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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벰바 아 은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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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통일한 자)

징기스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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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카트린 데메디치(검은 여왕)

카트린 데메디치(위엄)

쿠빌라이칸(몽골)

쿠빌라이칸(중국)

클레오파트라(이집트)

클레오파트라(프톨레마이오스)

키루스

타마르

테오도라

테오도어 루즈벨트(불 무스)

테오도어 루즈벨트(의용 기병대)

토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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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2세

페리클레스

표트르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필립 2세

하랄드 하르드라다(바랑인)

하랄드 하르드라다(콘지)

함무라비

호조 도키무네

카트린 데메디치
특유 능력

카트린의 유격대

접하는 모든 문명마다 외교 시정 레벨이 평소보다 1 높아집니다. 성 기술 연구로 무료 스파이를 1명 더 받으며 스파이를 더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을 얻습니다. 모든 스파이는 무료 진급을 가진 요원으로 시작합니다.

요약
명목 상의 문화적 플레이어인 프랑스는 위험한 상대입니다. 카트린은 플레이어의 의도를 인지하며, 스파이와 강력한 산업 시대의 군대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보호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접근 방식
클레오파트라와 진시황처럼 프랑스 역시 불가사의 경쟁의 주역이 되고 싶어합니다. 여기서 성공할 경우 문화 승리를 두고 프랑스와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합니다. 카트린이 이끄는 프랑스는 모든 경쟁국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으므로 한 발 앞서 건설하게 될 불가사의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불가사의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마찬가지로 문화 승리에 도움이 되는 샤토입니다. 이러한 모든 문화는 프랑스가 사회 제도표를 빠르게 진행하여 경쟁국보다 먼저 군단과 군대를 확보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프랑스가 군단과 군대를 제국근위대와 동시에 보유한 경우에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역사적 배경
카트린 데메디치(이탈리아명: '카트리나')는 데메디치 가문과 연루되어 있고 카페 왕조의 외가 쪽 혈통인 발루아 왕조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사학자들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카트린이 없었다면 발루아 가문은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며 프랑스 역시 당시의 시련과 문제로 인해 굴복했을 것입니다.

카트린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부와 권력을 지닌 데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습니다. 은행가, 국왕과 교황으로 이루어진 데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통치자나 다름 없었으며 카트린의 작은 할아버지는 교황 레오 10세였습니다. 교황 레오에 의해 우르비노의 공작으로 임명된 카트린의 아버지 로렌초는 그녀가 태어나자 '아들을 낳은 것만큼이나' 기뻐했다고 합니다. 총명함과 재능은 물론 공작인 아버지의 후광까지 업은 그녀에게는 온갖 기회가 열려 있었습니다. 왕족의 구혼도 계속해서 이어졌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를 비롯한 수많은 남성들의 청혼까지 거부한 그녀는 1533년 1월에 14세의 청아한 나이로 프랑스 국왕의 차남과 혼인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데메디치 출신의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가 준비한 정략 결혼이었습니다.

앙리 왕자는 수많은 정부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항상 분주했고 어린 신부는 남편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536년에는 장남인 프란시스가 감기에 걸려 사망했고 앙리와 카트린은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카트린은 갑작스럽게 왕성한 생식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8년 동안 아이를 갖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카트린은 결국 1544년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부부의 '해부학적' 이상 징후를 감지한 장 페르넬이라는 유명한 의사의 조언을 따른 카트린은 이듬해에 앙리에게 딸을 낳아 주었습니다. 페르넬의 조언이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효과만큼은 확실했습니다. 카트린은 계속해서 여덟 명의 자식을 추가로 낳았고 당시의 출산 사망률을 감안한다면 이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앙리의 선친이 1547년 3월에 사망하고 카트린은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앙리는 디안 드 푸아티에라는 첩을 매우 총애했지만 카트린에 대한 존중은 잃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카트린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허락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녀가 그렇게 원하던 샤토를 디안에게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1556년, 카트린은 쌍둥이를 낳는 과정에서 죽음의 문턱을 오갔고 이제는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카트린은 양육에 전념했고 가문의 재산과 왕비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식들이 부족함 없이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장남 외에는 자식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앙리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흑마술'에 관심이 많았던 카트린은 1556년 8월에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를 궁으로 초대하여 일곱 자녀의 별점을 보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내려옵니다.

1559년 6월, 13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스페인 필립 2세의 대리 결혼의 일환으로 앙리는 마상창술 시합에 참여하겠다며 고집을 피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크게 상처를 입고 2주 후에 숨을 거두었고,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와 결혼하여 이미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등극한 프란시스 2세는 15세의 나이에 프랑스의 국왕이 되었습니다. 기즈 형제와 로렌의 추기경은 쿠데타를 일으켜 루브르 궁전으로 진입한 후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카트린은 데메디치 가문으로부터 내려받은 정치적 통찰력과 교활함을 바탕으로 기즈 파벌과 협력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섭정 역할을 맡게 된 카트린은 나름의 권력과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과정에 착수했습니다. 카트린은 '새로 얻은 권한'을 발휘하여 앙리가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하사한 왕실 보석은 물론 그녀가 한때 강렬히 원했던 샤토까지 반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카트린은 사실상 전 국왕의 첩을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왕대비는 신교도에 대한 기즈 가문의 잔혹한 박해와 부르봉 가문의 반란 실패 사건에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또한 그녀는 새로운 대법관인 미셸 드 로피탈과 함께 법을 보호하기 위한 공통적인 목표로 뭉쳤습니다. 당시 기즈 가문에서는 신교도에 대한 집착으로 법을 우회하려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의 왕위 계승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무자비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콩데의 왕자가 군사를 일으켜 가톨릭 도시를 공격하자 카트린은 그를 왕실로 소환한 후 도착하자마자 구금했습니다. 그가 처형을 면할 수 있었던 유일한 까닭은 프란시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카트린에게는 이러한 모든 과정이 절대 장난질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결혼식, 기념식, 세례식, 만찬식을 비롯한 각종 기념일이 있을 때마다 화려한 궁중 축제(joyeuse magnificences)를 주최했습니다. 이자벨라 드 라 투르와 샤를로트 드 본느-상블랑세이 남작 부인 등으로 이루어진 카트린의 악명 높은 '유격대(L’Escadron Volant)'는 이러한 연회를 통해 각종 술책을 펼쳤습니다. 카트린은 아름다운 귀족 여성들로 구성된 '유격대'를 이용하여 왕실의 실력자들과 관계를 맺게 하고 이를 통해 얻은 '첩보'를 활용하여 계책을 꾸렸습니다. 카트린은 이러한 정보와 암살 및 협박 등을 통해 프랑스와 그녀의 직위에 대한 위협을 막아냈습니다.

카트린은 당시 열 살이었던 샤를 9세의 섭정으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완벽을 기했으며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울적하고 허약한 어린 왕은 대관식에서도 울음을 터뜨렸고 카트린은 그의 침실에서 함께 잠을 청할 정도로 샤를 9세를 철저하게 돌보았습니다. 사실상 카트린은 프랑스의 통치자나 다름 없었지만 프랑스는 몇 가지의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녀는 전형적인 데메디치의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타개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가톨릭 및 위그노 지도자들을 소환하여 상이한 교리의 간격을 좁히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실패하자 카트린은 생제르망 칙령을 발행하여 종교상의 관용을 장려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기즈 공작은 예배 중인 위그노 교도들을 공격하여 학살했고 이는 30년에 걸친 프랑스 종교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1562년의 학살 사건에 분개한 개신교 귀족들이 군사를 일으키자 카트린은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이에도 실패하자 그녀는 왕국군을 파견했습니다. 개신교인 앙투안 드 부르봉이 상처로 사망하고 가톨릭 측의 변덕스러운 기즈 공작이 암살당하자 카트린은 1563년에 앙부아즈 칙령('평화 칙령')을 선포하여 분쟁을 해결했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위그노 및 가톨릭 영주들을 소집하여 사사건건 프랑스의 내정에 간섭하는 영국으로부터 르아브르를 재탈환하도록 했습니다. 국왕 샤를 9세가 명령한 바르톨로메오 축일(밤)의 대학살을 제외한다면 이 '이탈리아 여왕'에는 모든 상황이 순탄했습니다. 샤를은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 그녀가 가장 총애하는 다른 아들이 1573년에 폴란드의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이어 앙리 3세가 1574년에 프랑스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미 영육이 강건하게 성장하여 성인이 된 앙리는 다른 형제들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앙리는 십여 년 동안 잡다한 국정 일과 관련하여 카트린의 도움을 얻었지만 그는 1588년 블루아에서 카트린이 임명한 모든 왕실 관료를 파직하여 정부에 대한 그녀의 영향력을 사실상 종식시켜 버렸습니다. 또한 앙리는 어머니의 동맹으로서 여전히 막강함을 발휘했던 기즈 가문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즈 가문의 공작이 암살당하고 다른 여덟 명의 일족이 살해당했습니다. 69세의 나이로 병실에 누워 있었던 카트린은 소식을 접한 후에도 냉정을 유지했으며 약 한 달 후인 1589년 1월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icon_leader_catherine_de_medici
잘 잘랐습니다. 이제 씨를 뿌려야 합니다.

특성

문명
icon_civilization_france
프랑스

선호

성향
검은 여왕
가능한 많은 수의 스파이와 외교적 접근권을 확보합니다. 이러한 첩보 활동을 무시하는 문명을 싫어합니다.
종교
icon_religion_catholicism
가톨릭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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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잘랐습니다. 이제 씨를 뿌려야 합니다.

특성

문명
icon_civilization_france
프랑스

선호

성향
검은 여왕
가능한 많은 수의 스파이와 외교적 접근권을 확보합니다. 이러한 첩보 활동을 무시하는 문명을 싫어합니다.
종교
icon_religion_catholicism
가톨릭교
특유 능력

카트린의 유격대

접하는 모든 문명마다 외교 시정 레벨이 평소보다 1 높아집니다. 성 기술 연구로 무료 스파이를 1명 더 받으며 스파이를 더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을 얻습니다. 모든 스파이는 무료 진급을 가진 요원으로 시작합니다.

요약
명목 상의 문화적 플레이어인 프랑스는 위험한 상대입니다. 카트린은 플레이어의 의도를 인지하며, 스파이와 강력한 산업 시대의 군대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보호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접근 방식
클레오파트라와 진시황처럼 프랑스 역시 불가사의 경쟁의 주역이 되고 싶어합니다. 여기서 성공할 경우 문화 승리를 두고 프랑스와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합니다. 카트린이 이끄는 프랑스는 모든 경쟁국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으므로 한 발 앞서 건설하게 될 불가사의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불가사의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마찬가지로 문화 승리에 도움이 되는 샤토입니다. 이러한 모든 문화는 프랑스가 사회 제도표를 빠르게 진행하여 경쟁국보다 먼저 군단과 군대를 확보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프랑스가 군단과 군대를 제국근위대와 동시에 보유한 경우에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역사적 배경
카트린 데메디치(이탈리아명: '카트리나')는 데메디치 가문과 연루되어 있고 카페 왕조의 외가 쪽 혈통인 발루아 왕조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사학자들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카트린이 없었다면 발루아 가문은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며 프랑스 역시 당시의 시련과 문제로 인해 굴복했을 것입니다.

카트린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부와 권력을 지닌 데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습니다. 은행가, 국왕과 교황으로 이루어진 데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통치자나 다름 없었으며 카트린의 작은 할아버지는 교황 레오 10세였습니다. 교황 레오에 의해 우르비노의 공작으로 임명된 카트린의 아버지 로렌초는 그녀가 태어나자 '아들을 낳은 것만큼이나' 기뻐했다고 합니다. 총명함과 재능은 물론 공작인 아버지의 후광까지 업은 그녀에게는 온갖 기회가 열려 있었습니다. 왕족의 구혼도 계속해서 이어졌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를 비롯한 수많은 남성들의 청혼까지 거부한 그녀는 1533년 1월에 14세의 청아한 나이로 프랑스 국왕의 차남과 혼인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데메디치 출신의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가 준비한 정략 결혼이었습니다.

앙리 왕자는 수많은 정부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항상 분주했고 어린 신부는 남편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536년에는 장남인 프란시스가 감기에 걸려 사망했고 앙리와 카트린은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카트린은 갑작스럽게 왕성한 생식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8년 동안 아이를 갖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카트린은 결국 1544년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부부의 '해부학적' 이상 징후를 감지한 장 페르넬이라는 유명한 의사의 조언을 따른 카트린은 이듬해에 앙리에게 딸을 낳아 주었습니다. 페르넬의 조언이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효과만큼은 확실했습니다. 카트린은 계속해서 여덟 명의 자식을 추가로 낳았고 당시의 출산 사망률을 감안한다면 이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앙리의 선친이 1547년 3월에 사망하고 카트린은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앙리는 디안 드 푸아티에라는 첩을 매우 총애했지만 카트린에 대한 존중은 잃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카트린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허락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녀가 그렇게 원하던 샤토를 디안에게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1556년, 카트린은 쌍둥이를 낳는 과정에서 죽음의 문턱을 오갔고 이제는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카트린은 양육에 전념했고 가문의 재산과 왕비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식들이 부족함 없이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장남 외에는 자식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앙리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흑마술'에 관심이 많았던 카트린은 1556년 8월에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를 궁으로 초대하여 일곱 자녀의 별점을 보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져 내려옵니다.

1559년 6월, 13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스페인 필립 2세의 대리 결혼의 일환으로 앙리는 마상창술 시합에 참여하겠다며 고집을 피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크게 상처를 입고 2주 후에 숨을 거두었고,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와 결혼하여 이미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등극한 프란시스 2세는 15세의 나이에 프랑스의 국왕이 되었습니다. 기즈 형제와 로렌의 추기경은 쿠데타를 일으켜 루브르 궁전으로 진입한 후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카트린은 데메디치 가문으로부터 내려받은 정치적 통찰력과 교활함을 바탕으로 기즈 파벌과 협력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섭정 역할을 맡게 된 카트린은 나름의 권력과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과정에 착수했습니다. 카트린은 '새로 얻은 권한'을 발휘하여 앙리가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하사한 왕실 보석은 물론 그녀가 한때 강렬히 원했던 샤토까지 반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카트린은 사실상 전 국왕의 첩을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왕대비는 신교도에 대한 기즈 가문의 잔혹한 박해와 부르봉 가문의 반란 실패 사건에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또한 그녀는 새로운 대법관인 미셸 드 로피탈과 함께 법을 보호하기 위한 공통적인 목표로 뭉쳤습니다. 당시 기즈 가문에서는 신교도에 대한 집착으로 법을 우회하려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의 왕위 계승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무자비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콩데의 왕자가 군사를 일으켜 가톨릭 도시를 공격하자 카트린은 그를 왕실로 소환한 후 도착하자마자 구금했습니다. 그가 처형을 면할 수 있었던 유일한 까닭은 프란시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카트린에게는 이러한 모든 과정이 절대 장난질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결혼식, 기념식, 세례식, 만찬식을 비롯한 각종 기념일이 있을 때마다 화려한 궁중 축제(joyeuse magnificences)를 주최했습니다. 이자벨라 드 라 투르와 샤를로트 드 본느-상블랑세이 남작 부인 등으로 이루어진 카트린의 악명 높은 '유격대(L’Escadron Volant)'는 이러한 연회를 통해 각종 술책을 펼쳤습니다. 카트린은 아름다운 귀족 여성들로 구성된 '유격대'를 이용하여 왕실의 실력자들과 관계를 맺게 하고 이를 통해 얻은 '첩보'를 활용하여 계책을 꾸렸습니다. 카트린은 이러한 정보와 암살 및 협박 등을 통해 프랑스와 그녀의 직위에 대한 위협을 막아냈습니다.

카트린은 당시 열 살이었던 샤를 9세의 섭정으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완벽을 기했으며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울적하고 허약한 어린 왕은 대관식에서도 울음을 터뜨렸고 카트린은 그의 침실에서 함께 잠을 청할 정도로 샤를 9세를 철저하게 돌보았습니다. 사실상 카트린은 프랑스의 통치자나 다름 없었지만 프랑스는 몇 가지의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녀는 전형적인 데메디치의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타개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가톨릭 및 위그노 지도자들을 소환하여 상이한 교리의 간격을 좁히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실패하자 카트린은 생제르망 칙령을 발행하여 종교상의 관용을 장려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기즈 공작은 예배 중인 위그노 교도들을 공격하여 학살했고 이는 30년에 걸친 프랑스 종교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1562년의 학살 사건에 분개한 개신교 귀족들이 군사를 일으키자 카트린은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이에도 실패하자 그녀는 왕국군을 파견했습니다. 개신교인 앙투안 드 부르봉이 상처로 사망하고 가톨릭 측의 변덕스러운 기즈 공작이 암살당하자 카트린은 1563년에 앙부아즈 칙령('평화 칙령')을 선포하여 분쟁을 해결했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위그노 및 가톨릭 영주들을 소집하여 사사건건 프랑스의 내정에 간섭하는 영국으로부터 르아브르를 재탈환하도록 했습니다. 국왕 샤를 9세가 명령한 바르톨로메오 축일(밤)의 대학살을 제외한다면 이 '이탈리아 여왕'에는 모든 상황이 순탄했습니다. 샤를은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 그녀가 가장 총애하는 다른 아들이 1573년에 폴란드의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이어 앙리 3세가 1574년에 프랑스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미 영육이 강건하게 성장하여 성인이 된 앙리는 다른 형제들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앙리는 십여 년 동안 잡다한 국정 일과 관련하여 카트린의 도움을 얻었지만 그는 1588년 블루아에서 카트린이 임명한 모든 왕실 관료를 파직하여 정부에 대한 그녀의 영향력을 사실상 종식시켜 버렸습니다. 또한 앙리는 어머니의 동맹으로서 여전히 막강함을 발휘했던 기즈 가문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즈 가문의 공작이 암살당하고 다른 여덟 명의 일족이 살해당했습니다. 69세의 나이로 병실에 누워 있었던 카트린은 소식을 접한 후에도 냉정을 유지했으며 약 한 달 후인 1589년 1월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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