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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순간

문명

소개

골

그란 콜롬비아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누비아

독일

러시아

로마

마야

마오리

마케도니아

마푸체

말리

몽골

미국

바빌론

베트남

브라질

비잔틴

수메르

스웨덴

스코틀랜드

스키타이

스페인

아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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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영국

오스만

이집트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잉카

조지아

줄루

중국

캐나다

콩고

크리

크메르

페니키아

페르시아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한국

헝가리

호주

지도자

스웨덴
특유 능력

노벨상

스웨덴이 위인을 영입하면 외교적 환심 50을 얻습니다(일반 속도 기준). 스웨덴이 공장에서 위대한 기술자 점수 +1을, 대학교에서 위대한 과학자 점수 +1을 얻습니다. 게임에 스웨덴이 있으면 산업 시대부터 3개의 특유한 세계 의회 경쟁이 추가됩니다.

역사적 배경
사람들은 신석기 시대 이전부터 스칸디나비아에서 살았으며, 이 지역은 지위가 높은 인물의 시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조각된 돌도끼에서 이름을 따온 독특한 "배틀 액스 문화"가 특징입니다. 정착지에는 주로 작은 무리와 정착민이 있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끝나고(스칸디나비아 부족은 이주 기간의 일부였던 것처럼 보임) 중세 시대까지 바이킹 무리의 이교도 영역이었습니다.

성 안스가르를 필두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방문하기 시작한 건 9세기였지만 기독교 전체가 널리 자리 잡은 시기는 바이킹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1~12세기였습니다. 이 기간에는 바이킹의 전통적인 생활 양식이 봉건주의 모델 방향으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마그누스 왕은 1280년에 귀족이 군왕을 섬기는 진정한 봉건주의 모델을 스웨덴 내에 확립했습니다.

이러한 봉건제와 군주의 강화된 통치는 계속되었습니다. 파란색의 필드에 세 개의 황금 왕관이 있는 스웨덴의 유명한 세 왕관(Tre Kronor) 문장은 1300년대 초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스웨덴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1389년에는 덴마크,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이 덴마크 여왕 마르가레타의 동군연합에 귀속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어진 1397년의 칼마르 동맹으로 세 영토 모두가 군주령으로 예속되었지만 통일되는 과정이 평화롭지는 못했습니다.

덴마크와 스웨덴, 파벌 간의 질투와 내분은 게르만 공국과 한자동맹을 끌어들이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스웨덴은 수십 년에 걸쳐 자치권 향상을 위한 시도를 이어갔으며,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2세가 1521년에 스톡홀름에서 여러 저명인사를 처형하면서 상황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는 스웨덴의 귀족, 구스타브 바사가 이끈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구스타브 바사는 귀족들에 의해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 바사로 왕위에 올라 그를 끌어내리려는 덴마크의 시도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또한 구스타브 1세는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자신의 통치하에 두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으로 인해 근대 국가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스웨덴은 구스타브 1세의 명령에 따라 초기 개신교로 일찍 개종했습니다. 이는 헨리 8세가 영국을 개종(영국 역시 국왕과 교황 간의 오랜 분쟁이 개종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정황상 일맥상통함)시킨 시점과 시기가 거의 같습니다. 스웨덴은 이어진 수 세기 동안에도 로터교의 수호자 역할을 이어가게 됩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퍼스 바사는 스웨덴의 가장 유명한 국왕 중 한 명이었으며, 30년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개신교 편에서 훌륭한 전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덕분에 스웨덴은 다음 세기에 북유럽의 1등 국가로 비상할 수 있었습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1632년의 뤼첸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왕위는 그의 유일한 핏줄인 크리스티나(그녀의 삶에 관해서는 관련 섹션 참조)에게 계승되었습니다.

하지만 1700년대 초의 대북방 전쟁 이후로 발트 지역에 대한 스웨덴의 지배권은 약화되었고 러시아, 그리고 덴마크-노르웨이를 비롯한 동맹들에 대한 명성도 잃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 접어들면서 스웨덴은 현재의 핀란드에서 러시아로 이어지는 영토를 잃었고, 나폴레옹이 유럽의 질서를 새로 잡기 위해 파견한 프랑스 원수,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를 통해 어쩔 수 없이 노르웨이와 또 다른 연합(1810년)을 맺어야 했습니다. 젊은 시절 파리 자코뱅 소속의 선동가로 활동했던 새로운 국왕과 관련하여 팔에 '만왕에게 죽음을'이라는 문신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결국 노르웨이와의 연합은 20세기 초에 와해되었고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20세기 초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급격한 산업화였습니다. 1901년에는 최초의 노벨상이 수여되었습니다. 노벨상은 화학자 겸 기업가였던 알프레드 노벨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를 더욱 효율적인 방식으로 죽일 수 있도록 만든 발명가가 아닌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습니다.

스웨덴은 나폴레옹 시대 중반 이후로 유럽 전쟁사에서 확고한 중립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이 정책의 도덕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 스웨덴은 국제 질서를 위한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었으며, 이것이 세계 전쟁과 정치적 재앙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스웨덴의 오랜 역사는 정치체계와 통치가 반복되고 개혁되는 과정이었으며, 덕분에 모든 시민들이 지닌 높은 수준의 평등권을 바탕으로 안정적이고 질서 있는 평등주의 사회를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200년 동안 군사적 모험주의를 포기한 스웨덴은 남는 자원을 활용하여 국가를 발전시켰으며, 삶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부문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스웨덴은 유엔을 통해 국제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데 앞장서고 있으며, 스웨덴의 경제학자 겸 정치학자인 다그 함마르셸드는 제2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했습니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21세기에도 스웨덴은 계속해서 평등주의 원칙을 지지하고 있으며 이를 만국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웨덴은 지속적인 평화를 실현하고 싶어 하는 당사자 간의 적극적인 중재자라는 평판을 높이 쌓고 있습니다.
PortraitSquare
icon_civilization_sweden

특성

지도자
icon_leader_kristina
크리스티나
특수 유닛
icon_unit_sweden_carolean
캐롤리언
특수 인프라
icon_improvement_open_air_museum
야외 박물관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스웨덴
크기
약 45만 제곱킬로미터
인구
1600년 기준 약 130만
수도
감라 웁살라, 웁살라 및 스톡홀름
PortraitSqu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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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지도자
icon_leader_kristina
크리스티나
특수 유닛
icon_unit_sweden_carolean
캐롤리언
특수 인프라
icon_improvement_open_air_museum
야외 박물관

지리 및 사회 데이터

위치
스웨덴
크기
약 45만 제곱킬로미터
인구
1600년 기준 약 130만
수도
감라 웁살라, 웁살라 및 스톡홀름
특유 능력

노벨상

스웨덴이 위인을 영입하면 외교적 환심 50을 얻습니다(일반 속도 기준). 스웨덴이 공장에서 위대한 기술자 점수 +1을, 대학교에서 위대한 과학자 점수 +1을 얻습니다. 게임에 스웨덴이 있으면 산업 시대부터 3개의 특유한 세계 의회 경쟁이 추가됩니다.

역사적 배경
사람들은 신석기 시대 이전부터 스칸디나비아에서 살았으며, 이 지역은 지위가 높은 인물의 시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조각된 돌도끼에서 이름을 따온 독특한 "배틀 액스 문화"가 특징입니다. 정착지에는 주로 작은 무리와 정착민이 있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끝나고(스칸디나비아 부족은 이주 기간의 일부였던 것처럼 보임) 중세 시대까지 바이킹 무리의 이교도 영역이었습니다.

성 안스가르를 필두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방문하기 시작한 건 9세기였지만 기독교 전체가 널리 자리 잡은 시기는 바이킹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1~12세기였습니다. 이 기간에는 바이킹의 전통적인 생활 양식이 봉건주의 모델 방향으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마그누스 왕은 1280년에 귀족이 군왕을 섬기는 진정한 봉건주의 모델을 스웨덴 내에 확립했습니다.

이러한 봉건제와 군주의 강화된 통치는 계속되었습니다. 파란색의 필드에 세 개의 황금 왕관이 있는 스웨덴의 유명한 세 왕관(Tre Kronor) 문장은 1300년대 초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스웨덴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1389년에는 덴마크,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이 덴마크 여왕 마르가레타의 동군연합에 귀속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어진 1397년의 칼마르 동맹으로 세 영토 모두가 군주령으로 예속되었지만 통일되는 과정이 평화롭지는 못했습니다.

덴마크와 스웨덴, 파벌 간의 질투와 내분은 게르만 공국과 한자동맹을 끌어들이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스웨덴은 수십 년에 걸쳐 자치권 향상을 위한 시도를 이어갔으며,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2세가 1521년에 스톡홀름에서 여러 저명인사를 처형하면서 상황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는 스웨덴의 귀족, 구스타브 바사가 이끈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구스타브 바사는 귀족들에 의해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 바사로 왕위에 올라 그를 끌어내리려는 덴마크의 시도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또한 구스타브 1세는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자신의 통치하에 두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으로 인해 근대 국가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스웨덴은 구스타브 1세의 명령에 따라 초기 개신교로 일찍 개종했습니다. 이는 헨리 8세가 영국을 개종(영국 역시 국왕과 교황 간의 오랜 분쟁이 개종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정황상 일맥상통함)시킨 시점과 시기가 거의 같습니다. 스웨덴은 이어진 수 세기 동안에도 로터교의 수호자 역할을 이어가게 됩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퍼스 바사는 스웨덴의 가장 유명한 국왕 중 한 명이었으며, 30년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개신교 편에서 훌륭한 전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덕분에 스웨덴은 다음 세기에 북유럽의 1등 국가로 비상할 수 있었습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1632년의 뤼첸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왕위는 그의 유일한 핏줄인 크리스티나(그녀의 삶에 관해서는 관련 섹션 참조)에게 계승되었습니다.

하지만 1700년대 초의 대북방 전쟁 이후로 발트 지역에 대한 스웨덴의 지배권은 약화되었고 러시아, 그리고 덴마크-노르웨이를 비롯한 동맹들에 대한 명성도 잃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 접어들면서 스웨덴은 현재의 핀란드에서 러시아로 이어지는 영토를 잃었고, 나폴레옹이 유럽의 질서를 새로 잡기 위해 파견한 프랑스 원수,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를 통해 어쩔 수 없이 노르웨이와 또 다른 연합(1810년)을 맺어야 했습니다. 젊은 시절 파리 자코뱅 소속의 선동가로 활동했던 새로운 국왕과 관련하여 팔에 '만왕에게 죽음을'이라는 문신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결국 노르웨이와의 연합은 20세기 초에 와해되었고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20세기 초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급격한 산업화였습니다. 1901년에는 최초의 노벨상이 수여되었습니다. 노벨상은 화학자 겸 기업가였던 알프레드 노벨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를 더욱 효율적인 방식으로 죽일 수 있도록 만든 발명가가 아닌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습니다.

스웨덴은 나폴레옹 시대 중반 이후로 유럽 전쟁사에서 확고한 중립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이 정책의 도덕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 스웨덴은 국제 질서를 위한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었으며, 이것이 세계 전쟁과 정치적 재앙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스웨덴의 오랜 역사는 정치체계와 통치가 반복되고 개혁되는 과정이었으며, 덕분에 모든 시민들이 지닌 높은 수준의 평등권을 바탕으로 안정적이고 질서 있는 평등주의 사회를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200년 동안 군사적 모험주의를 포기한 스웨덴은 남는 자원을 활용하여 국가를 발전시켰으며, 삶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부문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스웨덴은 유엔을 통해 국제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데 앞장서고 있으며, 스웨덴의 경제학자 겸 정치학자인 다그 함마르셸드는 제2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했습니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21세기에도 스웨덴은 계속해서 평등주의 원칙을 지지하고 있으며 이를 만국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웨덴은 지속적인 평화를 실현하고 싶어 하는 당사자 간의 적극적인 중재자라는 평판을 높이 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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