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닛은 조선 기술 연구 후 해양 타일로 이동할 수 있게 됩니다. 해상 근접 유닛은 중립 지역에서 체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유닛은 승선 또는 하선 시, 추가 이동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역사적 배경
노르웨이의 바이킹족은 노르웨이를 떠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서기 800년까지 이들은 셰틀랜드, 오크니, 페로스, 헤브리디스와 사람들의 관심이 적은 여러 지역을 식민지화하였습니다. 820년경에 이들은 아일랜드 서부 해안에 정착지를 형성했고 더블린을 비롯하여 섬에서 가장 위대한 몇몇 도시들을 건립했습니다. 또한 870년경에는 아이슬란드를 발견하였고, 즉시 400명의 족장들이 영토를 분할했습니다. 100년 후에는 그린란드에 바이킹이 출몰했고 레이프 에릭손은 서기 1000년경에 북아메리카에 상륙했지만 이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노르웨이 자체는 통일조차 되지 않았으며 통치권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몇몇 약소 왕국만이 존재했을 뿐입니다.
하랄 페어헤어는 노르웨이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872년경의 하프르스피오르 전투에서 그와 경합 중이던 모든 족장을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바이킹의 기록이 신빙성이 없는 만큼 역사학자들도 정확한 날짜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통일 노르웨이의 진정한 왕이 된 인물은 1015년에 왕좌에 오른 올라프 하랄드손이었습니다. 비록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영주가 주기적으로 분립을 시도했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성 올라프'는 국가 전체를 기독교화하고 오딘, 토르와 발할라 등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현지 정부 기관에서 기독교를 의무화하고 교회를 건축하는 한편, 이교도 신전을 철거하고 트론헤임을 기독교의 중심지로 선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강제했습니다. 올라프는 스티클레스타드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노르웨이에는 기독교가 정착되었습니다.
비록 하랄드 하르드라다는 1066년에 영국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시도했다가 스템포드 브리지에서 패배했지만 그의 가문은 1130년에 시구르드 마구노손('크루세이더')이 사망할 때까지 노르웨이를 통치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100년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1217년에는 호콘 4세가 전쟁을 마무리한 후 스베레 왕조를 세웠습니다. 호콘과 그의 후손들의 통치 아래에 노르웨이는 정치와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노르웨이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모두 합병했습니다. 1266년, 기능을 잃은 다수의 법규를 개정하여 '법의 개정자'로 불리는 망누스 4세는 사나운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헤브리디스를 지켜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도와 맨 섬을 스코틀랜드 국왕에게 판매했습니다. 셰틀랜드와 제도 역시 1468년에 매각되었습니다.
스칸디나비아에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찾아왔고 노르웨이인들은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이킹 상인들은 남쪽으로는 중동, 동쪽으로는 러시아의 황무지, 그리고 서쪽으로는 영국 제도로 항해하여 모피, 전나무, 어류와 광석 등의 원재료를 판매하여 거둔 부를 가지고 고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해안 지역을 따라 농업이 번창했고, 한편 예술 분야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노르웨이의 장인들은 나무와 금속을 사용하여 오세베르그에서 우르네스에 이르는 여러 독특한 양식의 예술품을 만들어냈습니다. 노르웨이의 선박 제작자들은 대양을 횡단할 수 있는 배를 만들었습니다. 노르웨이의 대장장이들은 유럽 최고의 무기와 사슬 갑옷을 벼렸는데, 비록 바이킹 왕국 간에는 평화가 존재했지만, 노르웨이인들은 항상 주위에 누군가를 공격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이러한 무기와 갑옷이 도움되었습니다.
1349년쯤에 흑사병이 스칸디나비아에 창궐하여 향후 몇 년에 걸쳐 인구의 50%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인명 손실로 인해 자연스럽게 세금은 감소했고, 왕실에 집중되어 있던 권한이 분산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가톨릭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올렸으며 트론헤임의 대주교가 국무원에 자리를 요구하고 이를 얻었을 만큼 그 위세가 막강해졌습니다. 14세기 후반에는 한자 동맹이 조금씩 노르웨이의 교역로를 잠식하기 시작했고 1343년에는 베르겐에 콘토르('외국인용 교역소')를 건설했으며 1400년에는 도시에 자체 본부를 마련하고 어선단과 교역할 수 있는 독점 권한을 확보했습니다. 베르겐은 1600년대 중반까지 한자 동맹의 손아귀 안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옛 바이킹 왕국들을 통일하여 어려움과 맞선다는 관념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섯 살이었던 올라프 2세는 조부가 사망한 1376년 5월에 덴마크의 왕위를 상속받았으며 그의 부친이 사망한 후에는 그의 뒤를 이어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고, 향후 400년 동안 노르웨이는 이중 왕국의 일부인 코펜하겐에서 통치됩니다. 머지않아 덴마크의 섭정 여왕 마르그레테 1세가 통치권을 스웨덴의 왕좌와 합쳤고, 이로써 세 왕국은 물론 노르웨이의 속국과 스웨덴 왕실을 통한 핀란드까지 포함하는 칼마르 동맹이 결성되었습니다. 나날이 커지는 한자 동맹과 발트 해의 독일 왕자들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결성된 동맹은 스톡홀름 '피의 목욕' 사건으로 발발한 스웨덴 혁명으로 인해 구스타파 바사가 '자유 스웨덴'의 왕으로 즉위한 1523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카르말 동맹은 개혁으로 인한 혼란을 제외하고는 노르웨이에 상당한 이점을 선사했습니다. 덴마크-노르웨이의 왕인 프리드리히 1세는 루터의 이단적인 생각을 맘에 들어했습니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1529년에는 왕이 노르웨이인들에게 개신교를 강요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상한 대로 저항 운동은 최근에 직위에 오른 트론헤임의 대주교가 이끌었으며 그는 가톨릭 신자로 나이가 많았던 크리스티안 2세를 망명길에서 불러들였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사로잡혔고 남은 일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의 사망 이후에 이어진 내전에서 노르웨이의 가톨릭 신자들은 다시 전복을 꾀하였지만, 이번에는 더욱 참담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승리를 거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3세는 대주교를 추방했고 1536년에는 공동 왕국이었던 노르웨이를 덴마크의 지방으로 강등시켰으며 이듬해에는 노르웨이에서 루터교를 의무화했습니다.
이후에는 노르웨이인들이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잠잠해졌습니다. 성미 급한 덴마크인들이 벌이는 전쟁에 끌려가는 경우도 간혹 발생했습니다. 여기에 포함되는 칼마르 전쟁(1611-1613년), 30년 전쟁(1618-1648년)과 제2차 북방전쟁(1657-1660년)으로 인해 국경이 바뀌었지만 전반적으로는 모든 것이 수월했습니다. 인구는 1500년부터 1800년까지 300년에 걸쳐 약 750,000명으로 늘어났고, 덴마크의 행정 체계는 개혁되었고 노르웨이는 카운티로 구분되었습니다. 비록 노르웨이 전역에는 정부에서 임명한 무려 1,600명의 공무원이 존재하지만 유능한 왕들의 통치가 계속되면서 정부의 부패가 사라졌습니다. 적어도 덴마크의 경우에는 안타깝게도 나라가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패색이 짙은 진영에 서게 되었습니다.
모든 상황이 끝났을 때에는 1814년 5월에 국회가 소집되어 입헌군주제를 위한 헌법을 제정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가 스웨덴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1814년 7월에 스웨덴은 침공을 감행했고, 모스 조약을 통해 노르웨이가 항복하고 제대로 처신할 경우 헌법에 동의하기로 했습니다. 이로써 스웨덴과 노르웨이 간의 입헌 연합이 시작되었고 두 왕관의 새로운 주인으로 스웨덴의 군주인 카를 요한이 선택되었습니다. 태평스러운 스웨덴인들은 노르웨이인들에게 많은 자유를 허용했고 노르웨이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확산되었습니다. 1816년에는 국가 화폐(스피시스달러, speciedaler)를 보유한 노르웨이 은행이 설립되었고 1821년에는 옛 노르웨이 귀족제가 국회에 의해 폐지되었습니다. 1832년에는 농민들이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자신들의 인원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같은 해에 진행된 모든 선거에서 의회다수당을 차지했습니다. 따라서 농촌세가 감소했고 수입 관세는 상승했으며 시의회에서 행정을 운영하도록 하는 지방 의회 법안(Local Committees Act)이 통과되었습니다.
스웨덴이 노르웨이와의 자유 교역 협정을 폐지하고 두 국가 간의 경계를 그은 후 노르웨이의 외무부 장관 임명을 거부했을 때에는 독립을 위한 소요가 노르웨이 전역에서 확산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1905년에 왕이 의회의 투표 결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의 자체 외무부 장관 임명권을 다시 거부하자 의회에서는 연합을 깨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어진 국민 투표에서는 노르웨이 국민 중 184명만이 연합 유지에 표를 던졌습니다. 새로운 노르웨이 정부에서는 입헌 왕권을 덴마크의 왕자에게 제안했고 이를 수락한 칼 왕자는 호콘 7세가 되었습니다. 500년 만에 노르웨이는 다시 자주 국가가 되었습니다.
향후 십 년에 걸쳐 노르웨이는 가장 진보적인 국가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1913년에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여성의 선거권을 도입했습니다. 의회에서는 병가 급여, 출고 검사, 노동자 안전법 및 일일 근로 시간을 10시간으로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자본주의 부호들을 괴롭혔습니다. 해안 지역을 따라 철도가 깔렸고, 1909년에는 베르겐 선이 완공되었습니다. 특히 수력발전소를 비롯한 산업 발전소가 급격한 속도로 건설되기 시작되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남극에 도달한 아문센, 스베르드루프, 난센을 비롯한 노르웨이의 탐험가들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고, 실로 노르웨이는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스칸디나비아의 인접 국가들처럼 노르웨이 역시 유럽의 위기와 전쟁에 개입하지 않기 노력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노르웨이는 해안 항해로의 사용을 금지하고 노르웨이의 바다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침범할 수 있는 해군을 보유한 영국과 산업용 무기 공장의 운영을 위해 노르웨이 북부의 철광석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 독일 사이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1940년 4월, 나치 독일은 광석의 육상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침공한 후 빠르게 점령했습니다. 노르웨이 정부는 망명길에 나섰고 악명 높은 비드쿤 크비슬링은 독일과의 협력을 추구하는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이후로 '크비슬링'은 '반역자'를 의미하는 신조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특공대 급습과 파르티잔 행위를 제외하고 노르웨이는 전반적으로 전쟁의 주변을 겉돌았지만 전쟁 전에 구축된 국가의 상선 선단(당시 세계 4위 규모) 중 80% 가량이 동맹국 지원을 위해 빠져나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노르웨이는 전통적인 중립 체제로 되돌아갔고 국제연합의 외교 정책에 노력을 집중했으며 노르웨이 출신인 트뤼그베 리가 8월에 초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냉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누구도 중립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1949년 노르웨이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창립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외국 병력의 주둔이나 핵무기의 반입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1969년에는 북해에서 유전(에코피스크 유전)이 발견되어 국가 경제에 수십 억 달러가 국고로 쏟아져 들어왔으며, 덕분에 노르웨이는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를 감안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생활 수준이 높은 국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노르웨이인들은 전쟁 이후에 행복한 삶을 영위하거나 겨울 스포츠를 즐기거나 두 차례의 올림픽을 개최하거나 관광객을 들이는 데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유닛은 조선 기술 연구 후 해양 타일로 이동할 수 있게 됩니다. 해상 근접 유닛은 중립 지역에서 체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유닛은 승선 또는 하선 시, 추가 이동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역사적 배경
노르웨이의 바이킹족은 노르웨이를 떠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서기 800년까지 이들은 셰틀랜드, 오크니, 페로스, 헤브리디스와 사람들의 관심이 적은 여러 지역을 식민지화하였습니다. 820년경에 이들은 아일랜드 서부 해안에 정착지를 형성했고 더블린을 비롯하여 섬에서 가장 위대한 몇몇 도시들을 건립했습니다. 또한 870년경에는 아이슬란드를 발견하였고, 즉시 400명의 족장들이 영토를 분할했습니다. 100년 후에는 그린란드에 바이킹이 출몰했고 레이프 에릭손은 서기 1000년경에 북아메리카에 상륙했지만 이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노르웨이 자체는 통일조차 되지 않았으며 통치권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몇몇 약소 왕국만이 존재했을 뿐입니다.
하랄 페어헤어는 노르웨이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872년경의 하프르스피오르 전투에서 그와 경합 중이던 모든 족장을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바이킹의 기록이 신빙성이 없는 만큼 역사학자들도 정확한 날짜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통일 노르웨이의 진정한 왕이 된 인물은 1015년에 왕좌에 오른 올라프 하랄드손이었습니다. 비록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영주가 주기적으로 분립을 시도했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성 올라프'는 국가 전체를 기독교화하고 오딘, 토르와 발할라 등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현지 정부 기관에서 기독교를 의무화하고 교회를 건축하는 한편, 이교도 신전을 철거하고 트론헤임을 기독교의 중심지로 선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강제했습니다. 올라프는 스티클레스타드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노르웨이에는 기독교가 정착되었습니다.
비록 하랄드 하르드라다는 1066년에 영국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시도했다가 스템포드 브리지에서 패배했지만 그의 가문은 1130년에 시구르드 마구노손('크루세이더')이 사망할 때까지 노르웨이를 통치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100년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1217년에는 호콘 4세가 전쟁을 마무리한 후 스베레 왕조를 세웠습니다. 호콘과 그의 후손들의 통치 아래에 노르웨이는 정치와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노르웨이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모두 합병했습니다. 1266년, 기능을 잃은 다수의 법규를 개정하여 '법의 개정자'로 불리는 망누스 4세는 사나운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헤브리디스를 지켜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도와 맨 섬을 스코틀랜드 국왕에게 판매했습니다. 셰틀랜드와 제도 역시 1468년에 매각되었습니다.
스칸디나비아에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찾아왔고 노르웨이인들은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이킹 상인들은 남쪽으로는 중동, 동쪽으로는 러시아의 황무지, 그리고 서쪽으로는 영국 제도로 항해하여 모피, 전나무, 어류와 광석 등의 원재료를 판매하여 거둔 부를 가지고 고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해안 지역을 따라 농업이 번창했고, 한편 예술 분야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노르웨이의 장인들은 나무와 금속을 사용하여 오세베르그에서 우르네스에 이르는 여러 독특한 양식의 예술품을 만들어냈습니다. 노르웨이의 선박 제작자들은 대양을 횡단할 수 있는 배를 만들었습니다. 노르웨이의 대장장이들은 유럽 최고의 무기와 사슬 갑옷을 벼렸는데, 비록 바이킹 왕국 간에는 평화가 존재했지만, 노르웨이인들은 항상 주위에 누군가를 공격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이러한 무기와 갑옷이 도움되었습니다.
1349년쯤에 흑사병이 스칸디나비아에 창궐하여 향후 몇 년에 걸쳐 인구의 50%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인명 손실로 인해 자연스럽게 세금은 감소했고, 왕실에 집중되어 있던 권한이 분산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가톨릭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올렸으며 트론헤임의 대주교가 국무원에 자리를 요구하고 이를 얻었을 만큼 그 위세가 막강해졌습니다. 14세기 후반에는 한자 동맹이 조금씩 노르웨이의 교역로를 잠식하기 시작했고 1343년에는 베르겐에 콘토르('외국인용 교역소')를 건설했으며 1400년에는 도시에 자체 본부를 마련하고 어선단과 교역할 수 있는 독점 권한을 확보했습니다. 베르겐은 1600년대 중반까지 한자 동맹의 손아귀 안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옛 바이킹 왕국들을 통일하여 어려움과 맞선다는 관념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섯 살이었던 올라프 2세는 조부가 사망한 1376년 5월에 덴마크의 왕위를 상속받았으며 그의 부친이 사망한 후에는 그의 뒤를 이어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고, 향후 400년 동안 노르웨이는 이중 왕국의 일부인 코펜하겐에서 통치됩니다. 머지않아 덴마크의 섭정 여왕 마르그레테 1세가 통치권을 스웨덴의 왕좌와 합쳤고, 이로써 세 왕국은 물론 노르웨이의 속국과 스웨덴 왕실을 통한 핀란드까지 포함하는 칼마르 동맹이 결성되었습니다. 나날이 커지는 한자 동맹과 발트 해의 독일 왕자들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결성된 동맹은 스톡홀름 '피의 목욕' 사건으로 발발한 스웨덴 혁명으로 인해 구스타파 바사가 '자유 스웨덴'의 왕으로 즉위한 1523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카르말 동맹은 개혁으로 인한 혼란을 제외하고는 노르웨이에 상당한 이점을 선사했습니다. 덴마크-노르웨이의 왕인 프리드리히 1세는 루터의 이단적인 생각을 맘에 들어했습니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1529년에는 왕이 노르웨이인들에게 개신교를 강요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상한 대로 저항 운동은 최근에 직위에 오른 트론헤임의 대주교가 이끌었으며 그는 가톨릭 신자로 나이가 많았던 크리스티안 2세를 망명길에서 불러들였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사로잡혔고 남은 일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의 사망 이후에 이어진 내전에서 노르웨이의 가톨릭 신자들은 다시 전복을 꾀하였지만, 이번에는 더욱 참담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승리를 거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3세는 대주교를 추방했고 1536년에는 공동 왕국이었던 노르웨이를 덴마크의 지방으로 강등시켰으며 이듬해에는 노르웨이에서 루터교를 의무화했습니다.
이후에는 노르웨이인들이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잠잠해졌습니다. 성미 급한 덴마크인들이 벌이는 전쟁에 끌려가는 경우도 간혹 발생했습니다. 여기에 포함되는 칼마르 전쟁(1611-1613년), 30년 전쟁(1618-1648년)과 제2차 북방전쟁(1657-1660년)으로 인해 국경이 바뀌었지만 전반적으로는 모든 것이 수월했습니다. 인구는 1500년부터 1800년까지 300년에 걸쳐 약 750,000명으로 늘어났고, 덴마크의 행정 체계는 개혁되었고 노르웨이는 카운티로 구분되었습니다. 비록 노르웨이 전역에는 정부에서 임명한 무려 1,600명의 공무원이 존재하지만 유능한 왕들의 통치가 계속되면서 정부의 부패가 사라졌습니다. 적어도 덴마크의 경우에는 안타깝게도 나라가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패색이 짙은 진영에 서게 되었습니다.
모든 상황이 끝났을 때에는 1814년 5월에 국회가 소집되어 입헌군주제를 위한 헌법을 제정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가 스웨덴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1814년 7월에 스웨덴은 침공을 감행했고, 모스 조약을 통해 노르웨이가 항복하고 제대로 처신할 경우 헌법에 동의하기로 했습니다. 이로써 스웨덴과 노르웨이 간의 입헌 연합이 시작되었고 두 왕관의 새로운 주인으로 스웨덴의 군주인 카를 요한이 선택되었습니다. 태평스러운 스웨덴인들은 노르웨이인들에게 많은 자유를 허용했고 노르웨이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확산되었습니다. 1816년에는 국가 화폐(스피시스달러, speciedaler)를 보유한 노르웨이 은행이 설립되었고 1821년에는 옛 노르웨이 귀족제가 국회에 의해 폐지되었습니다. 1832년에는 농민들이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자신들의 인원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같은 해에 진행된 모든 선거에서 의회다수당을 차지했습니다. 따라서 농촌세가 감소했고 수입 관세는 상승했으며 시의회에서 행정을 운영하도록 하는 지방 의회 법안(Local Committees Act)이 통과되었습니다.
스웨덴이 노르웨이와의 자유 교역 협정을 폐지하고 두 국가 간의 경계를 그은 후 노르웨이의 외무부 장관 임명을 거부했을 때에는 독립을 위한 소요가 노르웨이 전역에서 확산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1905년에 왕이 의회의 투표 결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의 자체 외무부 장관 임명권을 다시 거부하자 의회에서는 연합을 깨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어진 국민 투표에서는 노르웨이 국민 중 184명만이 연합 유지에 표를 던졌습니다. 새로운 노르웨이 정부에서는 입헌 왕권을 덴마크의 왕자에게 제안했고 이를 수락한 칼 왕자는 호콘 7세가 되었습니다. 500년 만에 노르웨이는 다시 자주 국가가 되었습니다.
향후 십 년에 걸쳐 노르웨이는 가장 진보적인 국가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1913년에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여성의 선거권을 도입했습니다. 의회에서는 병가 급여, 출고 검사, 노동자 안전법 및 일일 근로 시간을 10시간으로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자본주의 부호들을 괴롭혔습니다. 해안 지역을 따라 철도가 깔렸고, 1909년에는 베르겐 선이 완공되었습니다. 특히 수력발전소를 비롯한 산업 발전소가 급격한 속도로 건설되기 시작되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남극에 도달한 아문센, 스베르드루프, 난센을 비롯한 노르웨이의 탐험가들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고, 실로 노르웨이는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스칸디나비아의 인접 국가들처럼 노르웨이 역시 유럽의 위기와 전쟁에 개입하지 않기 노력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노르웨이는 해안 항해로의 사용을 금지하고 노르웨이의 바다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침범할 수 있는 해군을 보유한 영국과 산업용 무기 공장의 운영을 위해 노르웨이 북부의 철광석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 독일 사이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1940년 4월, 나치 독일은 광석의 육상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침공한 후 빠르게 점령했습니다. 노르웨이 정부는 망명길에 나섰고 악명 높은 비드쿤 크비슬링은 독일과의 협력을 추구하는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이후로 '크비슬링'은 '반역자'를 의미하는 신조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특공대 급습과 파르티잔 행위를 제외하고 노르웨이는 전반적으로 전쟁의 주변을 겉돌았지만 전쟁 전에 구축된 국가의 상선 선단(당시 세계 4위 규모) 중 80% 가량이 동맹국 지원을 위해 빠져나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노르웨이는 전통적인 중립 체제로 되돌아갔고 국제연합의 외교 정책에 노력을 집중했으며 노르웨이 출신인 트뤼그베 리가 8월에 초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냉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누구도 중립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1949년 노르웨이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창립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외국 병력의 주둔이나 핵무기의 반입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1969년에는 북해에서 유전(에코피스크 유전)이 발견되어 국가 경제에 수십 억 달러가 국고로 쏟아져 들어왔으며, 덕분에 노르웨이는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를 감안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생활 수준이 높은 국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노르웨이인들은 전쟁 이후에 행복한 삶을 영위하거나 겨울 스포츠를 즐기거나 두 차례의 올림픽을 개최하거나 관광객을 들이는 데 시간을 할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