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헝가리 왕국은 중앙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로 활약하며 지역 내 군주와 왕국의 역사와 영향력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다민족과 다언어의 특성이 있는 왕국의 문화적 기여와 군대사는 서유럽과 동유럽 간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왕국은 부다페스트를 양분하는 다뉴브강을 비롯한 여러 강이 관통하고 있으며, 여러 높은 산맥이 서 있는 카르파티아 분지의 넓은 평원을 품고 있습니다. 헝가리의 온천은 로마 시절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주요 경로에 자리 잡은 왕국의 전략적 입지 덕분에 헝가리는 여러 왕실과 야심에 찬 귀족들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아르파드가 이끄는 마자르인들은 10세기에 헝가리 공국을 세웠을 당시 기존의 반유랑적 생활과 약탈적 습관보다는 봉건적 존재를 선호했지만 새롭게 편입된 슬라브족의 단어를 자신들의 토착어에 도입하는 등 이전 생활 양식의 요소를 어느 정도 유지했습니다. 왕국 자체는 신생 왕국인 헝가리 왕국의 이슈트반 1세에 의해 정착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공식 종교로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헝가리 왕국의 영토는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라는 제유적 명칭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하지만 법적으로는 왕의 여러 소유지에 군주와 관련된 구체적이고 합법적인 상태가 적용되어 있었음).
헝가리 왕국의 귀족은 높은 수준의 자유를 누렸지만 왕은 언드라시 2세가 금인칙서를 공포한 이후로 상당한 제약을 받았습니다. 귀족은 징세 대상이 아니었고 왕이 법의 테두리 밖에서 행동할 경우 왕에게 불복종할 권리가 있었으며 왕국 국경을 벗어난 지역에서의 전쟁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고 강력한 계급 체계보다는 귀족 간의 평등한 호칭을 확립했습니다. 금인칙서와 영국의 마그나 카르다에서는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241년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의 유럽 침략은 왕국에 재앙으로 다가왔습니다(왕국 대부분이 유럽에 속해 있었음). 벨라 4세는 향후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일련의 국경 요새를 건설했지만 다른 유럽 강대국과의 추가적인 갈등 때문에 왕국이 약화되었고 결국 1301년에는 아르파드 왕조가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이후에는 앙주 가문이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통치했으며 여러 신성로마 황제와 같이 왕조와 무관한 통치자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중세시대가 종식되고 이탈리아에서 논의 중인 여러 아이디어가 근세의 전부였을 당시 마티아스 코르비누스가 회의를 통해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왕국은 그의 통치 아래에 군대를 확대하고 행정을 개혁했습니다.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의 재위 시절은 헝가리 왕국의 황금기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지만 이러한 황금기는 오스만의 술레이만 1세와 헝가리의 루이 2세 사이에 발발한 재앙적인 모하치 전투로 인해 급격한 몰락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모하치 전투는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입니다. 중기사단과 징집 보병으로 구성된 한물간 봉건 세력으로 이루어진 헝가리의 미약한 군대는 규모가 거의 두 배에 달했던 오스만 군대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오스만 군대는 근대적인 포병대 원칙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머스킷으로 무장한 정예 예니체리가 중심에 포진되었습니다. 헝가리의 루이 왕과 수많은 헝가리 귀족이 전장에서 학살당했습니다. 전투 후 오스만은 헝가리 왕국을 신성로마제국과 분할한 후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완충국으로 활용했습니다.
향후 350년 동안 헝가리 왕국은 오스만 제국과 신성로마제국과의 잦은 분쟁에 휘말렸으며, 자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힘이 부족하고 중앙 유럽의 지정학적 계산에서는 간과하기에는 과도한 힘을 가진 왕국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귀족의 전통적인 자율성은 말 그대로 전통으로 남았고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통치자는 헝가리의 정치적 혹은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이러한 권한을 강제로 반복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헝가리 정체성의 정신이 완전히 소멸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독립 정신은 합스부르크의 통치에 대한 여러 차례의 반란 시도와 공공연한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던 1703~1711년 사이에는 트란실바니아의 왕세자인 프란치스 라코츠 2세가 반란을 교사했지만(라코츠 반란) 동맹과 국외 지원의 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848년의 유럽 혁명으로 헝가리는 오랫동안 염원하던 독립을 얻는 듯했습니다. 영토 전역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합스부르크는 헝가리에 대한 일체의 통치권을 젊은 세대의 열정적인 애국자들에게 빼앗길 뻔했습니다. 합스부르크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동맹을 통해서만 원래의 통치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1867년의 타협 과정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중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로 정식화되었습니다. 마침내 합스부르크는 제국에 대한 헝가리 왕국의 중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합스부르크 제국이 붕괴되면서 왕국 역시 분해되고 말았습니다. 전간기에는 단명한 공화국들의 통치가 이루어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혼란 속에서 왕국은 되살아난 우익 세력에 의해 재건되었습니다. 헝가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에 합류했습니다(헝가리 역사에서 특히 암울했던 기간이었음). 1944년, 헝가리 왕국은 진군하는 소비에트군에 점령당하며 멸망하고 말았습니다(물론 현재의 헝가리는 존속되었음).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는 경이로운 건축물, 활기 넘치는 문화와 국제적인 패션 감각을 지닌 유럽 최고의 도시 중 하나입니다. 부다페스트의 이름은 세 개의 도시(부다, 페슈트, 오부다)에서 비롯되었고 켈트족 당시의 정착지가 있는 이 도시는 현재까지도 패션과 관련된 오랜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뉴브를 따라 자리 잡은 도심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헝가리 왕국은 중앙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로 활약하며 지역 내 군주와 왕국의 역사와 영향력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다민족과 다언어의 특성이 있는 왕국의 문화적 기여와 군대사는 서유럽과 동유럽 간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왕국은 부다페스트를 양분하는 다뉴브강을 비롯한 여러 강이 관통하고 있으며, 여러 높은 산맥이 서 있는 카르파티아 분지의 넓은 평원을 품고 있습니다. 헝가리의 온천은 로마 시절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주요 경로에 자리 잡은 왕국의 전략적 입지 덕분에 헝가리는 여러 왕실과 야심에 찬 귀족들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아르파드가 이끄는 마자르인들은 10세기에 헝가리 공국을 세웠을 당시 기존의 반유랑적 생활과 약탈적 습관보다는 봉건적 존재를 선호했지만 새롭게 편입된 슬라브족의 단어를 자신들의 토착어에 도입하는 등 이전 생활 양식의 요소를 어느 정도 유지했습니다. 왕국 자체는 신생 왕국인 헝가리 왕국의 이슈트반 1세에 의해 정착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공식 종교로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헝가리 왕국의 영토는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라는 제유적 명칭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하지만 법적으로는 왕의 여러 소유지에 군주와 관련된 구체적이고 합법적인 상태가 적용되어 있었음).
헝가리 왕국의 귀족은 높은 수준의 자유를 누렸지만 왕은 언드라시 2세가 금인칙서를 공포한 이후로 상당한 제약을 받았습니다. 귀족은 징세 대상이 아니었고 왕이 법의 테두리 밖에서 행동할 경우 왕에게 불복종할 권리가 있었으며 왕국 국경을 벗어난 지역에서의 전쟁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고 강력한 계급 체계보다는 귀족 간의 평등한 호칭을 확립했습니다. 금인칙서와 영국의 마그나 카르다에서는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241년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의 유럽 침략은 왕국에 재앙으로 다가왔습니다(왕국 대부분이 유럽에 속해 있었음). 벨라 4세는 향후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일련의 국경 요새를 건설했지만 다른 유럽 강대국과의 추가적인 갈등 때문에 왕국이 약화되었고 결국 1301년에는 아르파드 왕조가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이후에는 앙주 가문이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통치했으며 여러 신성로마 황제와 같이 왕조와 무관한 통치자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중세시대가 종식되고 이탈리아에서 논의 중인 여러 아이디어가 근세의 전부였을 당시 마티아스 코르비누스가 회의를 통해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왕국은 그의 통치 아래에 군대를 확대하고 행정을 개혁했습니다.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의 재위 시절은 헝가리 왕국의 황금기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지만 이러한 황금기는 오스만의 술레이만 1세와 헝가리의 루이 2세 사이에 발발한 재앙적인 모하치 전투로 인해 급격한 몰락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모하치 전투는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입니다. 중기사단과 징집 보병으로 구성된 한물간 봉건 세력으로 이루어진 헝가리의 미약한 군대는 규모가 거의 두 배에 달했던 오스만 군대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오스만 군대는 근대적인 포병대 원칙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머스킷으로 무장한 정예 예니체리가 중심에 포진되었습니다. 헝가리의 루이 왕과 수많은 헝가리 귀족이 전장에서 학살당했습니다. 전투 후 오스만은 헝가리 왕국을 신성로마제국과 분할한 후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완충국으로 활용했습니다.
향후 350년 동안 헝가리 왕국은 오스만 제국과 신성로마제국과의 잦은 분쟁에 휘말렸으며, 자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힘이 부족하고 중앙 유럽의 지정학적 계산에서는 간과하기에는 과도한 힘을 가진 왕국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귀족의 전통적인 자율성은 말 그대로 전통으로 남았고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통치자는 헝가리의 정치적 혹은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이러한 권한을 강제로 반복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헝가리 정체성의 정신이 완전히 소멸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독립 정신은 합스부르크의 통치에 대한 여러 차례의 반란 시도와 공공연한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던 1703~1711년 사이에는 트란실바니아의 왕세자인 프란치스 라코츠 2세가 반란을 교사했지만(라코츠 반란) 동맹과 국외 지원의 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848년의 유럽 혁명으로 헝가리는 오랫동안 염원하던 독립을 얻는 듯했습니다. 영토 전역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합스부르크는 헝가리에 대한 일체의 통치권을 젊은 세대의 열정적인 애국자들에게 빼앗길 뻔했습니다. 합스부르크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동맹을 통해서만 원래의 통치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1867년의 타협 과정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중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로 정식화되었습니다. 마침내 합스부르크는 제국에 대한 헝가리 왕국의 중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합스부르크 제국이 붕괴되면서 왕국 역시 분해되고 말았습니다. 전간기에는 단명한 공화국들의 통치가 이루어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혼란 속에서 왕국은 되살아난 우익 세력에 의해 재건되었습니다. 헝가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에 합류했습니다(헝가리 역사에서 특히 암울했던 기간이었음). 1944년, 헝가리 왕국은 진군하는 소비에트군에 점령당하며 멸망하고 말았습니다(물론 현재의 헝가리는 존속되었음).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는 경이로운 건축물, 활기 넘치는 문화와 국제적인 패션 감각을 지닌 유럽 최고의 도시 중 하나입니다. 부다페스트의 이름은 세 개의 도시(부다, 페슈트, 오부다)에서 비롯되었고 켈트족 당시의 정착지가 있는 이 도시는 현재까지도 패션과 관련된 오랜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뉴브를 따라 자리 잡은 도심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