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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지도자
도시 국가
특수지구
건물
불가사의 및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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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닛 진급
위인
기술
사회 제도
정부 및 정책
종교
지형 및 지형 특성
자원
시설 및 교역로
총독
역사적 순간

문명

지도자

소개

간디

고르고

기타르자

길가메시

나디르 샤

도쿠가와

라우타로

람세스 2세

로버트 1세

루트비히 2세

메넬리크 2세

몬테수마

바실리우스 2세

빅토리아(제국 시대)

빅토리아(증기 시대)

빌헬미나

살라딘(수상)

살라딘(술탄)

샤카

선덕

세종대왕

시몬 볼리바르

아마니토레

알렉산더

암비오릭스

야드비가

에이브러햄 링컨

엘리자베스 1세

여섯하늘 여왕

영락제

율리우스 카이사르

은징가 음반데

음벰바 아 은징가

자야바르만 7세

자오 부인

존 커틴

주앙 3세

진시황(천명)

진시황(통일한 자)

징기스칸

찬드라굽타

측천무후

카트린 데메디치(검은 여왕)

카트린 데메디치(위엄)

쿠빌라이칸(몽골)

쿠빌라이칸(중국)

클레오파트라(이집트)

클레오파트라(프톨레마이오스)

키루스

타마르

테오도라

테오도어 루즈벨트(불 무스)

테오도어 루즈벨트(의용 기병대)

토미리스

트라야누스

파운드메이커

페드로 2세

페리클레스

표트르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필립 2세

하랄드 하르드라다(바랑인)

하랄드 하르드라다(콘지)

함무라비

호조 도키무네

빅토리아
특유 능력

대영제국의 평화

고향 대륙 외의 대륙에 세운 모든 도시가 무료 근접 유닛을 획득합니다. 세운 도시에 영국 해군 기지창을 건설하면 무료 근접 유닛이 추가로 제공됩니다. 군사 과학 기술을 완료하면 특유의 레드코트 유닛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요약
빅토리아는 자신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아주 온화하고 예의 바른 여인입니다. 하지만 빅토리아를 플레이어의 대륙에 들이지 않을 경우 그녀의 적대심을 살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접근 방식
빅토리아의 잉글랜드는 영국인의 힘을 전 대륙에 과시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녀는 처음에 왕립조선소와 영국 해적을 이용하여 바다를 장악하고, 산업 시대에는 레드코트로 밀고 들어가 전 세계 곳곳에 자신의 입지를 확립합니다. 확대된 영향력은 잉글랜드의 배가된 고고학을 보완하여 문화 승리를 향한 큰 도약을 내디딜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역사적 배경
앨버트 왕자와 결혼하여 아홉 명의 자식을 낳고 42명의 손주를 갖게 됐으며, 결국 유럽의 거의 모든 왕실과 친척 관계를 맺게 되는 윈저 가문을 이룬 빅토리아 여왕은 다사다난했던 63년의 세월에 걸쳐 영국을 통치했습니다. 빅토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추정 상속인으로서 훈련을 받았고, 그녀는 자신의 유년 시절이 '비교적 우울했다'고 말했습니다. 빅토리아의 어머니는 과잉보호가 지나칠 정도로 심했고, 빅토리아는 '켄싱턴 체제' 속에서 다른 아이들과 격리되어 양육되었습니다. 켄싱턴 체제는 모든 행동 양상에 적용되는 정교한 규칙과 규정의 모음집으로 빅토리아는 '바람직하지 못한' 어떠한 이들과도 상종할 수 없었고, 어머니의 눈에는 '바람직한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빅토리아는 수많은 규칙에 짜증을 냈지만 그녀는 평생을 궁에 머물며 가정 교사를 통해 매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총명한 여인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공주는 국왕인 선친에게 두 가지를 요청했습니다. 하나는 매일 한 시간 동안 하녀들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부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침소에서 나와 자신만의 침소를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1836년 5월, 그녀는 삼촌이자 벨기에의 국왕인 레오포드로부터 수많은 구혼자 중 한 명이었던 색스-코버그 및 고타 가문의 앨버트 왕자를 소개받았습니다. 앨버트는 빅토리아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고, 그녀는 레오포드에게 서신을 작성하여 "소중한 앨버트를 통해 커다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전했지만 17세에 불과했던 그녀에게는 아직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1837년 5월에 빅토리아가 18번째 생일을 맞이하면서 영국은 대비, 그리고 야망에 사로잡힌 그녀의 정부, 존 콘로이 경에 의한 섭정 정치를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빅토리아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천명한 윌리엄 국왕이 특히 두려워한 상황이었습니다. 빅토리아의 부친은 한 달 후에 숨을 거두었고 그녀는 대영제국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빅토리아는 가장 먼저 콘로이 경을 쫓아내고 대비와 관련된 모든 인척 관계를 잘라냈습니다. 앨버트는 런던으로 돌아와 빅토리아와 새롭게 시간을 보냈고 5일 후인 1839년 10월에 윈저 성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앨버트는 그가 가진 결함과 상관없이 빅토리아에게 안정감을 선사했고 빅토리아 역시 사회 개혁과 '근대적인' 혁신을 믿은 그의 지적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기나긴 재위 기간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아편 전쟁, 앵글로-시크 전쟁, 코사 전쟁, 영국-미얀마 전쟁, 크림 전쟁, 앵글로-페르시아 전쟁, 그녀에게 '여제'라는 호칭을 선사한 대인 정책, 아샨티 전쟁, 줄루 전쟁, 두 차례의 보어 전쟁, 마디스트 전쟁과 의화단 사건을 비롯한 먼 지역의 수많은 전쟁사로 얼룩졌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일련의 정사를 수많은 수상들과 의회에 맡긴 후 임신을 반복하고 앨버트가 종용한 하층 계급을 위한 사회 개혁에 몰두했습니다.

잉글랜드는 산업 사회의 각종 문제를 안고 있었고, 빅토리아와 앨버트로 상징되는 왕실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도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혹자들은 불운한 이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술, 마약 또는 빈곤 등으로부터 자신을 자가 '치료'하는 자립적 철학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정부나 부유층에서 다수의 몽매한 군중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빅토리아와 앨버트가 후원하는 수백 개의 자선 단체가 잉글랜드 전역에 설립되었고 로버트 오웬스의 유토피아 사회와 같은 사회적 '실험'이 착수되었습니다. 디킨스와 새커리 등의 작가들은 노동 계층의 역경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영국 왕실은 아직까지 여론을 흔들 수 있을 정도로 정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고, 빅토리아는 모든 어린이에게 열 살까지 무상 교육을 제공하는 초등교육법, 그리고 이혼을 종교가 아닌 법적으로 진행하고 이혼한 여성이 자신의 공민권, 문제, 재무적인 측면을 온전히 관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이혼법 등의 개혁을 제안했습니다.

한편 부유층의 무료한 호사가들과 앨버트는 과학을 이용하여 국민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빅토리아 역시 이러한 노력에 함께 뜻했습니다. 왕실에서는 산 정상을 등반하고 사막과 정글을 횡단하고 이국적인 동물들을 사냥하거나 수집하고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서 생활하며 온갖 지역의 정사에 참견하며 전 세계를 누비는 영국의 모험가들을 응원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이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이성주의가 만연했고 심지어는 빅토리아 조차 기술을 통해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도덕적 붕괴를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왕립원예협회 및 자연과학 진흥을 위한 런던 왕립학회의 전시회와 1851년에 개최된 최초의 '만국 박람회'인 만국 산업 제품 대박람회를 관람하기 위해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했습니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1858년에 발생한 '대악취 사건'은 왕실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공학적 개과인 '런던 하수도 시설'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결과를 자아냈습니다.

1861년 12월, 앨버트 왕자는 장티푸스로 사망했습니다. 항상 과묵하고 강해 보였던 빅토리아는 크게 상심하여 여생을 슬퍼하며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스코틀랜드 출신 종복으로 항상 그녀의 곁을 지킨 존 브라운을 어느 정도의 위안처로 삼았다는 소문이 있기도 합니다. 둘의 관계가 어찌 됐든 빅토리아는 앨버트가 죽은 이후로 계속해서 성과 왕궁에만 머물렀고 대중에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으며 런던에도 거의 발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빅토리아가 재위한 지 50년이 된 1887년 무렵에는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세계 최초의 진정한 '초강대국'이었고 전 세계의 사회, 문화, 금융 및 정치에까지 그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50주년 기념 행사는 빅토리아의 희망에 따라 숭고하고 도의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웨스터민스터 대성당에서는 행렬과 추수감사절 예배가 열렸습니다. 빅토리아의 즉위 60주년 행사가 다가왔고, 그녀는 영국이나 스코틀랜드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에 걸쳐 재위한 조지 3세의 기록을 뛰어 넘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재위 기간보다는 제국의 축제로서 기념식을 진행해 달라며 고집했습니다. 1901년 1월 여왕 빅토리아는 '몸에 힘이 없고 편치 않음'을 느꼈고 1월 22일에 조용히 숨을 거두며, 빅토리아의 최후는 그녀가 영위했던 삶처럼 위엄과 숭고함으로 가득했습니다.
icon_leader_victoria
순간적인 짜증과 불편함으로 인한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감정을 다른 이에게 표출하지 말라.

특성

문명
icon_civilization_england
영국
특수 유닛
레드코트

선호

성향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자기 고향 대륙의 문명을 좋아하며, 다른 모든 대륙으로 확장하려 합니다. 영국의 도시가 없는 대륙에 있는 문명을 싫어합니다.
종교
icon_religion_protestantism
개신교
icon_leader_victoria
순간적인 짜증과 불편함으로 인한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감정을 다른 이에게 표출하지 말라.

특성

문명
icon_civilization_england
영국
특수 유닛
레드코트

선호

성향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자기 고향 대륙의 문명을 좋아하며, 다른 모든 대륙으로 확장하려 합니다. 영국의 도시가 없는 대륙에 있는 문명을 싫어합니다.
종교
icon_religion_protestantism
개신교
특유 능력

대영제국의 평화

고향 대륙 외의 대륙에 세운 모든 도시가 무료 근접 유닛을 획득합니다. 세운 도시에 영국 해군 기지창을 건설하면 무료 근접 유닛이 추가로 제공됩니다. 군사 과학 기술을 완료하면 특유의 레드코트 유닛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요약
빅토리아는 자신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아주 온화하고 예의 바른 여인입니다. 하지만 빅토리아를 플레이어의 대륙에 들이지 않을 경우 그녀의 적대심을 살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접근 방식
빅토리아의 잉글랜드는 영국인의 힘을 전 대륙에 과시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녀는 처음에 왕립조선소와 영국 해적을 이용하여 바다를 장악하고, 산업 시대에는 레드코트로 밀고 들어가 전 세계 곳곳에 자신의 입지를 확립합니다. 확대된 영향력은 잉글랜드의 배가된 고고학을 보완하여 문화 승리를 향한 큰 도약을 내디딜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역사적 배경
앨버트 왕자와 결혼하여 아홉 명의 자식을 낳고 42명의 손주를 갖게 됐으며, 결국 유럽의 거의 모든 왕실과 친척 관계를 맺게 되는 윈저 가문을 이룬 빅토리아 여왕은 다사다난했던 63년의 세월에 걸쳐 영국을 통치했습니다. 빅토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추정 상속인으로서 훈련을 받았고, 그녀는 자신의 유년 시절이 '비교적 우울했다'고 말했습니다. 빅토리아의 어머니는 과잉보호가 지나칠 정도로 심했고, 빅토리아는 '켄싱턴 체제' 속에서 다른 아이들과 격리되어 양육되었습니다. 켄싱턴 체제는 모든 행동 양상에 적용되는 정교한 규칙과 규정의 모음집으로 빅토리아는 '바람직하지 못한' 어떠한 이들과도 상종할 수 없었고, 어머니의 눈에는 '바람직한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빅토리아는 수많은 규칙에 짜증을 냈지만 그녀는 평생을 궁에 머물며 가정 교사를 통해 매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총명한 여인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공주는 국왕인 선친에게 두 가지를 요청했습니다. 하나는 매일 한 시간 동안 하녀들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부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침소에서 나와 자신만의 침소를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1836년 5월, 그녀는 삼촌이자 벨기에의 국왕인 레오포드로부터 수많은 구혼자 중 한 명이었던 색스-코버그 및 고타 가문의 앨버트 왕자를 소개받았습니다. 앨버트는 빅토리아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고, 그녀는 레오포드에게 서신을 작성하여 "소중한 앨버트를 통해 커다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전했지만 17세에 불과했던 그녀에게는 아직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1837년 5월에 빅토리아가 18번째 생일을 맞이하면서 영국은 대비, 그리고 야망에 사로잡힌 그녀의 정부, 존 콘로이 경에 의한 섭정 정치를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빅토리아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천명한 윌리엄 국왕이 특히 두려워한 상황이었습니다. 빅토리아의 부친은 한 달 후에 숨을 거두었고 그녀는 대영제국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빅토리아는 가장 먼저 콘로이 경을 쫓아내고 대비와 관련된 모든 인척 관계를 잘라냈습니다. 앨버트는 런던으로 돌아와 빅토리아와 새롭게 시간을 보냈고 5일 후인 1839년 10월에 윈저 성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앨버트는 그가 가진 결함과 상관없이 빅토리아에게 안정감을 선사했고 빅토리아 역시 사회 개혁과 '근대적인' 혁신을 믿은 그의 지적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기나긴 재위 기간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아편 전쟁, 앵글로-시크 전쟁, 코사 전쟁, 영국-미얀마 전쟁, 크림 전쟁, 앵글로-페르시아 전쟁, 그녀에게 '여제'라는 호칭을 선사한 대인 정책, 아샨티 전쟁, 줄루 전쟁, 두 차례의 보어 전쟁, 마디스트 전쟁과 의화단 사건을 비롯한 먼 지역의 수많은 전쟁사로 얼룩졌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일련의 정사를 수많은 수상들과 의회에 맡긴 후 임신을 반복하고 앨버트가 종용한 하층 계급을 위한 사회 개혁에 몰두했습니다.

잉글랜드는 산업 사회의 각종 문제를 안고 있었고, 빅토리아와 앨버트로 상징되는 왕실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도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혹자들은 불운한 이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술, 마약 또는 빈곤 등으로부터 자신을 자가 '치료'하는 자립적 철학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정부나 부유층에서 다수의 몽매한 군중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빅토리아와 앨버트가 후원하는 수백 개의 자선 단체가 잉글랜드 전역에 설립되었고 로버트 오웬스의 유토피아 사회와 같은 사회적 '실험'이 착수되었습니다. 디킨스와 새커리 등의 작가들은 노동 계층의 역경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영국 왕실은 아직까지 여론을 흔들 수 있을 정도로 정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고, 빅토리아는 모든 어린이에게 열 살까지 무상 교육을 제공하는 초등교육법, 그리고 이혼을 종교가 아닌 법적으로 진행하고 이혼한 여성이 자신의 공민권, 문제, 재무적인 측면을 온전히 관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이혼법 등의 개혁을 제안했습니다.

한편 부유층의 무료한 호사가들과 앨버트는 과학을 이용하여 국민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빅토리아 역시 이러한 노력에 함께 뜻했습니다. 왕실에서는 산 정상을 등반하고 사막과 정글을 횡단하고 이국적인 동물들을 사냥하거나 수집하고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서 생활하며 온갖 지역의 정사에 참견하며 전 세계를 누비는 영국의 모험가들을 응원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이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이성주의가 만연했고 심지어는 빅토리아 조차 기술을 통해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도덕적 붕괴를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왕립원예협회 및 자연과학 진흥을 위한 런던 왕립학회의 전시회와 1851년에 개최된 최초의 '만국 박람회'인 만국 산업 제품 대박람회를 관람하기 위해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했습니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1858년에 발생한 '대악취 사건'은 왕실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공학적 개과인 '런던 하수도 시설'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결과를 자아냈습니다.

1861년 12월, 앨버트 왕자는 장티푸스로 사망했습니다. 항상 과묵하고 강해 보였던 빅토리아는 크게 상심하여 여생을 슬퍼하며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스코틀랜드 출신 종복으로 항상 그녀의 곁을 지킨 존 브라운을 어느 정도의 위안처로 삼았다는 소문이 있기도 합니다. 둘의 관계가 어찌 됐든 빅토리아는 앨버트가 죽은 이후로 계속해서 성과 왕궁에만 머물렀고 대중에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으며 런던에도 거의 발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빅토리아가 재위한 지 50년이 된 1887년 무렵에는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세계 최초의 진정한 '초강대국'이었고 전 세계의 사회, 문화, 금융 및 정치에까지 그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50주년 기념 행사는 빅토리아의 희망에 따라 숭고하고 도의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웨스터민스터 대성당에서는 행렬과 추수감사절 예배가 열렸습니다. 빅토리아의 즉위 60주년 행사가 다가왔고, 그녀는 영국이나 스코틀랜드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에 걸쳐 재위한 조지 3세의 기록을 뛰어 넘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재위 기간보다는 제국의 축제로서 기념식을 진행해 달라며 고집했습니다. 1901년 1월 여왕 빅토리아는 '몸에 힘이 없고 편치 않음'을 느꼈고 1월 22일에 조용히 숨을 거두며, 빅토리아의 최후는 그녀가 영위했던 삶처럼 위엄과 숭고함으로 가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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