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고고학 박물관은 유물을 3개가 아닌 6개씩 보유할 수 있으며, 한 번에 고고학자 2명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고고학 박물관은 유물 6개가 소장되면 자동으로 테마가 지정됩니다.
역사적 배경
노르만족이 모든 어이없는 상황에 종지부를 찍기 전까지만 해도 켈트족, 브르탸뉴인, 앵글족, 로마인, 색슨족과 바이킹 등 배를 소유한 온갖 민족이 '왕권의 섬(Sceptered Isle)'을 침략했습니다. 브리튼 왕국의 역사는 '노르만 침략'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과거에도 전설적인 아서왕을 비롯한 여럿이 서로 분쟁 중이었던 잉글랜드의 귀족들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 시도했지만 이를 실질적으로 달성한 것은 '사생아왕 윌리엄'이라고도 알려진 정복자 윌리엄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왕국을 장악한 오늘날의 '그레이트' 브리튼은 유럽연합, 세계 경제(6위)와 인류 문화를 주도하는 국가 중 하나이며 약 6,4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왕좌를 두고 경쟁하던 앵글로 색슨족의 해럴드 고드윈슨과 노르웨이의 하랄드 하르드라다 등을 제치고 살아남은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도버, 캔터베리, 켄트, 서더크는 물론 윈체스터의 왕실 금고까지 빠르게 점령했습니다. 완고했던 잉글랜드의 여러 백작과 성직자가 항복했고 윌리엄은 1066년 12월에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남은 일생 동안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반란 및 바이킹의 침략을 진압했으며 노르망디에 위치한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1135년에는 그의 대통이 끊기고 말았으며 잠깐 동안의 '무정부 상태' 이후에 앙주 왕조가 잉글랜드의 왕좌를 차지했습니다.
1153년의 월링포드 조약에 의해 당시의 모든 잉글랜드 내전이 당분간 종식되면서 유명한 사자왕 리처드와 그의 형제이자 악명 높은 왕이었던 존 래크랜드를 비롯한 네 명의 앙주 왕이 영주로서 굳건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네 왕은 추운 브리튼 땅에서는 볼 수 없는 황금빛 사자가 뒷발로 서 있는 모습이 그려진 왕실 문양을 제작했으며,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두 마리의 사자를 추가로 그려 넣었습니다. 잉글랜드에 대한 존 왕의 통치 능력은 형편 없었으며 노르망디를 프랑스에게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강요에 의해 대헌장에 동의해야 했습니다. 대헌장은 2015년에 왕실, 그리고 왕실에 반대하는 남작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약이며 향후 몇 년에 걸쳐 개정을 거쳤습니다. 지금까지는 왕이 '힘과 의지'로 통치하며 일방적이고 임의적인 결단을 내려 왔지만 이제는 국민, 적어도 상류 지주 계층의 권한은 보장하는 '법치'를 위한 초석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소작농은 이후로도 몇 세기에 걸쳐 상류층의 소유물처럼 취급되었습니다.
물론 잉글랜드의 역사는 몇 십 명의 왕족과 귀족에 대한 이야기가 다가 아니며 수천 명의 힘 없는 농노, 하인, 군인, 상인, 사제, 무역상, 필경사, 술집 주인, 주부, 예술가, 소설가 및 평민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잉글랜드는 농경 및 수경 재배가 번창함에 따라 자급자족이 가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상업이 번창했고 모직물과 견목 공예품을 위시한 잉글랜드의 제품은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중세시대의 브리튼은 활기 넘치는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가 제작되었고, 초서와 말로리는 걸작을 내놓았으며,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 성당과 성들이 건축되었고, 로빈 후드 등의 설화가 뿌리를 내렸습니다.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리게 된 잉글랜드 국민들은 권리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앙주 가문은 더욱 이기주의적이었던 플랜태저넷 가문에 이끌려 브리튼의 왕좌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플랜태저넷 가문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간 지속된 백년 전쟁을 시작하여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는 프랑스의 왕좌를 차지하여 가세를 확장하기 위한 노골적인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무능했던 리처드 2세가 1399년 9월에 폐위되고 몇 개월 후에 감옥에서 아사하면서 이들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랭커스터 가문이 왕좌를 차지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찬가지로 플랜태저넷의 방계 가문이었던 요크 가문에서 통치권을 두고 도전했습니다. 1455년을 기점으로 두 가문 사이에는 간헐적인 분쟁 즉, 화려하지만 유혈이 낭자했던 장미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흥미로운 시기에는 기회를 보며 편을 바꾸는 남작들이 자주 목격되었습니다. 종국에는 요크와 랭커스터 가문 모두 사실상 괴멸된 상태였으며 뷰포드 가문 출신으로 크게 두각을 보이지 않았던 헨리 튜더가 랭커스터의 마지막 후손인 리처드 3세를 보즈워스 필드에서 사살하고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헨리 튜더(헨리 7세)는 바로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통치권 경쟁을 종식했습니다. 또한 법의 경계를 벗어나는 무자비한 징수 방식을 통해 정부의 정치 및 재무 안정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했고 칙선 법정 변호사단을 만들어 귀족들을 저지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대변혁을 실현한 인물은 오랜 기간에 걸쳐 영국을 다스린 그의 아들 헨리 8세(1509-1547년)와 손녀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년)였습니다. 자만심이 극에 달한 헨리 8세는 여러 명의 아내와 정적을 참수하는 와중에 성공회를 만들어 교황의 말에 도전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영국의 국왕이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는 가장 막강한 가톨릭 국가에 도전함으로써 성공회를 지켜냈습니다. 잉글랜드에는 참으로 파란만장했던 100년의 시간이었습니다.
한편 평민들의 영향력이 나날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1295년에는 하원이 결성되었고 '성직 귀족 또는 세속 귀족' 외의 대표가 선출되어 국민의 관심사를 피력하고 군주에게 조언을 제안했습니다. 헨리 8세는 이들을 대체적으로 무시하거나 처형한 반면 엘리자베스 1세는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재무적, 애국적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헨리 8세와 특히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하에 예술은 만개했고 시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희곡 작품들을 집필하여 평민들이 열심히 일하여 번 돈을 소비할 수 있는 즐길거리를 선사했습니다. 잉글랜드의 가톨릭 재산을 흡수한 군주 정권은 영국의 작곡가, 외국 출신의 화가와 건축가를 후원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박람회와 축제가 일상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처녀 여왕'(버진 퀸)은 자식을 두지 않고 승하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영국을 통치했던 두 명의 스튜어트 왕족에 이어 청교도 혁명, 비운의 찰스 1세에 대한 처형으로 시작된 잠깐의 공화정, 스튜어트 왕가의 복원이 뒤따랐고 1707년에는 명예 혁명과 연합법의 도래와 함께 영국(대브리튼왕국,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이 공식화되었습니다. 한편 엘리자베스가 시작한 정책에 따라 영국은 전 세계에 걸친 탐사 작전과 식민지 정착을 금전적으로 지원하거나 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신세계에 국한되었던 탐사 및 정착이 나중에는 더 먼 지역까지 범위가 확장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의 정책에 의해 시작된 영국 해군은 스페인 무적 함대의 압박 하에 '해상의 군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앤 여왕은 17번의 임신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녀가 없었으며 1714년에 49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그녀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오른 6촌 지간의 하노버 왕가의 조지는 영어를 구사할 줄 몰랐습니다. 1714년부터 1830까지 장기간 집권하며 소홀함과 광기의 경향을 보인 네 명의 조지 일가를 고려한다면, 현재의 입헌군주제와 수상이 이끄는 내각 책임제로의 전환을 원한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조지 3세는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잃었지만 어쨌든 영국군이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괴멸시켰을 당시에는 황제의 직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반적인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고 군주가 통치자보다는 명목상의 왕과 상징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만큼 이제는 수상이 집권하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노버 왕가에 이어 색스-콜드버그 가문의 평범한 한 명의 군주가 왕좌에 올랐고, 이어서 1917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에 대한 반감을 피하기 위해 윈저 가문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혁명의 땅인 브리튼에는 1800년대 중반에 또 다른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찬란한 '제2차' 산업혁명은 짙은 석탄 연기, 공장과 조선소의 소음과 섬 곳곳에 거미줄처럼 깔린 철도로 표현됩니다. 새로운 제조 중심지의 새로운 빈민가가 새로운 임금 노예로 가득 채워지면서 영국인들은 문명에서 단 한 번도 목격된 적 없는 생활 수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모두가 빅토리아 시대(재미는 없지만 장수한 여왕의 이름을 따 명명됨)를 만끽할 수 있도록 번창했습니다. 1901년에는 최초의 3상 고압 전기 발전소가 뉴캐슬어폰타인 근처에 준공되었고 1912년에는 영국에서 세계 최대의 통합 전력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연중무휴로 가동되는 영국의 공장에서는 음식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재화가 풍족하게 생산되고 있었으므로 성가시고 복잡한 국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산업혁명이 영국에 영향을 주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였는지는 모르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시절에는 '백인의 책무'를 짊어 지고 식민지 개척을 활발히 진행하여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영국은 160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에 곳곳에 소규모의 식민지를 구축해 왔지만 증기선, 기차, 해저 케이블과 다수의 연발총 및 드레드노트 덕분에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캐나다, 호주, 남아프리카, 홍콩, 싱가포르, 인도, 뉴질랜드와 곳곳에 분산된 여러 전초기지에서 생산된 농작물과 원자재가 강력한 상선으로 운반되어 영국의 거대한 항구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전신선을 따라 먼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영국 정부에 도착하는 즉시 강력한 영국 군대와 위용이 넘치는 영국 해군이 해당 지역으로 출동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한 후 현실에 안주했던 영국인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0년 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독일 국방군에 의해 대륙의 모든 동맹국이 모두 점령당하고 몰타에서 수에즈 운하로 이어지는 극동 지역의 자산을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를 절박하게 방어하고 있던 용맹하고 완강한 영국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 그리고 우호적인 교역 협정으로 영국을 뒤에서 지탱해주고 있던 미국이 원군으로 참전할 때까지 버텨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독일과 일본 독재자들의 자만심에 기인했습니다. 종국에는 영국이 승리했지만 영국의 경제는 고갈되었고 450,000명에 달하는 시민이 목숨을 잃었으며 엄청난 채무와 치솟는 인플레이션이 겹치면서 영국 제국은 와해되었습니다. 남은 영토는 영연방으로 묶였지만 이는 표면적인 결과에 불과했습니다. 더 나아가 영국은 영문도 모른 채 냉전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진보적인 민주주의 국가로서 스포츠, 상징물 및 전통에 매혹되어 있습니다. GNP(국민총생산)가 1.6조 파운드스털링(약 2.5조 달러)에 달하는 영국은 미술에서 과학, 정치, 금융에 이르는 대부분의 분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각 고고학 박물관은 유물을 3개가 아닌 6개씩 보유할 수 있으며, 한 번에 고고학자 2명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고고학 박물관은 유물 6개가 소장되면 자동으로 테마가 지정됩니다.
역사적 배경
노르만족이 모든 어이없는 상황에 종지부를 찍기 전까지만 해도 켈트족, 브르탸뉴인, 앵글족, 로마인, 색슨족과 바이킹 등 배를 소유한 온갖 민족이 '왕권의 섬(Sceptered Isle)'을 침략했습니다. 브리튼 왕국의 역사는 '노르만 침략'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과거에도 전설적인 아서왕을 비롯한 여럿이 서로 분쟁 중이었던 잉글랜드의 귀족들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 시도했지만 이를 실질적으로 달성한 것은 '사생아왕 윌리엄'이라고도 알려진 정복자 윌리엄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왕국을 장악한 오늘날의 '그레이트' 브리튼은 유럽연합, 세계 경제(6위)와 인류 문화를 주도하는 국가 중 하나이며 약 6,4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왕좌를 두고 경쟁하던 앵글로 색슨족의 해럴드 고드윈슨과 노르웨이의 하랄드 하르드라다 등을 제치고 살아남은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도버, 캔터베리, 켄트, 서더크는 물론 윈체스터의 왕실 금고까지 빠르게 점령했습니다. 완고했던 잉글랜드의 여러 백작과 성직자가 항복했고 윌리엄은 1066년 12월에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남은 일생 동안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반란 및 바이킹의 침략을 진압했으며 노르망디에 위치한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1135년에는 그의 대통이 끊기고 말았으며 잠깐 동안의 '무정부 상태' 이후에 앙주 왕조가 잉글랜드의 왕좌를 차지했습니다.
1153년의 월링포드 조약에 의해 당시의 모든 잉글랜드 내전이 당분간 종식되면서 유명한 사자왕 리처드와 그의 형제이자 악명 높은 왕이었던 존 래크랜드를 비롯한 네 명의 앙주 왕이 영주로서 굳건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네 왕은 추운 브리튼 땅에서는 볼 수 없는 황금빛 사자가 뒷발로 서 있는 모습이 그려진 왕실 문양을 제작했으며,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두 마리의 사자를 추가로 그려 넣었습니다. 잉글랜드에 대한 존 왕의 통치 능력은 형편 없었으며 노르망디를 프랑스에게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강요에 의해 대헌장에 동의해야 했습니다. 대헌장은 2015년에 왕실, 그리고 왕실에 반대하는 남작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약이며 향후 몇 년에 걸쳐 개정을 거쳤습니다. 지금까지는 왕이 '힘과 의지'로 통치하며 일방적이고 임의적인 결단을 내려 왔지만 이제는 국민, 적어도 상류 지주 계층의 권한은 보장하는 '법치'를 위한 초석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소작농은 이후로도 몇 세기에 걸쳐 상류층의 소유물처럼 취급되었습니다.
물론 잉글랜드의 역사는 몇 십 명의 왕족과 귀족에 대한 이야기가 다가 아니며 수천 명의 힘 없는 농노, 하인, 군인, 상인, 사제, 무역상, 필경사, 술집 주인, 주부, 예술가, 소설가 및 평민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잉글랜드는 농경 및 수경 재배가 번창함에 따라 자급자족이 가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상업이 번창했고 모직물과 견목 공예품을 위시한 잉글랜드의 제품은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중세시대의 브리튼은 활기 넘치는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가 제작되었고, 초서와 말로리는 걸작을 내놓았으며,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 성당과 성들이 건축되었고, 로빈 후드 등의 설화가 뿌리를 내렸습니다.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리게 된 잉글랜드 국민들은 권리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앙주 가문은 더욱 이기주의적이었던 플랜태저넷 가문에 이끌려 브리튼의 왕좌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플랜태저넷 가문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간 지속된 백년 전쟁을 시작하여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는 프랑스의 왕좌를 차지하여 가세를 확장하기 위한 노골적인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무능했던 리처드 2세가 1399년 9월에 폐위되고 몇 개월 후에 감옥에서 아사하면서 이들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랭커스터 가문이 왕좌를 차지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찬가지로 플랜태저넷의 방계 가문이었던 요크 가문에서 통치권을 두고 도전했습니다. 1455년을 기점으로 두 가문 사이에는 간헐적인 분쟁 즉, 화려하지만 유혈이 낭자했던 장미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흥미로운 시기에는 기회를 보며 편을 바꾸는 남작들이 자주 목격되었습니다. 종국에는 요크와 랭커스터 가문 모두 사실상 괴멸된 상태였으며 뷰포드 가문 출신으로 크게 두각을 보이지 않았던 헨리 튜더가 랭커스터의 마지막 후손인 리처드 3세를 보즈워스 필드에서 사살하고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헨리 튜더(헨리 7세)는 바로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통치권 경쟁을 종식했습니다. 또한 법의 경계를 벗어나는 무자비한 징수 방식을 통해 정부의 정치 및 재무 안정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했고 칙선 법정 변호사단을 만들어 귀족들을 저지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대변혁을 실현한 인물은 오랜 기간에 걸쳐 영국을 다스린 그의 아들 헨리 8세(1509-1547년)와 손녀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년)였습니다. 자만심이 극에 달한 헨리 8세는 여러 명의 아내와 정적을 참수하는 와중에 성공회를 만들어 교황의 말에 도전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영국의 국왕이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는 가장 막강한 가톨릭 국가에 도전함으로써 성공회를 지켜냈습니다. 잉글랜드에는 참으로 파란만장했던 100년의 시간이었습니다.
한편 평민들의 영향력이 나날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1295년에는 하원이 결성되었고 '성직 귀족 또는 세속 귀족' 외의 대표가 선출되어 국민의 관심사를 피력하고 군주에게 조언을 제안했습니다. 헨리 8세는 이들을 대체적으로 무시하거나 처형한 반면 엘리자베스 1세는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재무적, 애국적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헨리 8세와 특히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하에 예술은 만개했고 시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희곡 작품들을 집필하여 평민들이 열심히 일하여 번 돈을 소비할 수 있는 즐길거리를 선사했습니다. 잉글랜드의 가톨릭 재산을 흡수한 군주 정권은 영국의 작곡가, 외국 출신의 화가와 건축가를 후원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박람회와 축제가 일상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처녀 여왕'(버진 퀸)은 자식을 두지 않고 승하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영국을 통치했던 두 명의 스튜어트 왕족에 이어 청교도 혁명, 비운의 찰스 1세에 대한 처형으로 시작된 잠깐의 공화정, 스튜어트 왕가의 복원이 뒤따랐고 1707년에는 명예 혁명과 연합법의 도래와 함께 영국(대브리튼왕국,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이 공식화되었습니다. 한편 엘리자베스가 시작한 정책에 따라 영국은 전 세계에 걸친 탐사 작전과 식민지 정착을 금전적으로 지원하거나 인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신세계에 국한되었던 탐사 및 정착이 나중에는 더 먼 지역까지 범위가 확장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의 정책에 의해 시작된 영국 해군은 스페인 무적 함대의 압박 하에 '해상의 군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앤 여왕은 17번의 임신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녀가 없었으며 1714년에 49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그녀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오른 6촌 지간의 하노버 왕가의 조지는 영어를 구사할 줄 몰랐습니다. 1714년부터 1830까지 장기간 집권하며 소홀함과 광기의 경향을 보인 네 명의 조지 일가를 고려한다면, 현재의 입헌군주제와 수상이 이끄는 내각 책임제로의 전환을 원한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조지 3세는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잃었지만 어쨌든 영국군이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괴멸시켰을 당시에는 황제의 직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반적인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고 군주가 통치자보다는 명목상의 왕과 상징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만큼 이제는 수상이 집권하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노버 왕가에 이어 색스-콜드버그 가문의 평범한 한 명의 군주가 왕좌에 올랐고, 이어서 1917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에 대한 반감을 피하기 위해 윈저 가문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혁명의 땅인 브리튼에는 1800년대 중반에 또 다른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찬란한 '제2차' 산업혁명은 짙은 석탄 연기, 공장과 조선소의 소음과 섬 곳곳에 거미줄처럼 깔린 철도로 표현됩니다. 새로운 제조 중심지의 새로운 빈민가가 새로운 임금 노예로 가득 채워지면서 영국인들은 문명에서 단 한 번도 목격된 적 없는 생활 수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모두가 빅토리아 시대(재미는 없지만 장수한 여왕의 이름을 따 명명됨)를 만끽할 수 있도록 번창했습니다. 1901년에는 최초의 3상 고압 전기 발전소가 뉴캐슬어폰타인 근처에 준공되었고 1912년에는 영국에서 세계 최대의 통합 전력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연중무휴로 가동되는 영국의 공장에서는 음식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재화가 풍족하게 생산되고 있었으므로 성가시고 복잡한 국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산업혁명이 영국에 영향을 주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였는지는 모르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시절에는 '백인의 책무'를 짊어 지고 식민지 개척을 활발히 진행하여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영국은 160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에 곳곳에 소규모의 식민지를 구축해 왔지만 증기선, 기차, 해저 케이블과 다수의 연발총 및 드레드노트 덕분에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캐나다, 호주, 남아프리카, 홍콩, 싱가포르, 인도, 뉴질랜드와 곳곳에 분산된 여러 전초기지에서 생산된 농작물과 원자재가 강력한 상선으로 운반되어 영국의 거대한 항구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전신선을 따라 먼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영국 정부에 도착하는 즉시 강력한 영국 군대와 위용이 넘치는 영국 해군이 해당 지역으로 출동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한 후 현실에 안주했던 영국인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0년 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독일 국방군에 의해 대륙의 모든 동맹국이 모두 점령당하고 몰타에서 수에즈 운하로 이어지는 극동 지역의 자산을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를 절박하게 방어하고 있던 용맹하고 완강한 영국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 그리고 우호적인 교역 협정으로 영국을 뒤에서 지탱해주고 있던 미국이 원군으로 참전할 때까지 버텨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독일과 일본 독재자들의 자만심에 기인했습니다. 종국에는 영국이 승리했지만 영국의 경제는 고갈되었고 450,000명에 달하는 시민이 목숨을 잃었으며 엄청난 채무와 치솟는 인플레이션이 겹치면서 영국 제국은 와해되었습니다. 남은 영토는 영연방으로 묶였지만 이는 표면적인 결과에 불과했습니다. 더 나아가 영국은 영문도 모른 채 냉전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진보적인 민주주의 국가로서 스포츠, 상징물 및 전통에 매혹되어 있습니다. GNP(국민총생산)가 1.6조 파운드스털링(약 2.5조 달러)에 달하는 영국은 미술에서 과학, 정치, 금융에 이르는 대부분의 분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