1821년에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프랑스는 다시 왕정으로 돌아왔지만 1848년에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나며, 최초 혁명에 비해 조직력이 크게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혁명군은 카페 왕조를 완전히 몰아내고 제2공화정을 세웠습니다. 3년 동안 지속된 제2공화정은 루이 나폴레옹이 백부의 발자취를 따라 자유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제2 프랑스 제국을 건립하면서 와해되었습니다.
하지만 제2제국 역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 당시 스당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사에 사로잡히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의회를 점령하고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바보가 아니었던 대표들은 제3공화정을 세웠습니다. 여제는 잉글랜드로 도주했고 프랑스에서 다시 한 번 공화주의가 활개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가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프로이센은 알자스로렌을 차지하고 독일을 통일했지만 이는 별개의 이야기 입니다.
제3공화정은 모든 면에서 볼 때 수완이 뛰어났습니다. 우선 영국, 러시아 및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했고 엉망이 된 해외의 식민지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강화했습니다. 타락한 파리는 전 세계인에게 악마의 유혹처럼 다가왔습니다. 관광객들은 불에 매혹된 나방들처럼 물랑 루즈, 레프트 뱅크, 크레이지 호스 살롱과 발 뷜리에로 모여들었고, 아방가르드 예술이 꽃을 피웠고 벨 에포크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패션, 음식과 유행의 기준을 높였으며, 심지어는 또 다시 정부를 갈아엎지 않고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에 나라는 황폐화되었고 시민들은 궁핍해져만 갔습니다.
실제로 제3공화정은 194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비시 정부는 독일 제3제국의 관심이 전혀 없었던 프랑스 지역을 차지한 후 제3공화정을 접수했고, 4년의 혹독한 시간이 흐른 1944년 여름 및 가을, 프랑스의 대도시는 드골이 주장한 '자유 프랑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에 의해 해방되었습니다. 1945년에는 독일이 패배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제4공화정이라는 또 다른 정부가 세워졌고 1964년에 새로운 헌법이 도입되었습니다.
또 다른 제4공화정이 붕괴하게 된 계기는 1958년의 알제리 사태였습니다. 세계대전으로 큰 충격을 입은 프랑스의 지도자들은 썩어가는 식민지 제국에 대한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출혈을 감수했습니다. 1956년의 수에즈 위기는 프랑스에 또 다른 재난을 안겼습니다. 1958년 5월, 국회는 드골에게 정권을 다시 내어주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제4공화정을 없애고 '위대함의 정치'를 토대로 제5공화정을 세운 후 프랑스의 본질에 필요한 것은 위대함이라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중세, 르네상스 및 산업 시대 불가사의 건설에 대해 생산력 +20%를 제공합니다. 모든 시대의 불가사의 관광 생산량이 100% 증가합니다.
역사적 배경
프랑스는 고급 요리, 오트쿠튀르, 카운터 테너와 수많은 상류 문화를 문명에 선사했습니다. 하지만 문화가 프랑스인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들은 백년 전쟁에서 공포 정치 및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시도와 같은 사건 또한 세계사에 선사해 주었습니다.
로마인들이 까다로운 갈리아인들에 대한 통치를 포기한 이후인 암흑시대 초반에는 여러 곳의 프랑크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이러한 왕국들은 두 세대의 시간이 지나자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샤를마뉴 제국 서쪽에 위치한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마침내 프랑스의 중세 왕국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카롤링거의 마지막 왕이 사망하자 랭스의 대주교는 왕족 간의 내란으로 인한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프란치아의 대영주들을 소집하여 새로운 통치자를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결국에는 일드 프랑스 직영지의 공작 위그 카페가 왕으로 선출되었으며 서기 987년 7월에 랭스의 고위 성직자에 의해 프랑크의 왕(Rex Francorum)으로 즉위했습니다. 순식간에 근대의 프랑스가 형성되었습니다. 비록 몇 차례의 중단 기간은 있었지만 1848년까지 군림하여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카페 왕조가 장기간에 걸쳐 군림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기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카페 가문의 왕들은 비록 독실함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모두가 가톨릭이었고, 따라서 프랑스에 강력한 중앙 정부가 집권하는 것을 선호한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완고한 잉글랜드를 제외한 다른 군주들은 카페 왕조를 걸출하고 전통 있는 왕가로 인정하게 되어서, 카페 왕조는 본질적으로 다른 군주에 비해 우월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카페 왕족들은 상당히 화목한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왕위 계승 시점에도 그랬습니다. 전통적으로 왕의 남동생들에게는 장자 상속제로 인해 발생될 수 있는 울분을 달랠 수 있도록 속지(공작 영지, 카운티, 도시 등)를 제공했습니다. 물론 여형제에게는 별다른 혜택이 없었으며 왕위 계승 이후에는 최대한 빨리 결혼해야 했지만, 프랑스는 가톨릭과 위그노 교도 간의 종교 분쟁을 제외하고는 인접 국가에 확산되었던 내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카페 왕조의 통치 하에 예술과 공예는 물론 종교(가톨릭교)와 교육 분야까지 꽃을 피웠고 1150년경에는 파리대학교(소르본 대학교)가 설립되며 카페 왕조는 평민들의 전반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향후 200년에 걸쳐 카페 왕조의 힘과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졌습니다. 하지만 성지 해방을 위한 여러 차례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거나, 이탈리아 도시 국가 간의 분쟁에 개입하거나, 프랑스의 이교도 운동을 억압하여 유혈 사태를 초래하거나, 1312년에 성전 기사단을 학살하여 그들의 부를 취하는 등의 과오도 있었지만, 가장 큰 과오라면 116년에 걸쳐 지속된 백년 전쟁을 꼽을 수 있습니다.
유럽이 14세기에 접어들면서 프랑스는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로 자리잡았고 1328년에는 필립 6세가 왕좌를 차지했습니다. 영국의 왕들인 플랜태저넷가 일가가 아키텐을 소유하고 프랑스 왕좌에 대한 욕심을 살짝 비췄지만 필립 6세가 왕위를 계승한 시점에는 압박을 넣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337년에 필립 6세가 아키텐을 몰수하고 이에 분노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그의 통치권을 재천명하면서 두 왕조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435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침략했고 장시간의 행군 끝에 크레시에서의 유명한 전투에서 오만한 프랑스 기사들을 학살하여 승리를 거둔 후 칼레 항구를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흑사병이 창궐하여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추가적인 군사 작전은 지연되며, 이는 새로운 세대의 귀족들에게 성가신 일이 되었습니다.
1356년에 역병이 가라앉자 또 다시 유혈 사태가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해 9월에는 푸아티에에서 흑태자 에드워드 왕자와 교전하던 프랑스 왕이 사로잡히고 그를 보좌하던 귀족들이 대부분 목숨을 잃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왕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장 2세는 포로 상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전쟁은 장기전 양상을 뛰다가 아쟁쿠르에서 프랑스가 또 한 번 학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420년에 체결된 트루아 조약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권을 통합하여 당시 미성년자였던 잉글랜드의 왕 헨리 6세를 즉위시키도록 선포하였지만, 모두가 이 조약에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황태자 샤를 7세는 사생아라는 이유로 무시되었지만 프랑스의 수많은 애국자들은 잉글랜드의 어떤 통치자보다도 프랑스인을 왕으로 원했습니다. 이 중에는 '잔'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금 '괴상한' 여성 농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 소녀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환영을 경험했다고 하는 걸 보면 '괴상한' 정도를 넘어섰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잔 다르크는 프랑스인들을 고무시켜 승리로 이끌었으며 잉글랜드인들을 전선으로 다시 몰아내었습니다. 샤를은 1429년에 왕위에 올랐고 성녀 잔 다르크는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건은 카페 왕조의 방계 가문인 발루아 왕가가 프랑스의 왕좌를 차지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후대의 카페 왕족은 이전 왕족에 비해 더 많은 권력과 영향력을 지녔습니다. 필리프 1세(사랑에 빠진 왕, 1060-1108년)는 파리의 남작들을 다스리기 힘들어했던 반면 카페 왕조의 또 다른 방계 가문인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1589-1108년)는 교황과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황제 모두에게 대적하는 대범함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왕들은 대부분 통치 기간이 짧은 편이었지만 문명에 미친 영향력은 선대의 어떤 왕들보다도 컸습니다.
루이 일가(공정했던 루이 13세, 태양왕 루이 14세, 많은 이들이 사랑했던 루이 15세,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비운의 루이 16세)의 찬란했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는 대륙 최고의 강대국이자 유럽 문화와 교양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루이 13세의 재위 시절에는 프랑스가 식민지 경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탐험가와 식민주의자들이 북아프리카,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로 넘어가 프랑스의 문화를 강요했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태양왕 루이 14세의 집권 기간에는 베르사이유 궁전이 거의 완공되었고 봉건제의 마지막 남은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단, 과거의 농노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죠. 튀렌느와 보방과 같은 훌륭한 장군, 몰리에르와 라신을 비롯한 위대한 작가들과 다른 예술 분야의 재능 있는 인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은 루이 16세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덕분에 예술, 특히 건축과 내부 디자인(값비싼 루이 15세풍의 작품 등) 분야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프랑스는 두 세대의 시간을 거치며 우중충했던 고딕 양식에서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전환했습니다. 하지만 앙시앙 레짐(프랑스 혁명 전의 구제도)은 1789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빈부격차의 차이에 괴로워하던 파리의 시민들은 7월에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몰려가 군주제라는 족쇄를 끊어 버렸습니다. 공화주의를 위한 계획이 시작되었고 혁명의 함성이 온 땅을 뒤덮었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관념과 로베스피에르, 당통과 마라를 비롯한 참신한 젊은이들에 고무된 이들은 '인도적인' 단두대를 사용하여 특권층에 속해 있던 수천 명의 귀족과 공안위원회와 대립하는 모든 이들을 처형함으로써 공포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1793년 6월의 헌법에 따라 프랑스 제1공화국이 세워졌고 헌법을 수립한 대부분의 작성자들은 나중에 구금되거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유럽의 나머지 군주들은 이러한 자유주의가 활개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으며 머지 않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스페인 등으로 구성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프랑스를 공격했습니다.
1795년에는 선거로 선출된 다섯 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총재 정부가 들어섰지만 큰 성과는 없었습니다. 공화국을 위한 전투에서 성공을 거두며 힘을 모은 코르시카 출신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9년 11월의 쿠데타를 통해 총재 정부를 혁파하고 프랑스 제1제국을 세웠습니다. 향후 15년에 걸쳐 프랑스는 6개국으로 이루어진 연합군과의 연속적인 전투에 돌입했으며 대부분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마주한 연합군의 수적 우위는 압도적이었습니다. 이베리아와 러시아의 변방에서 프랑스는 수천 명의 병력을 잃었고 완강한 영국군이 바다를 장악했습니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루이지애나를 신생국인 미국에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역사적인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에 이어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은 라이프치히에서 프랑스 대육군을 무찌르고 1814년 3월에 파리에 입성했으며 나폴레옹을 엘바 섬으로 유배 보내고 부르봉 왕가를 다시 왕위에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보나파르트는 프랑스로 복귀하여 또 다른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통풍을 앓고 있던 루이 18세는 정신을 차리고 파리에서 도주한 후 네덜란드로 피난했습니다. 유럽의 군주들은 또 다른 동맹을 결성해야 했으며 100일 간의 충돌 끝에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를 괴멸시켰고, 나폴레옹은 다시 섬 감옥으로 유배되었고 여기서 1821년에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프랑스는 다시 왕정으로 돌아왔지만 1848년에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나며, 최초 혁명에 비해 조직력이 크게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혁명군은 카페 왕조를 완전히 몰아내고 제2공화정을 세웠습니다. 3년 동안 지속된 제2공화정은 루이 나폴레옹이 백부의 발자취를 따라 자유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제2 프랑스 제국을 건립하면서 와해되었습니다.
하지만 제2제국 역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 당시 스당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사에 사로잡히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의회를 점령하고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바보가 아니었던 대표들은 제3공화정을 세웠습니다. 여제는 잉글랜드로 도주했고 프랑스에서 다시 한 번 공화주의가 활개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프랑스가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프로이센은 알자스로렌을 차지하고 독일을 통일했지만 이는 별개의 이야기 입니다.
제3공화정은 모든 면에서 볼 때 수완이 뛰어났습니다. 우선 영국, 러시아 및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했고 엉망이 된 해외의 식민지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강화했습니다. 타락한 파리는 전 세계인에게 악마의 유혹처럼 다가왔습니다. 관광객들은 불에 매혹된 나방들처럼 물랑 루즈, 레프트 뱅크, 크레이지 호스 살롱과 발 뷜리에로 모여들었고, 아방가르드 예술이 꽃을 피웠고 벨 에포크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패션, 음식과 유행의 기준을 높였으며, 심지어는 또 다시 정부를 갈아엎지 않고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에 나라는 황폐화되었고 시민들은 궁핍해져만 갔습니다.
실제로 제3공화정은 194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비시 정부는 독일 제3제국의 관심이 전혀 없었던 프랑스 지역을 차지한 후 제3공화정을 접수했고, 4년의 혹독한 시간이 흐른 1944년 여름 및 가을, 프랑스의 대도시는 드골이 주장한 '자유 프랑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에 의해 해방되었습니다. 1945년에는 독일이 패배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제4공화정이라는 또 다른 정부가 세워졌고 1964년에 새로운 헌법이 도입되었습니다.
또 다른 제4공화정이 붕괴하게 된 계기는 1958년의 알제리 사태였습니다. 세계대전으로 큰 충격을 입은 프랑스의 지도자들은 썩어가는 식민지 제국에 대한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출혈을 감수했습니다. 1956년의 수에즈 위기는 프랑스에 또 다른 재난을 안겼습니다. 1958년 5월, 국회는 드골에게 정권을 다시 내어주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제4공화정을 없애고 '위대함의 정치'를 토대로 제5공화정을 세운 후 프랑스의 본질에 필요한 것은 위대함이라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