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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문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서로 간에 옥신각신하던 여러 식민지에서 전 세계를 아우르는 강대국으로 거듭난 미국의 성장은 눈부셨습니다. 이민의 물결에 따른 산물인 미국은 현재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영토와 세 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북미 대륙, 대서양과 태평양에 걸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시들을 품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GDP(국내총생산), 서비스 산업, 미디어 산업 및 GFP(핵무기를 제외한 군사력 순위)를 자랑하는 미국은 세계 최초의 '초강대국'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미합중국의 역사는 북미 대륙 동부 해안을 따라 13곳의 영국 식민지가 건립되는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 식민지에는 영국 상류층, 일확천금을 꿈 꾸던 모험가, 범죄자, 채무자, 광신도, 정치적 급진주의자와 단순히 더 나은 삶을 찾고자 했던 이들이 거주했습니다. 아프리카 노예와 고용 계약제 하인 같은 다른 이주민은 선택이 아닌 단지 운이 없어 미국에서 살게 되었고, 정황이 어찌 되었든 '모자이크 사회'를 위한 초석을 마련한 것은 바로 이런 다양한 대중들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이주민들은 탁월한 화력과 기술을 앞세워 원주민들과 대적했으며 이를 기점으로 2세기에 걸친 분쟁과 잔혹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776년에는 미시시피주 동부의 원주민이 모두 사라지거나 추방되거나 종속되었습니다. 또한 미국인들은 점차 확장되는 서부 개척지와 1763년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의 승리에 기여한 역할 때문인지 과도한 자족감과 자립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로아노크, 제임스타운, 플리머스와 여러 열악한 지역에 처음 정착지가 형성된 지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미국인들은 감히 영국 왕실을 상대로 본국 시민과 동일한 대우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과 함께 프랑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던 미국인들은 버지니아의 상류층과 뉴잉글랜드의 지식인들의 주도 하에 불과 12년 만에 영국과의 무력 분쟁을 시작했습니다. 벤 프랭클린이 1773년에 발행한 풍자서(대제국을 소국으로 만들어 버리는 법, Rules by Which a Great Empire May Be Reduced to a Small One)에는 식민지의 불만 사항이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영국에서 풍자서의 내용을 따르기만 했다면 영국은 아메리카가 골치투성이의 투자 대상이란 사실을 깨닫고 이곳을 좀 더 일찍 포기했을 지도 모릅니다. 가족 간의 분쟁이 대부분 그러하듯, 가장 중요한 원인은 돈이었습니다. 식민지 주민들은 불공정하다고 느껴지는 경제 규제와 영국의 세금 징수에 짜증이 났습니다. 한편 영국과 몇몇 충성스런 왕당파 인원들이 볼 때 식민지 주민들은 왕실에서 식민지를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어느 정도의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배은망덕한 폭도에 불과했습니다.
1770년대 후반에 이르자 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은 공개적인 반란에 나섰으며 1776년 7월 4일에는 격렬한 논의 끝에 협의점을 찾아낸 단체 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이는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전쟁은 1775년 4월부터 1781년 10월까지 격렬하게 이어졌습니다. 대부분의 내란이 그렇듯 남부에서는 게릴라전이 펼쳐졌고 북쪽을 마주한 채 행군과 후퇴가 반복되었습니다. 반체제의 식민지 진영을 지칭하는 대륙군은 많은 훈련과 전투 경험을 거친 영국군에 비해 화력과 병력이 부족했으며 위상 높은 영국 해군은 해상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1770년대가 끝나가는 시점에 프랑스와 스페인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쟁 양상이 바뀌었습니다.
대륙군은 1781년 말에 요크타운에서 콘월리스의 영국군을 포위했습니다. 프랑스 해군이 연안을 지키고 있었던 관계로 영국군은 도망칠 수 없었으며 콘월리스는 미국의 혁명 영웅인 조지 워싱턴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2년 후에는 마침내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신생 공화국에서는 미시시피 주 동부의 모든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고 플로리다는 스페인으로 넘어갔습니다. 이후 미국 상인들은 전 세계에서 '자유 무역'을 통해 탐욕을 추구할 수 있었으며 신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악감정을 뒤로 한 미국의 '애국자'들은 함께 모여 연방 공화국을 결성했습니다. 최초의 시도로 1781년에 비준된 '연합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 and Perpetual Union)'은 시민에게서 세금을 징수하거나 군사를 유지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 부여하지 않았고, 국정 감독을 위한 행정관이 없었던 관계로 어떤 효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새롭게 결성된 연방 의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부분과 다른 결함을 신속하게 감지해 냈습니다. 곧 이어 이들은 1787년에 필라델피아에서 비밀 회의를 소집하여 헌장을 개정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독선과 논쟁 끝에 회의 참석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헌법을 작성했으며 이는 1789년에 여러 주에 도입되어 현재 미국 정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에는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1791년에는 권리 장전이 추가되었고 이후로 17건의 수정 조항과 6건의 개정 제안이 추가되었습니다.
자국민에게 '삶, 자유와 행복의 추구권'을 보장할 수 있게 된 미국은 국가적인 차원의 행복을 위해 급속한 확장에 착수했습니다. 1803년에는 먼 대륙의 야만적인 벽지에 관심을 잃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와 인근 지역을 미국에 판매했으며 이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재산 이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125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한 영토에 대한 별다른 정보가 없었던 제퍼슨 전 미 대통령은 새 영토를 탐험한 후 결과를 보고하도록 두 명의 장교를 파견했으며 알고 보니 미국의 영토는 거의 두 배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영토 확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1853년 말에 현재 미국의 광활한 대륙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확장에는 분쟁이 뒤따랐고 1861년에는 최악의 내전인 남북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후 4년에 걸쳐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최악의 분쟁이 이어졌으며 약 600,000명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고 400,00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 전쟁은 노예 해방, 그리고 그에 따른 (노예 노동에 기반한) 남부 인프라의 황폐화로 이어졌습니다. 이 분열의 반향은 오늘날 미국 정치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확고한 마음과 명백한 운명,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 그리고 모험과 부라는 통상적인 꿈에 부푼 이주민, 탐사자, 상인, 전도사와 무법자들이 서부의 땅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두 세대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이 '황량한 서부'에 정착한 개신교 가족들 덕분에 광석, 가축과 목재 산업에서 엄청난 부가 창출되고 있었으며 미국의 구석진 오지조차 세련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물론 그 이면에는 원주민 학살이라는 어두운 역사도 숨어 있었습니다. 또한 '아메리칸 드림'에 이끌려 고향을 등진 유럽의 이민자들이 동부 및 걸프 해변 전역을 통해 미국으로 흘러 들어오며, 수천 명의 이민자가 장벽을 허물고 철도를 구축하고 산을 채광하고 법을 장착시키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먼 지역의 크고 작은 사건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의 미국인들은 낙관적이었으며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라는 자기만족적 믿음이 확고했습니다. 이는 정치 개혁, 과학 발전, 도시화, 제국주의로 표현됩니다. 한편 작가와 작곡가들은 새로운 유형의 미국 문학과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산업, 문화 및 경제력이 성장하는 동안에도 미국의 군사력은 비슷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8~1919년에 스페인에서 발생한 독감 전염, 주식시장의 폭락으로 인한 '대공황', 광란의 20년대를 휩쓴 '도덕적 붕괴'와 더스트볼의 자연 재해와 더불어 이러한 모든 낙관주의와 이상주의는 다음 세기 초에 급작스럽게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좋은 시절은 지나가고, '소위' 선의에 따른 금주령의 시작과 함께 대형 기업 및 대형 정부, 그리고 '대형 범죄 조직'에 이은 '대형 언론'과의 위험한 유착도 발생했습니다. 중구난방 수준이었던 범죄가 조직화되었고 미국 경제의 언저리에 있던 '범죄 조직'이 많은 사업을 차지했으며 딜린저 및 카폰과 같은 폭력배가 조잡한 서부극 소설에나 등장하던 언론과 대중의 영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으로부터 미국을 구원한 것은 '선의의 전쟁'이었습니다. 유럽의 분쟁이 2년간에 걸쳐 지속되었고 미국에서는 상황을 좌시하고 있었을 무렵인 1941년 12월 7일에 일본 제국이 미국을 공격했습니다. 며칠 뒤에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미국에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과거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은 미국은 1942년 말에 이르러 모든 위협에 대한 공세를 취했으며 전쟁 중인 동맹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엄청난 물자를 지원했습니다. 1945년에는 미국이 일본의 도시 두 곳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면서 전쟁은 종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부상한 초강대국들은 곧 다른 종류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우선 소비에트 연방이 동부 유럽 전역에 걸쳐 철의 장막을 드리우기 시작했고, 중국 공산 혁명이 일어났으며, 러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원자 폭탄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이에 '자유진영'은 1983년에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이 '악의 제국'으로 명명한 소비에트 연방과 대적할 준비에 나섰고, 서구와 동구는 타국민들의 '감성과 지성'을 얻기 위해 경합했습니다. 경쟁국들은 세계 전역에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투자하여 좀 더 치명적인 무기를 개발하고, 정부 체제를 전복시키고,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복잡한 첩자 활동을 수행하고, 반체제 인사를 억압하거나 암살했으며, 대리 전쟁에 참여하여 상대방의 방송 전파를 선전물로 가득 채웠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우주 개발 경쟁과 과학의 진보도 포함되었죠. 한편 모든 국가의 시민들은 핵 전쟁이 발발할까 마음을 졸여야 했습니다. 1989년에는 동부 유럽 국가들이 소비에트 연방을 몰아냄으로써 철의 장막이 사라졌습니다. 이성적인 계산 능력만 있다면 냉전에 개입한 모든 국가가 엄청난 비용적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미국은 새로운 평화와 자기 만족의 시대를 누렸지만 그 기간은 10년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알 카에다'라는 조직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테러리스트 단체는 상업 제트 여객기를 조종하여 뉴욕 시의 세계 무역 센터와 워싱턴 DC의 펜타곤으로 돌진했습니다. 9월의 공격으로 인해 3,000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약 100억 달러의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혼란 속에서도 미국은 건국 당시부터 옹호해 온 자유와 평등이라는 고결한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정진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성별, 성적 지향, 인종적 평등 등등의 위시한 여러 사회 운동이 미국인들의 삶의 패턴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와 함께 미국의 무형적(그리고 종종 유형적) 권력이 막대하게 투영되었습니다. 미국은 가능한 곳에서는 미디어와 문화로 다른 국가를 매혹했고, 가능하지 않은 곳에서는 혁명과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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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의 역사는 북미 대륙 동부 해안을 따라 13곳의 영국 식민지가 건립되는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 식민지에는 영국 상류층, 일확천금을 꿈 꾸던 모험가, 범죄자, 채무자, 광신도, 정치적 급진주의자와 단순히 더 나은 삶을 찾고자 했던 이들이 거주했습니다. 아프리카 노예와 고용 계약제 하인 같은 다른 이주민은 선택이 아닌 단지 운이 없어 미국에서 살게 되었고, 정황이 어찌 되었든 '모자이크 사회'를 위한 초석을 마련한 것은 바로 이런 다양한 대중들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이주민들은 탁월한 화력과 기술을 앞세워 원주민들과 대적했으며 이를 기점으로 2세기에 걸친 분쟁과 잔혹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776년에는 미시시피주 동부의 원주민이 모두 사라지거나 추방되거나 종속되었습니다. 또한 미국인들은 점차 확장되는 서부 개척지와 1763년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의 승리에 기여한 역할 때문인지 과도한 자족감과 자립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로아노크, 제임스타운, 플리머스와 여러 열악한 지역에 처음 정착지가 형성된 지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미국인들은 감히 영국 왕실을 상대로 본국 시민과 동일한 대우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과 함께 프랑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던 미국인들은 버지니아의 상류층과 뉴잉글랜드의 지식인들의 주도 하에 불과 12년 만에 영국과의 무력 분쟁을 시작했습니다. 벤 프랭클린이 1773년에 발행한 풍자서(대제국을 소국으로 만들어 버리는 법, Rules by Which a Great Empire May Be Reduced to a Small One)에는 식민지의 불만 사항이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영국에서 풍자서의 내용을 따르기만 했다면 영국은 아메리카가 골치투성이의 투자 대상이란 사실을 깨닫고 이곳을 좀 더 일찍 포기했을 지도 모릅니다. 가족 간의 분쟁이 대부분 그러하듯, 가장 중요한 원인은 돈이었습니다. 식민지 주민들은 불공정하다고 느껴지는 경제 규제와 영국의 세금 징수에 짜증이 났습니다. 한편 영국과 몇몇 충성스런 왕당파 인원들이 볼 때 식민지 주민들은 왕실에서 식민지를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어느 정도의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배은망덕한 폭도에 불과했습니다.
1770년대 후반에 이르자 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은 공개적인 반란에 나섰으며 1776년 7월 4일에는 격렬한 논의 끝에 협의점을 찾아낸 단체 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이는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전쟁은 1775년 4월부터 1781년 10월까지 격렬하게 이어졌습니다. 대부분의 내란이 그렇듯 남부에서는 게릴라전이 펼쳐졌고 북쪽을 마주한 채 행군과 후퇴가 반복되었습니다. 반체제의 식민지 진영을 지칭하는 대륙군은 많은 훈련과 전투 경험을 거친 영국군에 비해 화력과 병력이 부족했으며 위상 높은 영국 해군은 해상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1770년대가 끝나가는 시점에 프랑스와 스페인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쟁 양상이 바뀌었습니다.
대륙군은 1781년 말에 요크타운에서 콘월리스의 영국군을 포위했습니다. 프랑스 해군이 연안을 지키고 있었던 관계로 영국군은 도망칠 수 없었으며 콘월리스는 미국의 혁명 영웅인 조지 워싱턴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2년 후에는 마침내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신생 공화국에서는 미시시피 주 동부의 모든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고 플로리다는 스페인으로 넘어갔습니다. 이후 미국 상인들은 전 세계에서 '자유 무역'을 통해 탐욕을 추구할 수 있었으며 신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악감정을 뒤로 한 미국의 '애국자'들은 함께 모여 연방 공화국을 결성했습니다. 최초의 시도로 1781년에 비준된 '연합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 and Perpetual Union)'은 시민에게서 세금을 징수하거나 군사를 유지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 부여하지 않았고, 국정 감독을 위한 행정관이 없었던 관계로 어떤 효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새롭게 결성된 연방 의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부분과 다른 결함을 신속하게 감지해 냈습니다. 곧 이어 이들은 1787년에 필라델피아에서 비밀 회의를 소집하여 헌장을 개정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독선과 논쟁 끝에 회의 참석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헌법을 작성했으며 이는 1789년에 여러 주에 도입되어 현재 미국 정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에는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1791년에는 권리 장전이 추가되었고 이후로 17건의 수정 조항과 6건의 개정 제안이 추가되었습니다.
자국민에게 '삶, 자유와 행복의 추구권'을 보장할 수 있게 된 미국은 국가적인 차원의 행복을 위해 급속한 확장에 착수했습니다. 1803년에는 먼 대륙의 야만적인 벽지에 관심을 잃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와 인근 지역을 미국에 판매했으며 이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재산 이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125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한 영토에 대한 별다른 정보가 없었던 제퍼슨 전 미 대통령은 새 영토를 탐험한 후 결과를 보고하도록 두 명의 장교를 파견했으며 알고 보니 미국의 영토는 거의 두 배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영토 확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1853년 말에 현재 미국의 광활한 대륙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확장에는 분쟁이 뒤따랐고 1861년에는 최악의 내전인 남북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후 4년에 걸쳐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최악의 분쟁이 이어졌으며 약 600,000명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고 400,00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 전쟁은 노예 해방, 그리고 그에 따른 (노예 노동에 기반한) 남부 인프라의 황폐화로 이어졌습니다. 이 분열의 반향은 오늘날 미국 정치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확고한 마음과 명백한 운명,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 그리고 모험과 부라는 통상적인 꿈에 부푼 이주민, 탐사자, 상인, 전도사와 무법자들이 서부의 땅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두 세대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이 '황량한 서부'에 정착한 개신교 가족들 덕분에 광석, 가축과 목재 산업에서 엄청난 부가 창출되고 있었으며 미국의 구석진 오지조차 세련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물론 그 이면에는 원주민 학살이라는 어두운 역사도 숨어 있었습니다. 또한 '아메리칸 드림'에 이끌려 고향을 등진 유럽의 이민자들이 동부 및 걸프 해변 전역을 통해 미국으로 흘러 들어오며, 수천 명의 이민자가 장벽을 허물고 철도를 구축하고 산을 채광하고 법을 장착시키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먼 지역의 크고 작은 사건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의 미국인들은 낙관적이었으며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라는 자기만족적 믿음이 확고했습니다. 이는 정치 개혁, 과학 발전, 도시화, 제국주의로 표현됩니다. 한편 작가와 작곡가들은 새로운 유형의 미국 문학과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산업, 문화 및 경제력이 성장하는 동안에도 미국의 군사력은 비슷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8~1919년에 스페인에서 발생한 독감 전염, 주식시장의 폭락으로 인한 '대공황', 광란의 20년대를 휩쓴 '도덕적 붕괴'와 더스트볼의 자연 재해와 더불어 이러한 모든 낙관주의와 이상주의는 다음 세기 초에 급작스럽게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좋은 시절은 지나가고, '소위' 선의에 따른 금주령의 시작과 함께 대형 기업 및 대형 정부, 그리고 '대형 범죄 조직'에 이은 '대형 언론'과의 위험한 유착도 발생했습니다. 중구난방 수준이었던 범죄가 조직화되었고 미국 경제의 언저리에 있던 '범죄 조직'이 많은 사업을 차지했으며 딜린저 및 카폰과 같은 폭력배가 조잡한 서부극 소설에나 등장하던 언론과 대중의 영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으로부터 미국을 구원한 것은 '선의의 전쟁'이었습니다. 유럽의 분쟁이 2년간에 걸쳐 지속되었고 미국에서는 상황을 좌시하고 있었을 무렵인 1941년 12월 7일에 일본 제국이 미국을 공격했습니다. 며칠 뒤에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미국에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과거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은 미국은 1942년 말에 이르러 모든 위협에 대한 공세를 취했으며 전쟁 중인 동맹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엄청난 물자를 지원했습니다. 1945년에는 미국이 일본의 도시 두 곳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면서 전쟁은 종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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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새로운 평화와 자기 만족의 시대를 누렸지만 그 기간은 10년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알 카에다'라는 조직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테러리스트 단체는 상업 제트 여객기를 조종하여 뉴욕 시의 세계 무역 센터와 워싱턴 DC의 펜타곤으로 돌진했습니다. 9월의 공격으로 인해 3,000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약 100억 달러의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혼란 속에서도 미국은 건국 당시부터 옹호해 온 자유와 평등이라는 고결한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정진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성별, 성적 지향, 인종적 평등 등등의 위시한 여러 사회 운동이 미국인들의 삶의 패턴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와 함께 미국의 무형적(그리고 종종 유형적) 권력이 막대하게 투영되었습니다. 미국은 가능한 곳에서는 미디어와 문화로 다른 국가를 매혹했고, 가능하지 않은 곳에서는 혁명과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