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세기 동안 강제로 고립된 후, 지난 1,050년 동안 일본은 경제와 문화라는 측면에서 가장 분주하고 영향력 있는 문명 중 하나로 거듭났습니다. 에도의 사무라이들은 가부키, '부유하는 세상'의 목판화, 그리고 내정에 관심 있었고, 100년 후의 일본 예술가, 건축가, 패션 디자이너와 사업가들은 세계의 중심 무대에 섰습니다. 오랜 전통인 和(화합) 사상은 좋든 싫든 발전과 이익이라는 사상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서기 712년경에 일본어로 집필된 최초의 고서인 '고사기'에 따르면 태고의 최초 다섯 신에 이어 탄생한 이자나가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이 434개의 일본 섬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커다란 창으로 바다를 저은 후 다시 꺼내자 창 끝에 물방울이 맺혔고 이 물방울은 떨어져 일본 열도를 형성했습니다. 두 남매 신은 여기서 정착하여 수많은 신과 '정령'을 잉태했다고 하지만, 진실은 좀 더 평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류는 약 40,000년에 걸쳐 육상으로 일본을 드나들었고 열도는 약 29,000년 후에 아시아에서 분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원전 660년에는 문명이 고개를 들었고, 당시의 황제는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가 지상으로 내려 보낸 것으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일본의 '역사가 처음 기록된 시점'은 3세기 정도이지만 서기 57년에 집필된 중국의 후한서와 같은 이전 문헌에서도 객관적인 정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무렵의 고훈시대에는 수많은 유혈 사태를 통해 혼슈 본토의 남중부 지역을 지배하게 된 야마토 부족을 위시한 여러 전투 부족이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모든 부족의 무릎을 꿇게 만든 야마토는 자신을 통일 일본의 황제로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향후 몇백 년에 걸쳐 야마토 왕가의 힘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왕실의 권한은 야망에 부푼 다이묘(영주)들에 의해 조금씩 부식되어 갔습니다.
야마토 황족이 집권한 최초 몇백 년 동안에는 일본의 농부들이 철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벼 재배를 위한 경작 및 관개 방식이 발전했으며 맛 좋고 영양이 풍부한 작물은 일본 요리의 핵심 재료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러한 풍년 덕분에 적은 수의 농민이 더 많은 양의 식량을 경작할 수 있었고 다이묘는 남아도는 인력을 군사력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사무라이('호위 무사')라는 새로운 계급이 일본 사회에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온갖 영주들이 사병을 보유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인접 국가로부터 다수의 신기술을 수입해 오고 있었고, 이 중에서도 중국의 한자가 가장 중요하였습니다. 한자와 함께 종교 즉, 유교가 유입되었고 이어서 6세기에는 불교가 일본으로 들어왔습니다.
최초의 쇼군은 황제에 의해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들에는 제국 통치를 거부하는 에조 및 아이누족과 다른 섬들의 부족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 직위는 세습되었고 쇼군은 군대의 지도자이자 황좌 뒤의 숨은 통치자로 인식되었습니다. 물론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수많은 내전이 일어났는데, 1185년에는 미나모토가 겐페이 전쟁에서 당대의 쇼군이었던 다이라 가문을 대부분 몰살했습니다. 미나모토는 즉시 봉건제를 법으로 시행했고 세속과는 거의 분리되어 있었던 황제는 명목상의 군주로 남게 되었습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사망하자 그의 처가인 호조 가문이 막부를 장악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호조 도키무네는 두 차례의 몽골 침략을 막아내고 선불교를 전파했으며 부시도의 최종 형태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몽골 침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일본의 역사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두꺼운 가죽을 끓여 만든 몽골군의 갑옷에 칼이 부러져 나가는 모습을 본 일본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이에 검장들은 너무도 유명한 카타나를 고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용맹스런 사무라이는 처음으로 외국의 적과 상대하게 되었지만, 외세와 대적한 경우는 세 차례(1592년의 조선 침략 및 1609년의 류큐 침공)에 불과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서로를 도륙하느라 분주했습니다.
호조 가문은 고다이고 황제가 황족의 통치권을 되찾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1333년까지 집권했습니다. 고다이고 황제는 이 과정에서 여러 귀족, 사무라이 가문과 몇몇 호전적인 불교 승려의 도움을 받았지만 쿠데타에 참여한 일부는 후속 조치에 만족하지 못했고 1336년에 봉기하여 황제를 요시노 산으로 몰아냈습니다. 향후 60년 동안 두 개의 황실이 북부와 남부에 양립했고 일본에 대한 지배권이 둘 사이에 양분되었습니다. 남부의 황제는 상징적인 군주로 남았고 실질적은 권력은 아시키가 막부에 있었습니다. 1931년에는 두 황실이 통일되었고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전국시대'(센고쿠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150년에 걸쳐 지속된 전국시대는 사회적 격변, 정치 음모와 암살, 그리고 사무라이 사병 간의 끊임없는 군사 충돌로 정의됩니다. 물론 좋은 점도 있었는데 오늘날까지 건재한 일부 성들을 포함한 경이로운 성들에 적용된 건축 공학이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고 일본의 무사들이 유럽 상인으로부터 수입한 머스킷총을 비롯한 다수의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닌자가 출현한 것입니다. 결국에는 현명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일본이 거의 통일이 되는듯 했지만 그는 1582년에 가장 신뢰했던 측근의 배신으로 불행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 여파로 유혈 사태가 발생했고, 노부나가의 주변 다이묘이자 동맹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에 쇼군의 직위를 차지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가장 유명한 사무라이 중 한 명에 속합니다.
이렇게 복잡한 와중에 유럽인들이 도착했습니다. 1543년에는 중국으로 향하던 포르투갈의 배가 다네가 섬에 상륙했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와 영국 모두 이곳을 경유했으며 예수회,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의 선교사들이 이곳에 체류하며 복음을 전파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새로운 쇼군은 당시에 건설 중이던 교역소와 성당이 유럽 침공을 위한 전조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게다가 기독교는 특히 침울한 농민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1637년, 기독교로 개종한 30,000여 명의 기독교인과 로닌(주인을 잃은 사무라이)들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이 쇼군의 대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쇼군(일본의 장군)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제1차 쇄국정책에 이어 시마바라 폭동이 발생했고 그의 후계자들은 향후 250년에 걸쳐 그의 정책을 따랐습니다. 선교사, 상인과 모든 외국인이 추방되었고 몇몇 네덜란드인과 중국인은 나가사키의 데지마 섬에 구금되었습니다. 한국과의 교역 지역은 쓰시마로 제한되었습니다. 일본을 출입하는 모든 외국인은 즉결 처형되었습니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추방되었고 이들이 지은 학교와 성당은 철거되었으며 다이묘가 기독교로 개종할 경우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일본에서는 잘못의 크고 작음과 상관없이 사형이 처벌의 표준이었습니다.
쇄국정책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도쿠가와의 막부가 집권한 25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일본은 사회 및 문화의 번영, 그리고 카타나(무력)를 통한 안정과 평화를 실현했습니다. 우키요에 목판 인쇄술은 물론 가부키 및 분라쿠 극장 덕분에 위대한 미술품들이 탄생했으며 가장 유명한 고토 및 사쿠하치 곡들이 이 시대에 작곡되었습니다. 게이샤는 단순한 각종 연예인의 형태에서 고아한 여성미의 정점으로 진화했고, 예술에 대한 사무라이의 후원 덕분에 우아한 조경과 건축 양식이 섬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사회 구조가 엄격해졌으며 가장 하천민에 속하는 농부(약 85%)에서 250명의 다이묘에 이르는 모든 구성원이 각자의 위치와 역할을 인지했습니다. 이러한 선을 넘을 경우 혹독하고 즉각적인 처벌이 가해졌습니다. 다도에서 할복에 이르는 모든 것이 엄격한 예식으로 변화하였습니다.
1835년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찾아와 개항을 요구하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별 탈 없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총으로 무장한 네 척의 신식 함선을 몰아 에도 만을 우회하여 찾아온 페리 제독은 서양과 무제한의 개방 무역을 실시할 것을 일본에 요구했습니다. 페리 제독은 이듬해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이번에는 일곱 척의 전함을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거대한 대포로 쇼군을 위협하며 '평화 친선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후 5년 이내에 일본은 서양 대부분의 강대국과 유사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문지방에서 외국의 군사력에 무릎을 끓어 수치를 당한 막부는 와해되었으며 황제가 실질적인 권력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1867년에는 젊고 활기 넘치는 메이지 천황이 권좌에 올랐습니다. 그는 군함을 타고 일본 해안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서양인들과 동일한 수준의 군대와 경제를 갖추기 위해 일본 전체에 대한 철저한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1912년, 정부에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다이묘가 소유한 대부분의 섬을 '제국의 관리' 하에 두었으며 대부분의 영토를 소작농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식의 자유를 허용하고 상업을 장려했으며 사무라이 계급을 사실상 없애버렸습니다. 좀 더 실용주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왕실에서는 산업화를 장려하고 유럽을 본으로 삼은 입헌군주제를 마련했습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1873년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징병제를 통해 일본제국육군과 해군을 구축했습니다.
매우 효율적인 모습을 보인 일본은 머지 않아 지역의 주요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 서양의 또 다른 성향인 식민지 제국 건설을 곧 모방하기 시작했습니다. 1894년,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빈사 상태의 중국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가볍게 중국을 제압했고 한국, 대만, 펑후 군도와 요동 반도를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켰습니다. 하지만 서구 세력 때문에 요동 반도를 중국에 반환했고, 중국은 이를 러시아에 임대했습니다. 일본은 분개했고 이를 계기로 발발한 1904년의 러일 전쟁은 일본이 '서양'의 강대국을 무찌를 수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일본은 패전국인 독일이 보유한 태평양과 아시아의 식민지를 넘볼 수 있게 되었고, 이어서 조금씩 중국으로 손을 뻗치기 시작한 일본은 만주까지 점령하여 모두를 경계하게 만들었습니다. 침체기와 서구의 관세에 자극을 받은 전체주의 군국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1930년 후반에는 서양의 민주주의 국가와 제국주의 일본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중국에서 자행된 일본인의 잔학행위에 대한 대중의 격렬한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군을 격퇴했고, 일본군이 인도차이나를 점령했으며, 만주에서는 일본과 러시아의 충돌이 이어졌습니다. 머지 않아 일본은 서기 1941년에 미국과 대영 제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초반의 놀라운 성공 이후에 이어진 대패로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열세에 몰렸고 1945년 8월에는 원자폭탄 투하로 전쟁이 종식되었지만, 미국의 점령 아래에서도 일본은 잿더미 속에서 다시 불사조처럼 일어나 세계 최고의 경제, 기술 및 문화국 중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수 세기 동안 강제로 고립된 후, 지난 1,050년 동안 일본은 경제와 문화라는 측면에서 가장 분주하고 영향력 있는 문명 중 하나로 거듭났습니다. 에도의 사무라이들은 가부키, '부유하는 세상'의 목판화, 그리고 내정에 관심 있었고, 100년 후의 일본 예술가, 건축가, 패션 디자이너와 사업가들은 세계의 중심 무대에 섰습니다. 오랜 전통인 和(화합) 사상은 좋든 싫든 발전과 이익이라는 사상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서기 712년경에 일본어로 집필된 최초의 고서인 '고사기'에 따르면 태고의 최초 다섯 신에 이어 탄생한 이자나가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이 434개의 일본 섬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커다란 창으로 바다를 저은 후 다시 꺼내자 창 끝에 물방울이 맺혔고 이 물방울은 떨어져 일본 열도를 형성했습니다. 두 남매 신은 여기서 정착하여 수많은 신과 '정령'을 잉태했다고 하지만, 진실은 좀 더 평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류는 약 40,000년에 걸쳐 육상으로 일본을 드나들었고 열도는 약 29,000년 후에 아시아에서 분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원전 660년에는 문명이 고개를 들었고, 당시의 황제는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가 지상으로 내려 보낸 것으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일본의 '역사가 처음 기록된 시점'은 3세기 정도이지만 서기 57년에 집필된 중국의 후한서와 같은 이전 문헌에서도 객관적인 정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무렵의 고훈시대에는 수많은 유혈 사태를 통해 혼슈 본토의 남중부 지역을 지배하게 된 야마토 부족을 위시한 여러 전투 부족이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모든 부족의 무릎을 꿇게 만든 야마토는 자신을 통일 일본의 황제로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향후 몇백 년에 걸쳐 야마토 왕가의 힘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왕실의 권한은 야망에 부푼 다이묘(영주)들에 의해 조금씩 부식되어 갔습니다.
야마토 황족이 집권한 최초 몇백 년 동안에는 일본의 농부들이 철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벼 재배를 위한 경작 및 관개 방식이 발전했으며 맛 좋고 영양이 풍부한 작물은 일본 요리의 핵심 재료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러한 풍년 덕분에 적은 수의 농민이 더 많은 양의 식량을 경작할 수 있었고 다이묘는 남아도는 인력을 군사력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사무라이('호위 무사')라는 새로운 계급이 일본 사회에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온갖 영주들이 사병을 보유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인접 국가로부터 다수의 신기술을 수입해 오고 있었고, 이 중에서도 중국의 한자가 가장 중요하였습니다. 한자와 함께 종교 즉, 유교가 유입되었고 이어서 6세기에는 불교가 일본으로 들어왔습니다.
최초의 쇼군은 황제에 의해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들에는 제국 통치를 거부하는 에조 및 아이누족과 다른 섬들의 부족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 직위는 세습되었고 쇼군은 군대의 지도자이자 황좌 뒤의 숨은 통치자로 인식되었습니다. 물론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수많은 내전이 일어났는데, 1185년에는 미나모토가 겐페이 전쟁에서 당대의 쇼군이었던 다이라 가문을 대부분 몰살했습니다. 미나모토는 즉시 봉건제를 법으로 시행했고 세속과는 거의 분리되어 있었던 황제는 명목상의 군주로 남게 되었습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사망하자 그의 처가인 호조 가문이 막부를 장악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호조 도키무네는 두 차례의 몽골 침략을 막아내고 선불교를 전파했으며 부시도의 최종 형태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몽골 침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일본의 역사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두꺼운 가죽을 끓여 만든 몽골군의 갑옷에 칼이 부러져 나가는 모습을 본 일본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이에 검장들은 너무도 유명한 카타나를 고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용맹스런 사무라이는 처음으로 외국의 적과 상대하게 되었지만, 외세와 대적한 경우는 세 차례(1592년의 조선 침략 및 1609년의 류큐 침공)에 불과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서로를 도륙하느라 분주했습니다.
호조 가문은 고다이고 황제가 황족의 통치권을 되찾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1333년까지 집권했습니다. 고다이고 황제는 이 과정에서 여러 귀족, 사무라이 가문과 몇몇 호전적인 불교 승려의 도움을 받았지만 쿠데타에 참여한 일부는 후속 조치에 만족하지 못했고 1336년에 봉기하여 황제를 요시노 산으로 몰아냈습니다. 향후 60년 동안 두 개의 황실이 북부와 남부에 양립했고 일본에 대한 지배권이 둘 사이에 양분되었습니다. 남부의 황제는 상징적인 군주로 남았고 실질적은 권력은 아시키가 막부에 있었습니다. 1931년에는 두 황실이 통일되었고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전국시대'(센고쿠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150년에 걸쳐 지속된 전국시대는 사회적 격변, 정치 음모와 암살, 그리고 사무라이 사병 간의 끊임없는 군사 충돌로 정의됩니다. 물론 좋은 점도 있었는데 오늘날까지 건재한 일부 성들을 포함한 경이로운 성들에 적용된 건축 공학이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고 일본의 무사들이 유럽 상인으로부터 수입한 머스킷총을 비롯한 다수의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으며 처음으로 닌자가 출현한 것입니다. 결국에는 현명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일본이 거의 통일이 되는듯 했지만 그는 1582년에 가장 신뢰했던 측근의 배신으로 불행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 여파로 유혈 사태가 발생했고, 노부나가의 주변 다이묘이자 동맹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에 쇼군의 직위를 차지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가장 유명한 사무라이 중 한 명에 속합니다.
이렇게 복잡한 와중에 유럽인들이 도착했습니다. 1543년에는 중국으로 향하던 포르투갈의 배가 다네가 섬에 상륙했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와 영국 모두 이곳을 경유했으며 예수회,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의 선교사들이 이곳에 체류하며 복음을 전파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새로운 쇼군은 당시에 건설 중이던 교역소와 성당이 유럽 침공을 위한 전조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게다가 기독교는 특히 침울한 농민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1637년, 기독교로 개종한 30,000여 명의 기독교인과 로닌(주인을 잃은 사무라이)들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이 쇼군의 대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쇼군(일본의 장군)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제1차 쇄국정책에 이어 시마바라 폭동이 발생했고 그의 후계자들은 향후 250년에 걸쳐 그의 정책을 따랐습니다. 선교사, 상인과 모든 외국인이 추방되었고 몇몇 네덜란드인과 중국인은 나가사키의 데지마 섬에 구금되었습니다. 한국과의 교역 지역은 쓰시마로 제한되었습니다. 일본을 출입하는 모든 외국인은 즉결 처형되었습니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추방되었고 이들이 지은 학교와 성당은 철거되었으며 다이묘가 기독교로 개종할 경우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일본에서는 잘못의 크고 작음과 상관없이 사형이 처벌의 표준이었습니다.
쇄국정책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도쿠가와의 막부가 집권한 25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일본은 사회 및 문화의 번영, 그리고 카타나(무력)를 통한 안정과 평화를 실현했습니다. 우키요에 목판 인쇄술은 물론 가부키 및 분라쿠 극장 덕분에 위대한 미술품들이 탄생했으며 가장 유명한 고토 및 사쿠하치 곡들이 이 시대에 작곡되었습니다. 게이샤는 단순한 각종 연예인의 형태에서 고아한 여성미의 정점으로 진화했고, 예술에 대한 사무라이의 후원 덕분에 우아한 조경과 건축 양식이 섬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사회 구조가 엄격해졌으며 가장 하천민에 속하는 농부(약 85%)에서 250명의 다이묘에 이르는 모든 구성원이 각자의 위치와 역할을 인지했습니다. 이러한 선을 넘을 경우 혹독하고 즉각적인 처벌이 가해졌습니다. 다도에서 할복에 이르는 모든 것이 엄격한 예식으로 변화하였습니다.
1835년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찾아와 개항을 요구하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별 탈 없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총으로 무장한 네 척의 신식 함선을 몰아 에도 만을 우회하여 찾아온 페리 제독은 서양과 무제한의 개방 무역을 실시할 것을 일본에 요구했습니다. 페리 제독은 이듬해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이번에는 일곱 척의 전함을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거대한 대포로 쇼군을 위협하며 '평화 친선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후 5년 이내에 일본은 서양 대부분의 강대국과 유사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문지방에서 외국의 군사력에 무릎을 끓어 수치를 당한 막부는 와해되었으며 황제가 실질적인 권력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1867년에는 젊고 활기 넘치는 메이지 천황이 권좌에 올랐습니다. 그는 군함을 타고 일본 해안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서양인들과 동일한 수준의 군대와 경제를 갖추기 위해 일본 전체에 대한 철저한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1912년, 정부에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다이묘가 소유한 대부분의 섬을 '제국의 관리' 하에 두었으며 대부분의 영토를 소작농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식의 자유를 허용하고 상업을 장려했으며 사무라이 계급을 사실상 없애버렸습니다. 좀 더 실용주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왕실에서는 산업화를 장려하고 유럽을 본으로 삼은 입헌군주제를 마련했습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1873년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징병제를 통해 일본제국육군과 해군을 구축했습니다.
매우 효율적인 모습을 보인 일본은 머지 않아 지역의 주요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 서양의 또 다른 성향인 식민지 제국 건설을 곧 모방하기 시작했습니다. 1894년,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빈사 상태의 중국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가볍게 중국을 제압했고 한국, 대만, 펑후 군도와 요동 반도를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켰습니다. 하지만 서구 세력 때문에 요동 반도를 중국에 반환했고, 중국은 이를 러시아에 임대했습니다. 일본은 분개했고 이를 계기로 발발한 1904년의 러일 전쟁은 일본이 '서양'의 강대국을 무찌를 수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일본은 패전국인 독일이 보유한 태평양과 아시아의 식민지를 넘볼 수 있게 되었고, 이어서 조금씩 중국으로 손을 뻗치기 시작한 일본은 만주까지 점령하여 모두를 경계하게 만들었습니다. 침체기와 서구의 관세에 자극을 받은 전체주의 군국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1930년 후반에는 서양의 민주주의 국가와 제국주의 일본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중국에서 자행된 일본인의 잔학행위에 대한 대중의 격렬한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군을 격퇴했고, 일본군이 인도차이나를 점령했으며, 만주에서는 일본과 러시아의 충돌이 이어졌습니다. 머지 않아 일본은 서기 1941년에 미국과 대영 제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초반의 놀라운 성공 이후에 이어진 대패로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열세에 몰렸고 1945년 8월에는 원자폭탄 투하로 전쟁이 종식되었지만, 미국의 점령 아래에서도 일본은 잿더미 속에서 다시 불사조처럼 일어나 세계 최고의 경제, 기술 및 문화국 중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